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6. 14:11ㆍ생각
진용진 사과문
서수진 사과문
믿음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어떤 믿음의 주체가 믿음의 대상을 신용, 신뢰, 신망, 신의, 혹신惑信, 의시依恃, 시빙恃憑, 돈신惇信, 빙신憑信, 준신遵信, 신납信納하는 등의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즉 스스로 어떤 것을 믿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데, 그 믿음에 대하여 반드시 준신準信할 필요는 없다. 믿음은 그 자체로 사실성을 내포한다고 보기 어렵다. 즉 믿음은 불확실성을 함축한다. 믿음이 그를 여지가 항존 한다는 것이다.
진용진과 서수진은 왜 굳이 믿는다는 표현을 썼을까? 둘이 약속이라도 한 마냥 말이다. 사실 저 표현은 항간에서 간혹 쓰이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주로 정치권이나, 언론, 법조계 쪽에서 쓰인다. '믿음'의 사용이 꽤나 유용한가 보다. 가령 내가 a를 믿는다는 언사는, 내가 a를 진실된 사실이라고 단언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즉 a가 사실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하지 않는 한, 내가 a를 믿는다는 사실은 a가 실제로 진실된 사실이며 동시에 거짓된 사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믿는다는 의식의 작용에 의지한다는 정도의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용진이 성교를 부정한 것은 실제로 '성교 없음'을 근거한 추론에 의한 발화가 아니라 단지 불확실한 기억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방증에 불과하며, 수진이 주스 건을 기억하지 못함과 동시에 기억의 불확실성 여부를 떠나 주스 횡포를 부정하는 이유 또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주스 횡포 없음'을 근거한 추론에 의한 언표가 아니다.
믿음 언사는 거짓 사실에 대한 자기 귀책 감쇠 효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이 보이며, 따라서 꽤나 호용互用된다. 진용진의 사건의 경우는 진용진의 거짓말이 약간 섞였다는 사실이 일면 드러난 측면이 있어 논하기 어려우므로 차치하자. 수진의 사건의 경우, 만약 수진이 주스 사건을 정말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왜 수진은 불확실한 믿음을 근거로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피해 주장자인 폭로자의 동생은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사실인 양 단정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 차이가 단지 기억의 선명함의 차이로 결정지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수진의 기억은 불확실한데, 피해 주장자의 기억은 확실한가? 여기서 '피해자 기억 우월론'이 대두된다. 가해자는 자신이 괴롭힌 기억을 못 하지만 당한 피해자는 전부 기억을 한다는 가설이다. 나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는 오래전 사건이 몇 있다. 그런데 기억의 선명도에 기여하는 요인은 어떤 기억 대상을 감각적으로 진하게 경험하는 것인가? 귀납적으로는 그러할 여지를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피해 주장자가 주장하는 그 주스 사건은 왜 하필 피해 주장자에게만 선명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는가?
주스 사건 | ∧ | 피해 주장자 기억 | ∧ | 수진 기억 | ∴ | |
1 | T | T | T | T | ||
2 | T | T | F | F | ||
3 | T | F | T | F | ||
4 | T | F | F | F | ||
5 | F | T | T | F | ||
6 | F | T | F | F | ||
7 | F | F | T | F | ||
8 | F | F | F | T |
1의 경우 주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 진실된 사실을 구성하고, 피해 주장자의 기억, 즉 주스 사건을 일으킨 수진의 가해 행위가 참이며, 수진의 기억, 즉 주스 사건이 거짓된 사실을 구성하며 수진이 가해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이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믿음이 사실을 구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도 물론 마찬가지이지만, 어쨌든 사실이라는 객관적 사건은 믿음에 따라 속성, 즉 진리치를 달리하지 않는다. 물론 최근의 인식론, 존재론적 논의에 따르면 필시 다른 여러 주장이 가능하나, 여기서는 믿음이라는 정신적 사건과 사실이라는 물리적 사건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독립된 개체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어쨌든 그러면 1의 올바른 해석은, 주스 사건이 참이고 피해 주장자와 수진의 상충되는 기억이 동시에 참이라면, T ∧ T ∧ F가 되므로 결론은 F이다. 내가 진리표를 좀 잘못 구성했다. 다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주스 사건 | ∧ | 주스 사건(피해 주장자 기억) | ∧ | 주스 사건(수진 기억) | ∴ | |
1 | T | T(T) | F(T) | F | ||
2 | T | T(T) | T(F) | T | ||
3 | T | F(F) | F(T) | F | ||
4 | T | F(F) | T(F) | F | ||
5 | F | T(T) | F(T) | F | ||
6 | F | T(T) | T(F) | F | ||
7 | F | F(F) | F(T) | T | ||
8 | F | F(F) | T(F) | F |
순서는 첫 번째 표처럼 각 주장자들의 기억 순으로 배치했다. 2처럼 수진의 기억이 거짓이어서 주스 사건이 참을 구성하게 되는 경우, 해당 연언지는 참이 되어 피해 주장자의 기억이 옳으며, 7처럼 실제 사건과 피해 주장자의 기억이 거짓이어서 주스 사건이 거짓을 구성하게 되는 경우, 해당 연언지는 참이 되어 수진의 기억이 옳다. 뻔한 동어반복이지만 결국 누구의 기억이 더 신뢰할 만하냐의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일이다. 뭐 수진이야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이 글은 믿음과 기억에 대한 논의를 다룬 것이니, 수진의 앞으로의 항행을 차치하고 수진의 믿음 언사만을 놓고 평가를 하자면, 수진은 적어도 자신이 불확실한 기억을 어떠한 식으로도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배척하고 한 방향(주스 사건 거짓)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였다는 것만으로, 다소 상대로부터의 공격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냥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여하튼 둘은 정치인 같은 발화 표현을 통해 일을 더 크게 만든 것이 자명해 보이며, 둘 다 잘못을 저지른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점 또한 동일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진용진의 경우는, 이여름과 성교를 했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잘못을 구성한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여름이 불법 성매매 퇴폐업소녀가 아니라면 그런 사람과 교접을 한들 무슨 잘못이겠는가? 어쨌든 둘 다 미숙한 대처로 일을 그르쳤고, 진용진은 진작에 거짓적으로 대처한 사실을 자인했다. 그러나 수진의 경우, 수진이 부인하는 것을 거짓이라고 입증할만한 확정된 근거가 아직 없다. 단지 정황 근거들을 종합해 봤을 때, 수진을 가해자라고 간주하는 것이 기실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는 정황과 사실을 혼동한 데에서 기인한 태도라고 보인다. 정황은 사정과 상황이다. 주장이 반드시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의 주장, 기억, 믿음이 더 올바른지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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