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과 이타적 삶

2021. 11. 16. 14:14생각

자기 연민과 이타적 삶이 생각보다 유사하다는 것을 어제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연민이라는 감정을 이타적 연민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굳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단지 필자에 의하면 어제 자기 연민을 통하여 남을 위하는 감정이란 게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라면 내 삶의 태도에 적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제 필자는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밤 시간에 우연히 필자의 사진을 보았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고뇌로 보내 현타에 잠겨 있었다. 그런 심리 상태로 맞은 한 남자의 추레한 이미지가 필자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부스스한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작은 눈과 후줄근한 내복 차림. 그리고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불쌍했다. 물론 불쌍함이라는 감정을 촉발하는 트리거는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 보편적 감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회적인 암묵적 합의가 학습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그 상황에서 자기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요지이다.

필자는 자신을 그렇게 염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냥 별생각이 없이 살아왔다. 필자는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에 의한 자기 연민을 느낄 겨를이 적다. 필자는 이미지에 약하다. 추상적으로 안타까운 상황과 안타까워 보이는 상황이 충돌한다면 후자가 이긴다. 물론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마주치는 노숙자로부터 반드시 연민을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미지에 내성이 생긴 것일까. 아무튼 낼혈한 같이 행동해도 속은 뜨거운 면이 있는 나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한 마음을 표출하며 살 때가 온 것 같기도 하다. 그걸 어제만 깨달은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나는 나와 유사한 처지에 놓인, 이 시대의 프로 고민러들을 최대한 줄이는 일에 일조하며 살고자 다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직접 그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열패감, 고독감, 불안감 등의 심적 고통에 정면으로 오랜 기간 맞서야 한다는 것은 물론 성장통의 일환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심할 경우 제대로 설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우울의 구렁텅이로 짓이겨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대부분의 인생을 고통에 맞서왔고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방법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하나 깨달은 것은 정면 돌파가 회피보다는 낫다는 것뿐이다.

최근에 읽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는 '행복 = 공헌감'이라는 공식을 주창했다.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뜻이리라. 필자는 예전부터 이러한 가치관을 부인해왔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이익을 향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향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결국 이기적인 만족을 위하는 삶이라고 간주했다. 칸트처럼 어떤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 즉 정언명령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행동의 근거는 자기만족을 기반한다. 어떠한 감정의 파생도 고려 없이 특정 행위 그 자체를 목적하는, 절대적인 준칙을 실현하는 삶이나 이타적인 삶이라고 간주해왔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칸트가 이타성과 이기성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타적인 삶을 이기적인 삶, 그러니까 이타적인 절대 준칙을 실현하는 삶이 결국에는 자신을 위하는 삶이기도 하다고 간주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헌감으로부터 반드시 행복이 도출된다고는 아직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감정을 통해 공헌을 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행복과 공헌감이 어느 정도 상호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나를 대하는 것처럼 상대를 대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나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하찮게 여기는 게 아님)을 상대에게 투영하여 그 감정을 유지한 채로 타인을 대한다면 진심을 전할 수 있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다. 내가 나에게 느낀 감정을 타인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연민하는 감정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여 그것이 상대에게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나를 연민하여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내가 나를 측은히 여겨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계속 부여했다면 결과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 측은지심의 기억은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를 연민하여 나를 위해 무언가를 했던 기억조차 희미하다. 나를 연민한 적은 많지만, 정작 나를 위한 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즉, 오직 연민뿐인 것은 소용이 없다. 아니 애초에 나는 나에 대한 연민을 제대로 가지지도 않았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가령 게임이라든가 현재의 내가 아닌 이상적 나에 대한 망상) 정작 나를 돌보지 못했다. 후회한다. 후회감을 없애지 못할 정도로 후회의 낙인을 깊게 삭각削刻했다. 나에게 너무 미안하다. 미안함의 감정만으로 용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를 용서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리고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개선의 가능성이 차단된다. 내 삶에 대한 배려는 오직 나를 용서하는 것뿐이다. 나는 나를 용서하고, 나를 연민하고 더불어 편달하여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결국엔 성장하겠다는 일념과 그에 수반되는 적절한 노력 없이는 바뀔 가능성이 낮다. 나 자체를 일단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개선할 것은 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인정하도록 하는 자세를 취해야겠다.

맨날 이렇게 생각하고 쓰는 것만으로 바뀔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것도 그 변화의 노력의 일환이지만, 그보다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나를 대하는 감정을 토대로, 남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일석다조의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문제를 남도 가졌을 경우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나든 남이든 누구에게든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는 몸부림이란 말이 아닌가? 가령 나의 육중한 몸을 보고 연민을 느낀 나는 그 연민의 정도만큼 나를 위한 일을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성과를 낸다면, 그것을 남을 위해 쓸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해볼 수 있다. 나를 연민하던 마음이 결국엔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를 연민하는 만큼 남을 연민하자. 그것이 이타성이다. 물론 섣부른 월권은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결국 이러한 진심, 즉 나에 대한 그리고 남에 대한 진심은 결국 나와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세상을 그리 각박하고 삭막하게 하지 않는 데에 일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