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5. 12:59ㆍ생각
어제 출발한 서울-부산 간 13일의 국토 종주 여정이 발목과 무릎의 통증에 의해 하루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포기에 대한 합당한 이유인 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더 갈 수 있는 정도의,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일지도 몰랐다. 오늘의 선택은 고통의 신호를 중도 포기나 후일로의 연기에 대한 합리화의 요소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빠른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발목의 통증으로 미루어 보아 차라리 더 걷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만, 어쩌면 이 통증이 수십 킬로미터의 도보 행군을 통해 무뎌지고 상쇄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있어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위험 부담을 덜고, 돈을 아끼고, 시간을 벌고, 예상되는 미래의 교훈을 과감히 포기한 것은 그에 따른 기회비용을 현재의 가치 판단과 기준, 여러 감정 상태와 상황적 조건 등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나는 고통을 무릅쓰고 강행군을 이어나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가정은 이미 다른 길에 접어든 이상 소용이 없다. 나는 해운대에 도보로 도착하지 못하는 세계선에 올라탔고, 더불어 13일 도보 종주 1일차에 탈주한 세계선에 올라탔다. 어찌 되었든, 큰 도전을 선택하여 실행했고, 완주는 못하였을지라도 초기에 포기했다는 값진 경험을 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에베레스트 등정 초반에 포기한 그런 느낌이랄까. 에베레스트 등반은 누구도 시도도 어려운 일이다. 애초에 초기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어쨌든 일상적으로 하기 어려운 경험을 시도했으며, 비록 신체의 고통은 비의지적이고 그에 따른 포기 선언은 의지적이기에 비의지와 의지가 혼융된 결과를 낸 이번 사안에 대하여 나는 그다지 패배적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오늘 아침에는 생각이 많았다. 이미 여러 사람에게 선언도 했고, 평소에 중도 포기가 잦고, 그런 모습을 많이 비쳤던 내 모습이 이번 포기로 인해 다소 의지력이나 긍지가 낮아 보이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건 여러 상황과 남에게 비칠 내 모습에 대한 내 기대나 해석에 불과할 따름이지, 내가 경험한 깨달음과 교훈과는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부차적인 잔걱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나는 이번 중도 하차를 그리 심각하게 문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초반에 일찍 포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포기가 어떤 이유에 기인하든 그것이 일괄적으로 좋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결과에 의존하는 듯이 보이는데, 가령 이른 포기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 경우에 이른 포기는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이른 포기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그 경우에 이른 포기는 좋지 않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반면, 이른 포기의 과정만으로도 좋거나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른 포기 그 자체로 좋거나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운동선수가 4년을 준비한 올림픽 시합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스스로 중도 포기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그 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가? 물론 둘은 별개다. 4년간의 운동은 물론 올림픽에서의 자신의 결과물을 목적으로 설정하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맞지만, 목적이나 의도의 관점으로가 아닌 그냥 사건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4년은 단지 선수의 운동, 연습의 시간이다. 그 안에서는 올림픽 실전에서와는 다른 경험이나 배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올림픽 중도 포기에 의해 그 4년의 시간이 그 자체로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중도 포기 역시 의미가 있다. 시합, 경기 중, 중도 포기를 하는 선수는 전체 선수 중에 그리 많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국토 종주를 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지만, 국토 종주 하루 만에 중도 포기를 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마치 머니게임에서 빅현배가 첫날에 중도 포기를 선언한 것이 신의 한 수를 둔 것이라고 칭예 받으며 빛현배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하달까. 뭐가 되었든 난 포기를 했고, 내 포기에 따른 기회비용을 난 택했다. 내가 중도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행군 이행이라는 선택에 따른 여러 기회비용(신체의 휴식, 시간, 돈 절약 등)을 포기할 것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반면 나는 중도 포기를 선택함으로써 발생할 여러 기회비용(신체의 고통, 행군에 들이는 시간, 미래의 예상되는 교훈, 여행 경비 등)의 포기를 감수했다. 기회비용이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하는 것 중 가장 가치가 큰 것이라고 정의된다면, 종주 중도 포기의 기회비용은 종주 완주로 인한 깨달음일 터이고, 종주 강행의 기회비용은 2주의 시간과 경비일 것이다. 난 2주의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물론 지금 본가에 와서 요양하면서 부모와 시간을 보낼 터이지만, 이 시간은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간 맞을 시간이었고, 물론 그랬다면 다른 기회비용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어쨌든 이 시간은 여러 포기와 선택이 어우러져 얻어낸 기회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유용하게 잘 써야 할 것이다.
고난과 자유는 같이 간다. 내가 어제 걸으면서 생각한 것이다. 걷는 동안은 자유의 상황의 발현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구속되어 있었다면 나는 자유롭게 걷는 행위를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의 상황에서도 몸은 고되었다. 마치 인생에서 우리가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둘을 양립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리라. 단지 비유에 불과한 것.
선언은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것이다. 내가 걸어서 부산까지 가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치 섞인 판단을 해왔다. 그러나 나의 중도 포기는 그들의 평가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히말라야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발언이, 그 선언자가 반드시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한다는 사실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 발언은 발언의 의미만 담을 뿐, 어떠한 사실도 담지하는 것은 아니나, 일상적으로 그 발언자의 의지나 발언의 내용에 따른 의미 정도,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 정도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히말라야를 정복할 것이라는 발언에는 '히말라야를 정복할 수 있거나 중도에 포기할 수 있거나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조차 하지 못할 수 있는 등의 여러 가능성이 내포한다. 그냥 선언자가 히말라야를 정말로 정복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만 생각하면 된다. 실지로 등정 중간에 포기를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의지박약이니,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한다느니 등의 가혹한 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번 포기는 내 자유에 의존했는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철학적 논제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유연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자면, 이번 선택에는 일면 내 자유가 개입되었다. 나는 발목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가 많다. 아니, 이유가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내 선택의 진짜 원인이 아니라 단지 내가 믿고 싶은 것들 간의 결정체로서의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종주 포기로 인한 시간과 자금의 확보, 발목과 무릎 통증이라는 위험 신호가 어쩌면 영구적이거나 반영구적, 혹은 일시적으로 내 신체를 손상시켜 악화시키거나 치료에 많은 공력을 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차단, 첫날의 경험이 13일 동안 동일하게 유지된다면 그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치란 것이 무엇이냐는 의구심에 대한 미련 없고 가차 없는 배척 등이며, 그것이 나를 특정한 방향으로 선택하게 만들었다. 특히 첫날 느낀 감정, 교훈 등이 앞으로 계속 비슷한 정도로 유지된다면 그것을 굳이 늘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내가 포기를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물론 13일 차에는 엄청난 통증이나 고난이 누적되었을 것이고, 종착지에의 도달은 그 간의 고통에 대한 크나큰 보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특별하게 많은 사색의 시간으로부터 현격한 가치를 뽑아내지 못한다면, 그 고난의 행군의 과정은 단지 최종 한 방을 위한 예열 과정으로 전락하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으리라는 창렬적인 가성비가 나를 포기에로 종용했다.
이 외에도 많은 이유로 인해 포기했다. 이 행군이 내 신체를 훼손해가면서까지 꼭 경험해야 하는, 인생에서 굳이 필요한 과정인가?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적응될 것이라는 예상을 딛고 행군을 지속할 만큼 이 과정은 중요한가? 불확실한 가능성에 확실한 손실을 거는 것은 합리적인가? 그 손실은 정말 손실인가? 만약 나이가 들어 이 과정을 완주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왜 그 미래의 나는 이 종주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가? 이 종주는 재미있는가? 이 종주는 어떤 깨달음을 주는가? 어떠한 깨달음을 준다면 그것을 확실히 주는가(그렇지 않다)? 단지 경험 그 자체가 값진 것이라면, 다른 수많은 값진 경험을 두고 하필 이 경험을 완수하지 못한 것만을 아까워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가령 나는 의사든, 변호사든, 교수든, 유튜버든 뭐든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러한 직업을 해보는 것은 값진 경험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을 전부 해보지는 못할 것이다. 이때 나는 의사나 국회의원, 교사를 해보지 못한 것을 나중에 가서 아까워해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나는 교수가 정말 하고 싶었고 지금도 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며, 되기 어렵건 그렇지 않건 이유 불문 나는 교수를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깝다. 그것을 가질 가능성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것이 아깝고 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 단지 그러한 경험이 꼭 나에게 필요해서, 이미 하던 중이었는데 중도에 포기하거나 쟁취하지 못하여 아까운 것은 아니다.
이른 포기의 누적은 인생에서 그다지 좋지 못한가? 논리적으로만 따지자면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고 답해야겠지만, 단지 그것이 좋지 않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할 수 있으며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반문하자면, 왜 그것이 좋지 않아야 하는가? 누구나 하다가 재미없거나, 의미 없거나, 필요가 없거나, 더는 지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중도에 포기할 수 있다. 그러한 중도 포기가 습관이 되어 나중에 큰일을 그르칠 수 있는 상황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물론 그러한 결과의 측면에서 좋지 못하게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르칠 만한 그 큰일이 그르쳐지든 그렇지 아니하든, 그것은 어떤 경우에 좋은 상황이고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는가? 그것을 누가 결정하며, 일관되게 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 어떤 것도 확답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안다. 많은 찔러보기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잦은 포기가 나중에도 계속 잦은 포기를 불러오는 건 아니다. 공부를 빨리 포기하는 사람이라도 게임은 빨리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게임을 금방 질려 하는 사람이라도, 공부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우린 선후관계를 결정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국토 종주를 일찍 포기한 것과 그렇지 아니하고 완주했을 때의 두 경우에 대해 어느 것이 내 인생에서의 성공에 더 기여하는가에 대한 건이다.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는 알 수 없을뿐더러, 인과성을 결정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다. 국토 종주라는 단일하고 일시적이며 특수한 사건을 가지고 인생 전반에 대한 성공을 논하라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단서만으로 방대한 사건의 결과를 추리하라는 꼴과 같다. 더군다나 국토 종주라는 조건은 무작위적이다. 성공에 대한 어떠한 결정되거나, 양이나 음의 속성을 갖지 않는다. 누군가는 어렸을 때의 특정한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특정한 성격적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어떤 중대해 보이는 사건이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현금의 관점에선 예상으로 이루어져 있고, 과거나 현재의 어떤 사건도 미래를 어떠한 식으로 결정하거나 유도할 수 있다는 예표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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