2022. 7. 4. 18:56ㆍ생각
https://pann.nate.com/talk/365694416
근데 ㄹㅇ 열폭이 아니라 여신강림은 문제점 많은 웹툰 같아
진짜 주경이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초반에 학교에서 애들한테 멸시당하고 그러다가 화장으로 예뻐져서 고등학교가서 학교생활 피잖아.. 그리고 그것때문에 화장없이는 아는 친구 못만나는 불안
pann.nate.com
https://www.youtube.com/watch?v=2ewK9OXaoGo
외모지상주의적 획일주의 사고관이 판을 치는 판에서 제기하는 사회적 코르셋 조장 행각에 대한 이중적 비판적 성토를 통해, 우리는 비정상적인 기준의 외모 코르셋을 조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외모 코르셋을 단단히 조이러 GYM에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외모 코르셋을 조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나의 본유적인 상태를 선호할 여성은 그다지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매일같이 근력 운동을 한다. 여자들이 넓은 어깨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여성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넓은 어깨를 가지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근력 운동이라는 보조적 수단을 통해 약점을 보완해야 하는 후천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체형은 거의 타고나는 것이며, 그 골격을 후천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놈의 찔끔찔끔 솟아오르는(거의 커지지도 않는) 삼각근을 수년 동안 찢고 붙이기를 반복해야 하고, 팔뚝 둘레를 넓히고 광배를 두껍게 만들어 착시를 일으켜야 하는 인고의 과정을 버텨내야 하는 우리네 숙명을 우리가 괜히 부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비정상적인 외모 기준으로 평가받기 싫으면, 비정상적인 기준으로 외모 평가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내 외모가 달려도, 내가 좋아하는 상대의 외모의 기준은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키가 작고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키가 크고 잘생기고 근육질의 남성을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키가 작고 못생기고 뚱뚱한 남자도 예쁘고 날씬한 여성을 좋아한다. 탈코르셋을 한다고 해서, 그 탈코 상태가 만연해지고 디폴트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한들, 코르셋이라는 작금의 디폴트가 지배하는 획일주의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물론, 탈코르셋은 코르셋을 강요하지 말자는 취지이지, 반코르셋을 주장하는 것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참이고, 강요가 없다면 작금의 자발적인 코르셋 조이기는 문제가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강요 없는 자발적인 선택은 문제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 혹은 대부분은 미디어가 획일적이고 비정상적인 기준의 코르셋 조이기를 무의식적으로 강요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나도 이에 완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사후적인 판단, 즉 결과주의적 해석에 다름 아니다. 위 영상 속 두 인물에 대해, 나는 탈코르셋을 한 여자보다는 코르셋을 조인 여자가 성적으로 더 끌린다. 그 이유가 왜 그런지 나는 모르겠다. 그것이 성 본능인지, 미디어가 주입한 미적 기준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내가 큰 젖통에 발기하는 것이, 성적 본능인 건지, 아니면 미디어가 큰 젖통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기 위해 마케팅을 하는 것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하겠다. 만약 자본가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미디어를 이용하여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면, 절대다수가 포진한 작은 유방을 가진 여성들을 성적인 무대(섹스 시장)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왜 큰 유방을 만들기 위해 살을 찢어 보형물을 넣을까? 본인들이 보기에 이뻐 보여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섹스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본인의 뜻이라면 개인의 선택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고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그리고 획일주의적 외모를 지향하는 것이 시장 논리에 종속되어 판단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의 착인錯認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조장하는 시스템이 무조건적으로 질타되어야 하고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QzDzneF1z4&list=WL&index=3
- 자기 선택으로 성적 대상화가 되더라도 다른 여성에게 성추행 위험을 유발하기 때문에 잘못인가? (영상 4:08)
내 선택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잘못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모든 위해가 가는 나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인 건 아닐 것이고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너무 많은 잘못을 허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회의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 생산 공동 소유를 주장한다면 그것 역시 민폐로 여겨진다. 외모지상주의적 획일주의 사고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를 항상 외모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수 있다.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다양한 능력들을 외모 기준 하나만으로 싸잡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애, 결혼 시장에서 획일적이고 비정상적이고 혹독한 미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그리 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그러한 만행이 축적되고 만연하게 되어 시장의 소비 구조를 개변하게 한다면, 그 기준에 해당하지 못하는 자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아니하면 될 뿐이지, 그것이 보편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필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90% 이상의 소비자가 따르는 시장의 원칙을 굳이 우리에게 맞추라고 호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맞지 않는 기준이 모두에게 맞지 않는 건 아니다. 코르셋을 조이면 조일수록 몸값이 높아지는 부류가 있고 그것은 대다수가 그렇다. 코르셋을 아무리 조이려고 해도 도통 변화가 극미한 하위 부류는 통탄할 일이다. 선천적으로 키가 작거나, 게으른 행동과 과욕이 부른 폭식 등으로 몸이 뚱뚱하거나, 얼굴이 현저히 못생기거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성격이 이상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말을 저는 등, 연애 시장에서의 최소 기준도 통과하기 어려운 부류에게 사회적 코르셋은 가혹하다. 그런데 이들 역시 연애 상대로 코르셋을 가혹하게 조인 자를 선호한다. 그 어떤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도 코르셋을 벗어던진 한남을 연애 상대로 여기거나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남성의 탈코르셋이란 부당성에 대한 저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지워진 능력 증명 부담은 그들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특권에 지불하는 대가이다.
말이 샜으니 본론으로 돌아오자. 내 선택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위해는 가할 수 있는 내 모든 선택이 지양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예를 들어 보자. 몇 년 전부터 '헬창' 관련 밈이 유행하면서 쇠질을 하는 남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전부터 꾸준히 근력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근래 와서는 본의 아니게 헬창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남성의 근육질 몸매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거대 자본 논리에 따라 주입된 내면화된 사회적 코르셋이라고 주장할 테지만), 강한 수컷의 상징이라는 주장도 있고, 미관상 신체 형태적으로 그것이 어울린다는 주장도 있다.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코르셋을 조임으로써 다른 여성이 성희롱을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데, 이는 성희롱을 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 코르셋 조이기 자체를 지양해야 할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코르셋 조이기란, 중성적인 복장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일명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복장이나 노출, 마른 몸매, 큰 유방, 업된 히프 등을 가리키는데, 혹시 그들의 추론엔 이런 여성스러움을 숨긴다면 성희롱을 덜 받을 것이라는 숨은 전제가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이에 대한 좋은 비유로, 내가 공부를 못해서 혼나는 이유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부당하다는 것이 있다. 물론, 잘하는 아이들이 잘할 수밖에 없고 못하는 아이들은 못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라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교육 불평등만큼이나 외모 불평등 역시 만연하다. 그러나 사회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원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예쁘고 잘생겨지고 싶고 동시에 그러한 애인을 원한다. 아니 어쩌면, 잘난 애인을 얻는다면 내가 굳이 잘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욕심이다. 우리 모두가 비현실적이고 가혹한 외모 코르셋을 조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고, 그러한 애인을 원한다. 내가 높은 외모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면, 그래서 내가 변하기 포기했다면 이제 남은 단계는 하나다. 잘난 애인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어떤 한남도 탈코한 못생긴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한녀도 못생긴 한남, 심지어 코르셋을 조였는데도 불구하고 빻은 냄져를 거들떠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눈을 낮추지 않는 한, 이성을 만나고 싶다는 전제하에 양측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못생긴 여자는 분명 코르셋을 조인 여자로부터 간접적으로나마 피해를 받는 측면이 없지 않다. 코르셋이 어울리는 여자들이 코르셋이 어울리지 않는 여자들의 외모 가치와 경쟁력을 간접적으로라도 떨어뜨려 놓은 것은 사실이다. 코르셋이 이미 어울리는 여성들, 코르셋을 조임으로 인해 많은 이익을 얻는 여성들이 외모 차별을 받는 이들을 위해 공감과 동지애를 발휘해 코르셋을 벗을 이유는 굳이 없고 있더라도 개인의 자율에 달렸다. 나도 간혹 열등의식이 있거나 사회적 미의 기준에 나보다 덜 부합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 자신에 대한 과한 겸손을 굳이 발휘하여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조인 코르셋을 다른 열등자를 위해 벗어던질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함께 도태의 삶을 살기 싫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자가 그 부당한 권력을 놓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가령, 몸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다수가 좋지 못한 몸을 유지하고, 그 대다수의 몸이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몸이라고 한다면, 소수만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기준의 몸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 좋은 몸을 가진 자들 때문에 좋지 못한 몸을 가진 자가 상대적으로 소외받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가 쥔 것을 놓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좋은 몸은 내가 내세울 무기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부족한 나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을, 단지 그것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내려놓을 수 없다. 애초에 그리 부당하지도 않다. 물론 미디어가 근육질 몸만들기를 강요했다는 점이 부당하다면, 그 부당함을 따르는 내 자율성에 의한 결과물이 부당할 수는 있다. 살인의 강요에 의해 내가 살인을 하게 된 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부당한 행위가 된다. 마찬가지로 근육질의 몸만들기가 부당하고 내가 그 부당함을 따랐다면, 나는 부당한 결과물을 산출했고 내 행동은 부당하다. 그런데 내가 부당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려면 근육질 몸만들기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먼저 입증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그 누가 근육질 몸을 만들든, 즉 코르셋을 얼마만큼을 조이든 그것은 부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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