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13

2023. 1. 25. 21:10생각

- 인생의 모든 게 결핍과 결핍을 메우려는 욕구의 충돌로 이루어졌구나. 가졌던 건 쇠하고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 하누나.

- 일전에 인스타에 사진과 함께 셀프 외모 비하 글을 올렸더니 친구 왈, "인스타는 자존감 높아야 한다"라더라. 나는 이것이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높아 보여야 한다면 이해하겠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자존감이 높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스타는 주작 판이다. 즉 그 누구도 잘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올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동가홍상의 전략을 취하는 것이 자존감의 높음을 입증할 수 없는 근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의 상관관계는 충분해 보인다. 인스타에는 잘나 보이는 이들이 대다수다. 이들이 모두 잘났을까? 비율상 그렇지 않다. 대다수는 현실의 처지와 관계없이 잘나 보이려고 발악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자존감 통계 수치와 비교했을 때 어긋나는 결과를 보여 준다.

→ 뭔 말이여? 대충 메모했나 본데, 아무튼 요지는, 인스타충은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진들을 올리지만,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자존감이 높다면 자존감이 높아 보일 만한 것들만 올릴 이유도 없다. 30만 원짜리 호캉스가 아니라 3만 원짜리 대실모캉스도 당당하게 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인스타충들이 얼마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지 않다. 자존감이 높다면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그 어떠한 면모도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데 대개 이들이 취급하는 게시물은 남의 시선에 종속된 획일화된 것들뿐이다. 7천 원짜리 국밥, 2천 원짜리 백반, 5천 원짜리 편의점 도시락, 무료 길거리 급식을 올리는 이들은 없다. 대개 분위기 좋은 인스타 갬성의 파스타부터 시작이다.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편의점 음식으로 관심이 끌리겠는가? 호텔 뷔페 떡하니 올려 줘야, '오 쟤 거기 갔구나. 부럽다~' 하고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왜 그런 관심을 끌어내야 하는가? 퍼스널 브랜딩을 위해서나, 피드의 일관화, 사업적인 이유라면 나름 인정하겠지만, 남 시선을 의식하는 여타 행위는 자존감이 높은 행위라고 보이지 않는다.

- 부모가 나를 위한다면서 하는 말의 진심을 나는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그들의 의도와 독립적이다.

- 금방 썩어 없어질 가죽 아껴서 뭐 하나. 좋은 가죽이면 또 모르겠다. 못난 가죽이라면 죽 그어버리자.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고 덕볼 것 있는가? 없으면 그냥 미련 갖지 말자. 미련 가질 정도의 가치를 제공했던가. 내 인생 내가 만들어 갈 거다. 주어진 대로 살지 않을 거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래야 하고. 가난한 생각은 전염병이듯이, 물려받은 낡은 생각과 몸뚱이 역시 버려야 한다. 곧 썩어 없어질 가죽, 아껴 둬서 뭐 하며, 더 낫게 해서 뭐 하며, 또 못 건드릴 건 뭐냐. 그런데 이왕 한 번 사는 김에 낫게 만들어서 사는 게 낫다. 난 지금의 가죽에 미련 없다.

- 자식의 성형에 부정적인 부모의 논리는 아마 자기가 물려준 걸 훼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에 기인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부모도 있다. 자식의 외모가 달라지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을 보여 주기도 한다. 화상을 입어서 외모가 달라진 경우와 성형으로 외모가 달라진 경우를 비교해 보자. 전자는 불가피하게, 후자는 자의적으로 외모가 바뀌었다. 외모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동일하나, 어떤 부모는 전자는 어쩔 수 없으니까 괜찮다고 하고 후자는 의도적으로 바꾸는 경우이니 안 된다며 구분 짓는다. 나는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외모가 달라지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어떤 식으로 달라졌든 동시에 잘못이거나 잘못이 아니어야 한다.

- 외모는 기능보단 형태를 다룸으로써 관리된다. 즉, 굳이 라식보다는 렌즈 + 눈 성형이 더 낫다는 뜻.

- 서울의 여름 일평균 기온과 학생들의 iq의 히스토그램은 유사하다. 그러나 이들이 상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단지 유사한 정규분포를 띠기 때문이다.

- 여친이, "오빤 내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할 것이다. 도대체 질문의 저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이다. 먼저 여친이 죽는다는 그 시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친이 죽는 시점에 할 행위를 지금 미리 정해야 하는데, 이는 각 시점에서의 내 상태 조건의 차이로 인해 지금 어찌하겠다는 주장의 내용은 그 당시의 실현의 내용과 현저히 다를 수 있다.

- 대화는 화자의 수사학이 아니라 청자의 심리학이다. 대화의 최소단위는 말투다.

- 여자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여자를 대할 때는 뇌를 빼야 한다. 물론 그 뇌는 남성적 뇌이다.

- 애들은 어른이 신조어나 게임 용어를 모른다고 질타하지 않지만, 어른은 애들이 문해력이 낮다고 질책한다. 이러한 현상은 어른의 용어가 주류이고 그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리라.

- 빛보다 빠르게 공간을 가로지를 수는 없지만, 공간 자체는 빛보다 빠르게 팽창할 수 있다?

- 일반 상대론에 따르면 오직 같은 장소에 있을 때, 서로에 대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

- 신이라면 항진 명제가 반드시 참일 수 없게 할 수 있어야 한다면, 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할 필요도 없다.

- 성이 개방되어 여자들이 쉽게 몸을 굴리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도태남에게 좋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몸을 쉽게 내어 주는 경향이 늘었다고 한들, 아무에게나 쉽게 내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문란녀의 증가는 도태남의 감소에 중립적이다.

-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웹툰에 자주 등장하는 "어린놈이 어디서 말 따박따박" 같은 대사는 왜 이렇게 적응하기 힘들까.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러는 경우가 얼마나 된답시고 굳이 집어넣었을까 싶다.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어색한 설정이다.

- 핸드폰을 주웠는데 배경화면이 주인의 셀카였는데 얼굴 가운데 쪽을 볼록하게 왜곡해서 찍은 엽사였다. 그에 대한 댓글 드립이 가관이었다. "주인 핸드폰에 갇힌 거 아님?" 이 드립은 사진의 적절성에 따라, 그리고 핸드폰 속에 갇힐 수 있다는 공중의 공유된 상상 하에서 먹힌다고 할 것이다. 이 드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이해가 선제되지 않는다면 적절한 드립으로 기능할 수 없다.

- 이태원 참사를 접하고 흥분되는 걸 보면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단지 태연한 척하려는 것일 뿐인 게 확실하다.

- 어떠한 참극에 대하여, 호들갑 떨며 과민반응하는 것도, 과하게 냉정하고 태연하려고 위장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는 영상을 보니 충격 이후에, 도대체 얼마나 큰 하중과 틈입할 수 없는 조밀함이 저들을 질식하게 했는지 그 원리가 궁금해진다.

- 세월호 때는 잘 몰랐다. 와닿지가 않았다. 근데 이번 이태원 압사 사태의 참혹과 기괴함을 영상으로 보니 소름이 돋는다. 아비규환이 끔찍함을 대표해서 쓰이는 단어이므로 달리 대체할 표현이 없는 듯하나, 사실 규환叫喚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겹겹이 쌓여 눌린 시체 더미들은 그 어떠한 절규나 최환催喚조차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꺼억꺼억 구천懼喘이나 간신히 뱉을 수 있을 뿐이다.

- 깔려서 숨 못 쉬는 와중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집념은 당황의 소산이라고 봐야 할까?

- 영상을 본 뒤로 나도 덩달아 계속 숨이 가쁘고 몸이 떨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충격을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기적으로 영상을 봐주고 있다. 빈도 높은 반복에 의한 익숙성의 강화는 감정의 무뎌짐을 수반한다.

- 내 가족이나 지인이 그 참극의 현장에 희생자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 삼음은, 그들의 죽음의 가치를 훼손하는 짓인가?

- 영상 보니까 이미 거진 적시積屍 상태던데, 송장 옆에서 생존한 자의 외시畏屍가 필연적으로 강화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 사태의 근본적 (나아가 사소한) 귀책이 2030에게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특정 계층에 사소한 귀책조차 없다는 건 이번 사태의 포커스를 계층에 맞출 이유가 없다는 것에 있다. 2030은 사고의 인과적 경로에 단지 있었을 뿐이지, 사고를 일으키는 데에 2030의 속성이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당해 사태가 사고가 아니라 몇몇 사람에 의한 고의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 젊음의 치기가 인파를 밀치는 결정을 하도록 부추겼다고 해석하여, 젊을 때에 그런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자주 범한다고 일반화하기도 껄끄럽다. 그런 상황에서 비젊은이라고 인파를 안 밀쳤을 확률이 높다고 하기에도 근거가 부족하다.

- 참수 영상에 비해 고문 영상이 더 소름 돋고, 그런 것들에 비해 이번 영상이 더 와닿게 느껴지는 건 아마 공감되는 고통의 심리적 인접성이 더 가깝기 때문이리라.

- 구조가 뒤집혀야 할 거국적 사태가 아니라 단순히 양적 피해만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내 일상이 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단순히 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 일상은 웬만하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심적 상태가 조금 변한다면 모를까.

- '이태원에 가고자 함'이라는 의식은 의식자를 이태원에 가도록 추동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이 그러한 마음을 먹은 자들의 사망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인과적 단계를 많이 건너뛴 측면이 있다.

- 구급차 옆에서 섹스 온 더 비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을 호되게 질타할 것 없다. 내가 그 상황에 있었더라도, 주취 상태에서 그 자리를 이탈해야 한다는 이성이 얼마나 발동했을지 단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디서 누구 죽었대!" 하면 "헐 대박" 하고 일단 즐길 거 즐기지, 갑자기 흥이 깨져 버려서 귀가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 일반적인 여자들은 감정의 고조화에 탁월한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적 고통의 사건이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빨리 잊으려고 한다. 현재는 조금 무뎌진 편이다. 근데 다른 이들은 아닌 것 같다. 꼭 사건을 더 들춰 더 같이 슬퍼하려고 한다.

- 죽은 사람은 억울함을 느끼지 못한다. 남아 있는 사람이 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사실 이는 이미 죽은 이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공허한 의미 부여다.

- 인파의 정상적 대열을 누가 최종적으로 붕괴시켰느냐에 따라 그에게 귀책사유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설령 영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딱 붙어서 누가 어떻게 힘을 쓰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누가 사고를 유발했는지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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