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5. 12:58ㆍ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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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사고 글쓰기 PDF 완성, 인생에서 느낀 최고의 쾌락
2021년 5월 28일 오전 7시 3분, 나는 초사고 글쓰기 PDF를 모두 완성하였다. 완성했을 때의 기쁨은 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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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인데, 방금 자청이 올린 글을 보니, 아무래도 이들 업계에서 자주 남용하는 이 공교한 언법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 이렇게 글을 쓴다. 사실 오늘 딱히 쓸 글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자청을 저격하는 것이거나 그가 심대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청과 같은 부류의, 현혹적 마케팅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술인 '타깃 설정'과 '사전 확언', '편협한 경험적 일반화'가 어떤 논리적인 오류를 내포하는지 따져보고 싶었다. 자청이 구사하는 화법, 그러니까 위 이미지에 기재된 언술에는 애매성의 오류, 전칭과 특칭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은 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점, 그리고 기본적인 인과(causality)에 대한 몰이해가 전제되고 있다. 물론 내가 자비의 원칙까지 무시하며 토씨 하나하나까지 따져가며 지적하는 엄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자청 같은 사람의 주장에 왜 한 번 더 의심해 봐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청 같은'이라는 형용 어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애매하다. 단지 '사짜 기질이 있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사짜 기질이 있는'은 그것이 적용되는 피수식어에 실제로 사짜의 기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만약 '자청 같은'과 '사짜 기질이 있는'이 동의同義라면 '자청 같은 자청'은 피수식어구인 자청이 가리키는 지시체가 실제로 사짜 기질이 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나 나는 자청이 정말로 사짜 기질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짜 기질이 있는 자청'이라는 주장만으로 실제 자청이 사짜 기질을 필함(entailment) 한다는 것을 도출해낼 수 없다. 이에 따라 필자는 '자청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어떠한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짜일 수 있는'이라는 추측적이고 불확정적인 가능 언법을 사용할 것이다. '사짜일 수 있는'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사짜이거나 사짜가 아니라는 것을 확정하지 아니함으로써 사짜일 수도 있는 경우와 동시에 사짜가 아닐 수도 있는 경우를 모두 가능적으로만 지시한다. 그리고 당해 언법을 불필요하고 비약적으로 해석하여 '사짜일 경향이 있는' 따위로 편파적이게 받아들여선 아니 될 것이다. 그냥 단지, 자청은 사짜일 수도 있다. 그뿐이다. 이에 따르면, 필자도 사짜일 수 있고, 문재인도 사짜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런 무의미한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그러한 수식어 사용의 필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나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자청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임이 없다는 것. 아무튼 잡설은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먼저 앞에서 제기한 세 가지 기술에 대한 오류 가능성을 짚어보자. 타깃 설정, 즉 타기팅은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하기에 최적화된 구매자를 모객하는 마케팅 기법의 일환이다. 여기서 딱히 지적할 것은 없다. 자청 같은 부류를 넘어서서 대부분의 마케터나 판매자는 이것을 이용하며 이에는 문제가 없다. 가령 약을 팔려면 약을 잘 살 것 같은 부류의 인간을 물색해야 한다. 약팔이들이 괜히 무지하고 외로운 일부 독거노인 부류를 타기팅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청 역시 자신의 글이든 영상에서 자신의 서비스를 받아들이기에 최적화된 고객을 선별하는 작업을 거친다. "이 영상 끝까지 보시면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있을 겁니다", "이 영상이나 글조차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성공하려는 생각일랑 접어 두시라" 등의 다소 강해 보이는 표현으로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있는 자, 어느 정도의 공부 의지나 능력이 있는 자, 일정 정도의 긍정성을 가진 자, 믿음과 추종심을 가진 자 등을 세심하게 혹은 대략적으로 선별한다. 대표적인 자기계발, 동기부여, 도서 마케팅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의 경우를 보면, 그들에게는 성장할 의지가 없는 부류, 그러니까 졸꾸러기가 아니면서 약한 유대로 결속되지 아니한 부류의 사람들을 품을 이유가 전연 없다(물론 그들은 졸꾸러기의 성장이 선한 영향력을 미쳐 세상을 좋게 만들 것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 부류가 아닐뿐더러 그들을 품을 하등의 이유도 없고, 그들에게 쏟을 공력을 구독자나 졸꾸러기에 쏟는다면 더욱 큰 복합적인 이익이 창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하러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부류를 포섭하겠는가? 이것은 국가가 할 일이다. 통제 가능한 영역에서 자신들만의 포섭 전략이나 마케팅 기량을 맘껏 발휘하는 것이 교묘하다면 교묘하겠지만 잘못은 아니다.
'사전 확언'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바로 문제의 예시를 위의 이미지를 통해 알아보자.
"이 책을 읽는다면 세 가지는 보장할 수 있다"
이것을 조건문 형태로 치환하여 보자.
(자청이 판매하려는) 책 읽음 → 세 가지 보장
여기서 세 가지는 다음과 같고, 그것들을 연언지로 묶어 표현하자. (더 간략하게 표기하겠다.)
자청 책 → 초사고 ∧ 상위 1% 글쓰기 실력 ∧ 30일 챌린지
여기서 후건의 '30일 챌린지'는 그냥 그런 연습 방법이 있다니까 문제 삼지 아니하기로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자청 책 → 초사고 ∧ 1% 작문 실력
여기서 위 조건문이 단지 조건 형식을 띤 조건문(conditional sentence)이냐, 아니면 함언(implication)이냐에 대해 논해볼 수 있다. 형식논리적으로든, 실질 함축에 의거하든 간에 후자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낫다. 단지 형식적인 것만 따질 것이면 전자만 고려하면 될 뿐이어서 불필요하며 실재의 건전성을 따져 본다고 한들 반례가 너무 쉽게 도출되어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 우선적으로 초사고나 1%의 작문 실력의 의미와 범위, 정의가 모호할뿐더러 설령 그들의 범위나 의미 따위가 명확하다고 간주하더라도, 자청 책을 읽고서 후건의 두 항 어느 것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당해 함언은 반증된다. 그리고 이미 아래에서 자신의 책을 읽고도 '변화가 없다면' 환불을 해주겠다는, 앞의 태도와는 모순되는 작태를 취한다. 자청은 이미 일전에 자신의 책을 읽음으로써 세 가지의 변화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의 '주장'이 실제로 그 주장의 내용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의 확언이 단지 공허한 주장에 불과할 뿐이라면 도대체 그의 말을 신뢰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물론 여기서 논리적인 반론은 가능하다. 마지막 문단의 환불 선언은 '정말 세 가지의 보장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세 가지의 보장이 더없이 확실하기에 거짓 조건문을 배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첫 문단에서의 세 가지의 보장이 자청의 책을 읽음으로써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을 전제할 경우에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자청의 책을 읽고 세 가지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자청이 마지막 문단에 배치한 환불 관련 조건절은 첫 문단에 대한 확언의 재확인이 아니라, 정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논리적으로까지 따져가며 지적할 일은 아니다. 대개 그들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책의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하면서까지 책의 효용과 가치를 높게 살 공산이 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타기팅이 최적화된 상황에서 자청은 그의 소비자들에게 어중간하고 불확실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다.
아 사전 확언 얘기하다가 잠깐 딴 길로 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지금 현재, 자청의 책이 발매하기 전이므로 자청의 책을 읽은 사람이 없다. 여기서 자청은 어떻게 자신의 책을 읽'을' 사람이 세 가지를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까?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그 누구도 자청이 예언가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단지 유연하게, 자청이 낸 텍스트의 집적물이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자청의 주장, 그러니까 자청의 생각에서 나왔고 그가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을) 위의 글이 그 주장의 내용이 실제로 참이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의 확언은 다소 문제가 있다. 그는 그럴 수 있고 그를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자청이 믿는 결과는 자청의 주장과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청의 믿음의 가부가 결과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클지도 모른다.
편협한 경험적 일반화는 뭐 간단하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유사하지만, 아직 책의 결과물을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책의 내용은 자청 본인의 경험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것은 이미 자청이 본인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자청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필연적인 성공의 일반론을 단지 자신이 실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성공'의 애매성을 문제 삼지 아니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한 애매한 개념에 대한 일반론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 일반론이라는 것이 개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자청이 자신의 책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명시한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이라는 조건의 의미에는 기본적으로 전칭이 생략되어 있다고 봐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청이 문장의 의미의 혼동을 줄이고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면 '이 책을 읽는 어떤 사람에겐 세 가지가 보장된다(더 안전하게는 '이 책을 읽는 어떤 사람에겐 세 가지가 보장될 수 있다')' 따위로 엄정하게 다듬었어야 한다. 누구도 이런 자신 없어 보이는 화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청은 확고한 주장의 사용을 통해 나 같은 사람을 고객으로 삼는 것을 포기했다.
자청의 경험은 내 인생의 지표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청의 책을 읽는 것이 내 인생의 성공을 항상 결정한다거나 반드시 조력한다고 단정하는 것이 적어도 내 인생의 결과 확인 이전에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자청의 주장이 범하고 있는 문제에 네 가지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애매성의 오류이다. 먼저 자청의 책을 읽는다는 것부터 애매성의 문제를 지닌다. 자청의 책을 '읽기만 하면' 자청이 보장하는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대부분의 보통의 지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판단 가능하다. 그런데 방금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가? '보통의 지력'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자청의 책을 읽기만 해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의 지력을 갖지 않는가? 설령 보통의 지력이 명확하게 구획된 것이라면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청의 책을 읽기만 해서 세 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는 이렇게 애매성에 낚이게 된다. 우리가 재단하는 상식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황되고 매도적인지 알 수 있다. 방금 문장 역시 애매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내 말을 잘 이해한 것이다. 뭐가 되었든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있어, 이러한 애매성을 엄격하게 피해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비의 원칙은 꽤나 유용하게 작용한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상식적이고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원칙에 대한 이해가 많은 대화에서 생략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것은 꽤나 유용하다. 아무튼 자청이 범한 애매어의 남용은 많은 이해자들에 의해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자청이 만들어낸 듯이 보이고, 그가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어떠한 경지인 초사고의 상태와 같은 것은 명확한 정의가 필요해 보이며, 상위 1% 이내의 글쓰기 실력 역시 자신이 밀고 있는 상품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그가 양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다면 그것의 구획을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확실히 해줌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된다.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 백만 명이라고 했을 때, 이 중 2만 명이 자청의 책을 구매하여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고 하자. 그러면 도대체 이 2%의 작문가들은 어떤 논리로 전부 상위 1%의 경지에 들 수 있는가? 단지 이런 자질구레한 수치나 따져가며 일반적인 현실성을 비약해가면서까지 자청을 음해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1%라는 것을 곧이곧대로 1%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상위 클래스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보장한다고 다소 유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해도, 자청의 믿음과 주장이 맞는지는 결국 '그의 책을 구매하여 본 이후에나 확인이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아, 이것은 자청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안 되는 게임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다.
자청은 전칭과 특칭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자청의 글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간과하는가? 가령 우리 중에 누군가는 자청의 책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설령 그 누군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자청의 책을 구매할 수 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이러한 사고와 태도는 매우 건전해 보인다. 자청 역시 이러한 구매를 유도했을지 모른다. 자청의 주장은 굉장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나 역시 그에 끌릴 정도이다. 자청은 굳이 특정 부류를 지시하거나 혹은 특칭 언급을 분명하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의 영향력을 국소화하고 있지 않다. 그만큼 자신이 있나 보다.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반례, 그러니까 자청의 믿음에 반하는 하나의 사례만 존재하더라도 자청의 자신은 배격될 수 있다. 물론 그가 단지 자신의 책으로부터의 몇몇의 실패 사례를 통해 자신감을 상실하고 현실에 굴복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탓을 실패자의 요건이나 상황, 실패 당사자에게 돌릴 것이 예상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청은 자신의 이론이나 경험이 정말 성공의 절대 법칙이라고 믿을 만큼 지능이 낮을 거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일반론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는 생각하기 쉽다. 적어도 그 일반론이 물리 법칙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에 한하여, 그리고 그것이 현실 세계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 한하여. 다음에 언급할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혼동 파트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물은 어떤 꽃의 생존에 필요조건이다. 물이 없다면 꽃은 반드시 죽는다. 논리적으로는 꼭 그렇지 않지만 어쨌든 물리적으로 일반적인 지구 생명의 메커니즘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자청의 책을 읽지 않는다면 성공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다소 받아들여지지 않는 조건이다. 자청의 책이 성공에 대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자청의 책이 없어도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애초에 성공은 어려울지도 모르며, 또한 자청의 책이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성공에 일조는 할 수 있다는 점에까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청의 책이 오히려 비성공에 기여한다고 입증할 근거도 없지 않은가. 이렇듯 자청의 책, 그의 주장과 믿음, 이론, 상품 등의 성공 기여도를 입증해내거나 반증해내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물론 하나의 정해진 일반적인 주장이 있다면 그것을 반증하는 것은, 입증보다는 쉽다. 그에 대한 반증례를 하나만 제시해도 배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주장에는 입증이나 반증이 비슷한 정도로 작용한다. '자청은 사기꾼 기질이 있다'를 입증하는 것은 그의 사기꾼적인 면모 몇 개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입증하였다고 볼 수 없다. 특히나 '기질'이 어느 정도 지속성을 요구한다면 단지 하나의 사례만으로 그 기질성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기질의 일부를 입증해냈다는 사실마저 배제할 수는 없다. 자청의 사기꾼 기질을 입증하는 개개의 사례는 그의 사기꾼 기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대한 개연성을 강화한다. 반증 역시 어려운데, 그가 사기꾼 기질이 없는(이는 다소 애매한 표현에다가 실제로 대응하는 사건 역시 애매하긴 매한가지이지만) 사례를 몇 가지 제시하는 것만으로 그가 사기꾼 기질이 있다는 것을 완벽히 반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공존하면서 두 속성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사기꾼 기질이 있으면서 있지 않을 수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 모순으로 접근하면 아니 되기에 배중률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집합적으로 봐야 한다. 자청에게 사기꾼 기질이 51%, 비사기꾼 기질이 49% 혼융한다고 하자. 이때 자청은 사기꾼에 가까운가? 단지 저 수치만으로 그렇다고 결정하는 것은 자청에게 미안하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절반이나 가진 그의 사기꾼 기질에 1, 2%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냐며 쉽게 (자청이) 사기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말이 또 샜는데 아무튼 자청의 책을 읽는다고 그가 주장한 세 가지의 결과가 반드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확실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자청의 책을 읽거나 받아들이는 모든 행위를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주장한 세 가지의 결론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자신감은 다소 어폐가 있다. 이는 다음에 언급할 인과의 몰이해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청은 인과성을 파악할 능력을 가지는가? 우리 물상계에서 자청의 책을 구매하고 읽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모든 일련의 행위를 앞으로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사건의 원인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 책을 읽은 후에 어떠한 (자의적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사건이 병립하여 혼융되게 된다. 이때 자청의 책을 수용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원인으로 삼는 a라는 사람이 특정한 시점 t에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기에 성공적인 삶에 도달하였다고 했을 때, a에게 자청의 책의 수용이라는 사건은 성공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우리 혹은 a와 자청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애당초 자청의 책은 그 성공에 대한 원인이라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그것은 단지 결과에 대한 부재 원인이거나 부수적인 사건에 해당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우리 중에 누가 인과를 결정하는가? 자청은 자신이 인과율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오만함으로부터 탈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자청에게 그런 오만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는 단순하게 인간이 어떤 말의 디테일에 더 혹하는지, 어떻게 해서 상대의 마음을 더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남들에 비해 더 잘 아는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s. 필자는 자청을 긍정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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