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부부는 왜 애를 낳는가?

2021. 11. 16. 14:15생각

https://pann.nate.com/talk/35855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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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글이 공감을 많이 받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한 필자의 사견을 서술하고자 한다.

"정상인들도 살기 힘든 세상"

"장애의 대물림"

위 구절은 해당 링크의 글의 요지이다. 선천성 장애인들끼리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장애를 가질 확률이 높은 경우가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왕왕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우려를 미리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애를 낳는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없지는 않다. 혹자는 본인들만 행복하면 장땡이지 뭔 문제가 있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안에는 생각보다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비장애인 부부가 출산을 한다고 하자. 생출 이전에는 선천적으로 유전병을 가진 장애인이 태어날 확률을 계측하여 확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부가 비장애인이라는 가정 하에 낮은 확률로 장애인이 탄신 할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물론 단지 확률의 차이 때문에 장애인의 출산을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바로 아이가 받을, 예상되는 고통이다. 장애인 부모는 그들 자신들만의 행복이나 욕구를 위해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합의와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하자. 그리고 장애인 복지에 대한 세금을 비장애인이 부담한다는 요소 또한 고려하지 않도록 한다. 이것들을 배제해도 문제의 소지를 지적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단지 세금 몇 푼 때문에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행위를 억제하려거나 눈치를 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역설할 뿐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고통의 높은 가능성을 배태한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나름 잘 산 것 같아 그러한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의 자식 또한 자신들처럼 잘 이겨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일까? 이것은 장애인 부모를 포함한 대부분의 비장애인 부모들도 자주 범하는 우치愚蚩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지금까지 존재했던 대부분의 자식들은 어떻게든 살아왔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살아졌다'. 죽지 못해 사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가용성 편향에 함몰된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지긴 한다. 그러나 그 경험의 표본을 근거로 자신의 자식 또한 그렇게 살리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에 의한 판단이다. 물론 확률적으로는 대부분 어떻게든 살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대부분의 살아지는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보다 더 중차대한 이유가 존재한다. 아이들이 그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필자에게 "웬 애같이 신세 한탄을 하느냐"라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고통이 있고 없고에 대한 신세 한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대체 내 선택이 아닌 것에 대한 책무가 누구에게 존재하느냐는 책임론에 관한 것이다. 비장애인 아이에게도 이런 물음이 제기되는데 하물며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현저한 예비 장애 가능 인자의 생출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현행법이나 인권 관련 조리에 따르면 그 누구도 그들의 선택에 제동을 걸 수 없다. 필자 역시 그 행위들을 강제로라도 제한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럴 권리도 힘도 없다. 그리고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단지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진 부부가 더 고심을 해서 아이에게 장애를 물려주지 않는 쪽을 택하기로 변심하는 편이 낫지 않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물론 신체나 정신의 장애가 살아가는 데에 불편함을 반드시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걱정의 대상이라거나 잘못인 것도 아니다. 불편을 느끼는 주체가 불편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높은 확률로 장애인은 살면서 불편을 인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처지와 절대다수의 비장애인의 삶을 비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비교로부터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뼈저리게 느낄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로 여겨진다. 세상에 만연한 차별, 외형적이고 기능적인 불편함을 다른 사람에 비해 몇 배는 더 겪으면서 인고의 나날을 보내게 될 장애인 아이에 대한 연민과 우려가 없지는 않다. 요즘에는 섣부르게 남에 대한 연민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불편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렇게 요청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마찬가지로 각자의 기준에 맞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 또한 자유이다. 물론 거짓 연민이나 공허 연민(연민의 대상에 대한 연민이 실제로는 필요가 없어, 불필요한 경우)은 상당히 소모적이며 거짓 약자를 만들어낼 여지가 있으므로 남용이나 오용은 자제될 필요가 있다. 아무튼 필자는 뻔히 보이는 고통을 선택하는 작태에 대한 경종을 울리지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장애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애인이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때 그에 대한 연민은 공허하다.

필자의 추론 역시 위의 부모들과 같은 동일한 오류를 범했다. 위에서 언급한 오류를 다시 설명하자면, 장애인 부모는 자신들이 생을 잘 살아냈다는 근거를 토대로 자신의 자식 또한 잘 살아내리라고 추측한다. 이는 잘못된 추측이라고 위에서 필자가 지적했다. 그런데 그 후에 필자는 장애인 아이가 장애로 고통을 받을 확률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토대로 아예 장애의 가능성의 씨앗을 제거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동일한 추론 형식을 통해 범한 동일한 착류에의 결론이다. 필자 역시 논리 규칙을 일면 배제하고 가치와 확률 데이터를 기반으로 결론을 도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사회적이고 가치가 개입된 판단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확률에 의존하는 판단이 그리 불건전하고 치부될 수는 없다.

장애인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거나 아름답다고 단정할 수 있고, 그 역이나 이, 대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또한 장애인은 그 자체로 멸시의 대상이 되거나 덜떨어지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치부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양립 가능한 가치 판단들이다.

장애인 → 존귀 (ㅇ)

장애인 → ~존귀 (ㅇ)

존귀 → 장애인 (ㅇ)

~존귀 → 장애인 (ㅇ)

비장애인 또한 마찬가지 추론이 가능하며 이러한 판단에 논리적 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치 판단은 생각보다 논의 가능한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존귀'라는 가치 언명이 포함되지 않고 다른 사실 언명이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물론 위와 같은 추론은 가능하다.

장애인 → 멸시받음 (ㅇ)

장애인 → ~멸시받음 (ㅇ)

멸시받음 → 장애인 (ㅇ)

~멸시받음 → 장애인 (ㅇ)

멸시를 받는다는 사건에는 물론 엄밀하게 계측 가능한 척도가 존재하기 애매한 측면이 분명 상존한다. 어쨌든 멸시라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상정한다면 그 멸시가 어떻게, 누구에게, 누구로부터 일어났는지에 대한 다양한 판단은 위 추론으로부터 유연하게 도출 가능하다.

아무튼 조금 말이 샌 것 같은데, 필자는 탄신의 비자발성에 경계하는 입장이며, 반출생주의에 대한 논의 또한 신중하게 받아들인다. 선천적으로 장애 유전 인자를 가진 장애인 부부가 높은 확률로 발생할 '장애(필자의 가치 판단에 의하면 고통)'를 배태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탄신의 선택권이 없는 자식의 예견되는 미래적 불편의 해소를 위해, 재고再考라는 배려를 선택하는 편이 낫다.

이 글은 충분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고 즉흥적으로 쓰인 것이다. 분명 필자가 고려하지 못한 여러 논리적 허점이 존재하리라 걱정하는 바이다. 이 글은 대두되는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의 일환으로, 이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사견에 불과하며 별다른 영향력이나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글에서 주장한 생각 내용은 향후 변동의 여지가 항존 하며, 필자가 지금 이 글에서 이 생각을 완강히 고수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 글은 장애인 문제나 여타 정치 사회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의 일환으로 쓰였다.

덧붙이자면, 이 글에서 필자는 장애인을 약자나 비정상성의 범주에서 논의하지 않았다(필자가 비장애인을 정상인이라고 지칭하지 않은 것 또한 그 이유이다.). 필자가 장애인에 대해 느끼는 안타까움이나 걱정은 그들의 신체적(정신적인 문제는 포함시키지 않음) 불편함이 예상된다는 측면에서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을 근거로 한다. 이는 월권이 성립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며 전적으로 개인적인 자유권의 행사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필자의 연민이 공허 연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웬만하면 그 연민을 표출하지 않으며, 생각도 가지지 않으려 한다(어떤 장애인은 자신에 대한 배려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실제적인 도움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실질적인 도움은 받길 원하면서 정서적인 측은지심은 갖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정서적인 연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장애인은 지금보다 더욱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장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가 도움이나 배려를 요청할 경우에 도와줘야지 선입견을 가지고 섣부르게 나서는 행동은 요즘 들어 특히 더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