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5. 21:10ㆍ생각
- 여러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
- 지금 계속 인터넷에 지라시처럼 도는, 밀어! 밀어! 하고 외친 5~6 명의 남자 무리(이하 가해 추정 무리)의 존재를 밝힐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대충 몇 명의 인원이 같은 무리라는 점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그들 무리와 최근접한 이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애초에 최초 문제 제기자가 그들이어야 한다. 5~6명이 같은 무리라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서로 지인임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대화를 했어야 하고 그것이 들린다는 정황적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당시 현장이 매우 시끄러웠을 것을 미루어 본 바, 멀리서(정도의 애매성은 차치하고)는 그들이 지인임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들이 인파의 대열을 무너뜨렸음을 입증하려면 그들의 행위가 사고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다. 혹자는 단지 밀어!라는 호성만으로도 공중을 선동하여 미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이고 신체적인 밂의 동작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당연히 해석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다만 그 행위에 맞는 법에 한해서만 처벌할 수 있을 뿐이지, 만약 그들의 행위가 명백하고 실질적인 위협을 조성하지 않았고 다른 실질적인 밂의 동작을 취한 이들을 교사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어렵다면 사고의 직접적인 유발자라고 할 수 없다.
가해 추정 무리의 행위 선동적 외침이 대열의 무너짐 직전에 최종적으로 발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발화가 대열의 무너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른 영상을 보면 상당히 많은 이들이 (주취 상태에서인지) 밀어! 하고 외친다. 즉 이들만 밀라고 외친 게 아닌 것이다. 만약 가해 추정 무리의 외침이 대열을 무너뜨린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그들의 외침 이전의 외침이 대열의 붕괴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직 가해 추정 무리의 외침만이 대열을 붕괴시켰음을 입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무리의 선동이 대열을 붕괴시켰는지 가해 추정 무리의 선동이 대열을 붕괴시켰는지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열 붕괴에 서로 조금씩의 기여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의 선동만으로 대열의 붕괴를 초래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의 선동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오직 이들의 선동은 대열의 붕괴를 초래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이들의 선동이 없었어도 대열이 무너졌을 것이냐가 핵심이 아니라 이들의 선동 없이 대열의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해 추정 무리의 선동만으로 대열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그러니까 그들의 선동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선동이 있어야만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들의 행위가 사고의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 수 있고, 따라서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들을 엄단하는 것은 속단적 작태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선동이 대열의 붕괴에 별다른 인과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가능성이다. 이들의 선동 없이 애초에 무너질 상황이었다면, 단지 같은 시공간적 선상에 두 사건이 놓여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둘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쯤 되면 내가 가해 추정 무리의 일원이 아니냐는 의혹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맞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내 발언은 내 발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얼마만큼 입증하는가? 여기서 자신의 자신됨 입증은 외부적인 근거를 필요로 한다. 나는 거짓말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
유죄추정의 원칙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잘못했다는 생각으로부터 존재나 사실을 이끌어내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사과'라는 지시어는 존재하는 사과 자체보다 우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별적 행위에 대한 죄의 개념을 미리 결정해 놓고 판결이 날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선 안 된다.
- 왕따 가해자의 잘못은 명백하고 왕따 피해자는 왕따당할 원인을 제공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애들은 보통 짐승에 가깝다. 애들은 주로 찐따 같은 애들을 따돌린다. 짐승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게 빠를까 찐따 티를 벗는 게 빠를까.
- 사태의 끔찍함이나 울분과는 별개로 마녀사냥은 지양되어야 한다. 사태의 심각도가 마녀사냥을 해도 될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 데이빗슨의 사건 : 개별자(token)
김재권의 사건 : 개체와 시간과 속성의 예화
- 데이빗슨은 속성을 언어적 술어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적어도 속성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유명론적 관점을 견지한다고 할 수 있다.
- 데이빗슨에게 정신은 개념이고 김재권에게는 존재.
- 죽으면 과거로 타임 리프 하는 두 명(1과 2)의 인간이 있다고 하자. 둘 다 1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자기가 그러한 능력을 가진 것을 알고 있고 죽으면 이전 기억을 모두 가져간다. 이때 이들은 시간 역설을 해소할 수 있는가? 가령 1이 5시에 죽어 1시간 전인 4시로 돌아갔다고 하자. 1은 한 번 죽었다. 1이 한 번 죽은 시점에 2가 5시부터 연달아 두 번 죽는다고 하자. 그리고 1이 그 즉시 한 번 더 죽어 2가 한 번만 죽은 시점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2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기가 한 번 죽은 시점에 1은
- 아 나붕에
- 지하철 진행 방향으로 오른쪽에 앉아 눈을 감고 고개를 앞으로 까딱거리니 지하철이 좌회전하는 느낌이어서 눈을 뜨니 그냥 직진하는 느낌이더라. 되게 신기하다. 제한된 정보와 인식이 감각과 믿음을 혼동시키는구나.
이제는, 단순히 똑똑해져야겠다가 아니라, 지적 권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먹히려면 단순히 논리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말의 힘을 강화해 줄 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한 블로거는 아직 대학생인데, 단지 천재여서만은 아니겠지만 논리력이 너무 강해 오직 그러한 실력만으로 상대를 설득할 힘을 지닌다. 명문대 학생이라도 돼야 하나 싶다.
- 확실히 국가 애도 기간의 영향인지 유튜브 업로드가 현저히 줄었더라. 가끔 영상이 올라오면 드는 생각이, "얘네 괜찮으려나" 하는 걱정이다. 불편러들에게 린치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 꼭 맞고 자란 애들이, 애들은 맞아야 엇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 정작 그런 주장을 하는 애들을 보면 죄다 다혈질이거나 못 배워먹었더라. 다른 이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 것 같은데 많은 이들이 당신들과 같지 않다.
- 늦게라도 명문대를 진학해야겠다고 느낀 게, 고졸이라서 그런가, 말을 못 해서 그런가, 말의 내용에 논리적 하자가 없어도 도통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권력의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진리의 권력이 선제되어야 할 것.
- 꿈은 역설을 발생시킨다. 마침 방금 꾼 꿈이 신기해서 바로 메모한다. 고등학생 동창이 고속버스기사인데 나는 그가 운행하는 버스에 탄다. 출발 얼마 후 나는 버스를 잘못 탄 걸 인지하고는 그에게 내려달라고 한다. 그가 내려 주지 않는다. 말싸움이 계속된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꿈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까지 나는 내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꿈의 장면이 바뀐다. 나는 그것을 당장은 인지하지 못한다. 동창 놈은 오른쪽 좌석에 앉아 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 운전자가 아니게 된 자, 즉 차를 세울 권한이 없는 자와 말싸움을 하는 것이 되고, 운전석엔 어떤 젊은 연예인 놈이(깬 이후 갑자기 떠오르는 연예인 강지환?) 앉아 있고 그 뒤에는 책임자(라고 인지되는) 늙은 연예인이 앉아 있다. 나는 그 책임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버스에서 내리게 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알람이 울린다. 이렇듯 꿈은 역설적이고 모든 비논리적인 상상이 가능하다. 신기한 건 출근하려고 택시에 탈 때까지 내가 틀렸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이렇게 메모를 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