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18

2023. 2. 22. 21:35생각

- 모친의 며칠 간의 무언의 행적으로 보아, 거진 참척의 상심을 느낀 듯.

- 잘생기면 텐션이 낮아도 덜 재미없어 보인다. 못생기면 입을 잘 털어도 나대는 것으로 비친다.

- 자신의 다혈질적 성격에 대한 고백은 나 애새끼요 하고 선언하는 격.

- 내 성형에 대한 시대의 기여분이 있다.

내 성형에 시대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

이 시대가 내 성형을 부추겼다.

이전이 낫다는 말을 또 들었다. 아마 이전 얼굴로 나에게 호감을 갖던 이들의 말이니 그에 너무 연연하여 스트레스를 받아선 안 될 것이다. 지금 얼굴부터 본 이들의 평가가 이전 얼굴부터 본 이들의 평가보다 박하지 않다면 나는 만족한다.

- 심도 있는 대화가 안 되는 부류 중 단연 최고는 이미 답을 정해 놓은 부류이다. 또한 효율화의 늪에 빠져 어떠한 고리타분하고 복잡한 논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부류 역시 대화의 의지를 꺾는다.

- 자신감 있는 자의 태도에 현혹되지 말고 그의 말의 내용을 보라. 떠버리의 말은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다.

- 눈 근육이 이완되어 개안하게 되니 눈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 감정상이 다채로워졌다. 나는 애초에 화도 잘 안 내지만 화를 낼 경우, 그것이 찐으로 빡친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눈이 찌그러지는 경우가 없었다(고 추측한다. 눈이 워낙 작아 표정의 개수가 적었다. 그 얼마 안 되는, 구분되는 차이 역시 두드러지는 경우가 없었고.).

- 타인의 평가는 우리 인생의 질에 중요하다. 타인의 박한 평가에 연연하지 않음은 우리 삶의 질을 올리고, 타인의 좋은 평가에 연연함 역시 삶의 질을 올린다.

- 나의 모친은 내가 성형한 후 나를 버리길(자식 목록에서 지우길) 택했다. 즉 모친은 나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버렸기에(성형) 나를 버린 것이다. 잃고 싶지 않았지만 특정 조건이 달라지자 그 고수하던 생각을 지웠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자식이란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 그러니까 특정한 이미지에 대한 자기 인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모친의 과거의 기억의 내용이 아니다.

- 1. 보통의 사람은 변화를 불편해한다. 수고로움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2. 마케팅적으로 봤을 때 큰 시장에 큰 이윤이 있다.

3. 빈유인 여성이 절대다수이다.

4. 기업의 광고가 시장을 교란하고 트렌드를 선도한다.

위 전제에 따라, 기업이 성 상품화를 조장하고 남녀 백지론이 참이라면 작금의 큰 유방 선호는 이율배반적 현상이다.

왜냐하면 트렌드를 선도할 힘이 있는 기업이라면 큰 시장에서 큰 이윤을 내려고 할 것이고, 변화를 꺼리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여 빈유를 이상적 섹슈얼리티의 표본이라고 마케팅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이익을 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본능을 이겨내고 끝끝내 큰 유방을 만들려고 할까? 이를 단순히 여자들이 그것을 스스로 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만은 없다. 여자들이 그것을 원하는 것이나 큰 유방이 빈유에 비해 더 수요가 있다는 사실이, 남성의 구매 본능에 기인했는지 기업의 시장 심리 통제에 기인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복합적이겠으나, 후자가 아니라면 전자가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의 입증력이 강화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면 중립으로 봐야 한다. 다른 요인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게 시장 트렌드를 선도할 힘이 있다면, 빈유녀들을 공략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빈유이기에 빈유녀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 가장 많지만, 심리적 상품은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이에 대한 방증은 상당히 많은 빈유녀들이 자신의 유방 사이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스트레스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남성이 큰 유방을 본유적으로 욕망하는 이유가 미디어가 그것을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위의 논거들을 논파해야 할 것이다. 빈유가 되는 것이 더 돈이 된다면, 의사들은 가슴 축소 수술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이나 기업형 병원 역시 난해한 패션을 선보이는 패션계의 선도처럼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논의가 더 필요함)

- '컵에 가득 차 있던 물이 반으로 줄었다'

'컵에 가득 차 있던 물이 반 남았다'

'컵에 가득 차 있던 물이 1/2가 되었다'

위의 세 표현은 다른 문장 같은 명제인가? 아니면 단지 외연이 같을 뿐 다른 명제일 수 있는가?

- 주변에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다.

- 무언가에 의존하여 위안을 얻는다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위안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신에 대한 믿음이 절절했는데 그 믿음의 대상의 실체성이 희미해지는 경우, 갈피를 잃고 정신적 혼란에 빠질 것이다. 모친은 나의 외모를 나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던 듯싶고 따라서 그것이 사라지자 심한 상실감을 느꼈다. 이태원, 세월호 부모도 이 정도는 아닐 만큼.

- 정상성正常性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상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다.

-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증빙하려면 그것을 증빙하는 도구가 그것의 참됨을 기준 지을 만한 공신력을 가져야 한다. 즉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그것이 참이 될 수 있게끔 하는 도구인지 모르는 도구로 참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1+1이 2라고 하자. 1이나 +의 의미를 모르는데 2가 참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이러한 탐구의 역설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앎의 층위를 구분 지으면 그만이다.

- 신중하지 않은 친구의 견해에 부화뇌동하지 말자. 땅을 치고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 왜 나는, 못생긴 얼굴을 무슨 자신감으로 sns에 처 올리느냐는 친구에게 동조했는가? 그의 생각에 동의한 게 아니라, 비판 없이 그자와 외모의 변개를 동시에 도모했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평소처럼 비판적이려고 했다면 실행에 더 신중했을 텐데.

- 일단 저지르라는 자기 계발적 특명은 성형엔 절대 통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개나 소나 다 쌍수 하는 여자 성별이더라도 성형은 진짜 신중하자. 성형 실패는 무엇을 실패라고 보느냐에 따라 꽤나 많은 모수로 집계되기 때문에 내가 높은 확률로 그에 속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 줏대 없이 행동했다가 후회하고 욕을 먹는 거나, 소신 있게 행동했다가 후회하고 욕을 먹는 거나, 결과가 같다면 유사한 정도로 한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별 볼 일 없는 애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 지금의 착잡한 기분은 문제의 복잡성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냥 싫음에서 온다. 나는 지금 나의 얼굴이, 정확히는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전에는 이 정도로 자기 비관적이지 않았다. 요즘엔 거울을 들여다보는 족족 스트레스다.

- 밥 먹는 중에 바로 옆자리에 누가 오면 괜스레 신경이 쓰여 밥이 안 넘어간다. 반면 내가 누군가의 옆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괜찮더라. 똑같이 붙어서 먹는 건데 맥락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게 달라진다.

- 서울대생 음문이라고 특별히 건전할 이유는 없다.

- 성형한 내 얼굴에 엄마가 화났다는 건, 특정 조건의 변동이 모자의 정을 탈각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한다고 하자. 엄마는 내가 자랑스러울까? 이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게 되었다. 성공한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이전 얼굴만이 자기 자식이라고 여겨지는데 다른 얼굴의 사내가 성공한 것이 자기 자식이 성공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얼굴을 바꿨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소소하고 평이하게 살더라도 이전 얼굴을 고수하는 게 엄마 입장에선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되리라. 하지만 이제는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왜 나는 이렇게 위험한 모험을 강행했을까. 눈썹 문신이라든가 턱 보톡스 같은 부담이 되지 않는 시술을 먼저 시도할걸, 최후의 선택지를 최선으로 선택하다니, 정말 이전의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성형에 있어서만큼은 좀 과하게 나다워도(우유부단) 됐을 텐데..

- 뼈저리게 후회할 일을 해보니 이제는 다른 후회는 후회 축에도 못 낀다. 빚진 건 아무리 많이 져도 갚으면 그만이지만 살인은 죽은 사람을 어찌해도 되살릴 수 없다. 남에게 준 상처는 그의 뇌리에 죽을 때까지 기억에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낙태나 출산 역시 그 행위자에게 되돌릴 수 없는 책임을 지운다. 특히 출산의 경우, 애를 한 번 이 세상에 내놓으면 절대 그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너무 큰 고통과 부담을 지운다. 존재 자체가 고통과 불안을 함축한다지 않은가. 앞으로 나는 남은 인생 동안 얼마나 더 많은 후회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받을까. 적절히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 바뀐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전 얼굴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즉 이전 얼굴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이는 이전 얼굴을 가지고 있을 때 가지지 않았던 욕구다. 잃음 자체가 욕구를 일으킨 게 아니라, 얻음이 잃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가 막심한 것. 나는 이제 이전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인생을 살아 나가야 한다. 나아짐, 그것은 어디에나 통용되는 좋은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뼈가 시리도록 깨닫고 또 깨달았다. 언제나 발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제는 성공 만능주의에서만 탈피할 게 아니라 성장 만능주의에 대한 집착 역시 경우에 따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너무 항상 나아지려고만 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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