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2. 21:30ㆍ생각
- intp라는 여자들과 대화해 봤는데 전혀 인팁스럽지가 않다. 여자는, 인팁이라고 해도 논리적인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다만 논리를 좀 따지려고 할 뿐. 여자 인팁은 공갈•허위 인팁이다.
- context is everything
-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람의 생활 수준이 빈천하다면 동일한 의미 있는 경험을 무리하게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가령 특정한 부담되는 가격의 음식을 처음 먹는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고 기분까지 좋을 수 있다. 다만 현재 수준을 고려하면 가격적으로 부담이 되기에 자주 경험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된다면, 그러한 부담의 감수는 자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떤 젊은이들은 그러한 경제적 판단을 무시하고 사는 듯하다. 어제 치킨을 먹었으면 오늘 곱창을 먹고 내일 삼겹살을 굽는다. 이 지속적인 지출은 매번 어떠한 경험적 의미를 창출하는가? 어제 먹은 부담되는 가격의 고기가 오늘 먹는 부담되는 가격의 고기가 주는 의미와 어느 정도로 크게 다른가? 의미나 가치가 증가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먹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제 먹은 고기나 오늘 먹는 고기의 가치가 뻔하다면 굳이 중복적인 경험으로 인생을 채울 필요가 있을까. 다채로운 경험들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반복적인 경험이더라도 그것 각자만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물론 매일 담배 피우고 술 먹는 게 계속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듯이, 음식 섭취나 성교나 양질의 수면 역시 매일 경험해도 질리지 않다. 다만 내 생각의 요지는 종잣돈 모으기를 포기하고 그렇게 순간의 경험만 추구해서 도모되는 미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 승소가 어려운 범죄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에게 돈에 눈이 멀어서 극악무도한 자를 변호한다고 질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래를 보장해 줄 만큼의 천문학적인 수임료를 받지 않는 이상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를 변호해서 얻을 이익이라고는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변호사라면 사건을 가릴 수야 있겠지만, 어차피 질 게 뻔하다고 해서, 변호 대상이 파렴치한이라고 해서 거부할 것 같지는 않다.
-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성적 빡치심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어떤 예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가 찌질남을 능욕한다면 남자는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간혹 멜섭이라면 성적 흥분을 느낄 테지만). '수치심은 상대적 약자의 전유물'이라는 명제는 참인가? 강자가 상대적으로 약자인 맥락에서 강자는 약자로 여겨지며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 동일한 중요도의 성범죄, 절도 사건에 대하여, 그 피의자의 생활 수준에 따라 양형이 달라지거나 고정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성범죄는 피의자의 생활 수준은 그가 빈자이건 부자이건 큰 참작 사유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결과를 크게 변동시키지 못한다. 반면 절도의 경우, 생계형 범죄일 때 빈자는 형이 감경이 될 수 있고 부자(이 경우 빈하지 아니한 자. 왜냐하면 부자가 단순 절도를 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는 그렇지 못할 것 같다.
- 나는 코리아 타임 운운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개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 데일 카네기의 책이 근래 뜨는 이유는, 저작권이 만료됐기 때문에 인세가 전부 출판사로 귀속되는 이점에 의해, 출판사가 그런 유의 책을 오지게 마케팅 때리기 때문이 아닐까?
- 연기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나의 잠재된 면을 끌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정형화된 감정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 과장된 몸짓과 날카로운 호성만이 분노가 아니다. 차분한 얼굴로도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 나이 먹은 남자들끼리 헤드락 하는 연출은 왜 이렇게 유치한지..
- 사람 바꿔 쓰는 거 아니다. 아예 다른 이로 교체해야 한다. 한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고, 한번 바람피우는 남자는 인피니티한 배신자다.
-나에게 오직 자기만족적인 외모는 아무 소용이 없다.
- 기침 일부러 크게 하는 '냄져'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큰 기침 소리 너무 듣기 싫다.
- 자기는 남이 보는 자기를 모른다.
- 커리어 때문에 바빠서 남자 만날 일 없었던 늙은 여자를 받는 건 그렇다고 치는데,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다리 벌리다가 최종적으로 누굴 결정할지 고민하다가 늙어버린 여자를 받아야 하는가?
- 나중에 누군가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감쪽같이 속았다고 생각하는 게 웃긴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극단적인 예를 들어, 평범한 친구가 실은 살인자였음이 드러났다고 하자. 여기서 보일 반응은? '전혀 예상 안 했다', '세상 참 별일' 정도가 되겠다. 여기서 감쪽같이 속았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하다. 왜냐하면 그 살인마 친구는 당신을 속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제 애인과 성교를 몇 번 했는지 굳이 먼저 말하지 않는 것처럼, 살인 행각 역시 마찬가지이고, 설령 그 사실을 언술한다 한들 누가 진지하게 믿을까.
- '응 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음' 이거 뭐여. 븅신인가.
- 아이를 키우는 일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 남편의 부속품 정도로 생각했다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아이 인생을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어? - 부부의 세계
- 뚱뚱함 그 자체는 멸시의 대상이 아니듯이 찬탄의 대상도 아니다. 단지 맥락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을 뿐.
- 고작 계란 세 개 풀어 넣어 만든 계란찜을 5천 원도 더 넘게 주고 사 먹는 꼴은 참으로 가관이다. 물론 내가 판매자라면 그렇게 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들 주고 사 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돈을 주고 사 먹는 입장이 될 수는 추호도 없다.
- 생일이나 새해에 우리는 한 살을 먹었다면서 무슨 대단한 날인 양 호들갑 떤다. 그런데 그 전날 우리는 364/365살을 먹었다. 1살과 그보다 1/365살 덜먹은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의 차이가 있을까 싶다. 의미는 딱 떨어짐이고, 의미 지어짐이다.
- 부모는 자식을 자신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과거의 모습대로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소중한 기억의 흔적을 성형으로 영구히 바꿔버렸으니 상실감이 오죽 크랴. 하나, 나는 그들의 구속에 내 미래가 저당잡히는 꼴을 가만히 목도하고만 있을 수 없다.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내 성장을 가로막는 장해적 의식을 방치하지 않겠다.
- 술을 처먹는다고 하여 항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다. 다만 술을 먹지 않는 이들은 술로 인한 그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술을 먹는 이들보다야 훨씬 낫다.
- 여자들이 화장하고 운동하는 이유는 땀을 흘리지 않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땀이 나지 않는 체질 때문이다.
- 나는 나를 잃고서야 나를 찾았다(익숙했던 내 모습이 없어지고서야 진정한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지가 아니라 나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은 나를 구성하는가? 내가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을 알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나의 인식은 타인의 기억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타인의 기억은 내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내 본질 같은 건 없다. 내가 불편감을 느끼는 것도, 과거의 이미지가 본유적이라고 느끼는 것도 다 익숙한 감각에 따른다. 선한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지금껏 내가 선한 이미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우월한 가치라면, 선한 이미지를 갖지 않고 살아온 이들 역시 항시 불편감을 느꼈어야 한다. 그러나 선하지 않은 이미지로 살아온 이들은 항시 그것에 본질적 거부감을 갖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어떤 이미지가 우리를 얼마나 많이 잠식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식이 결정된다.
- 왜 나는 선한 인상을 고수하려 하는가? 인상이 선한 게 평가의 관점에서 이익인가? 지금의 인상은 선해 보이지 않는가? 이전에 비해 선해 보이지 않은 것인가 그냥 그 자체로 선해 보이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 자체의 불순함은 무엇에 기준하는가? 나는 이전 얼굴에 얼마만큼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나? 불만이 컸다면 결과가 이렇게 후회스럽진 않았을 게 분명한가? 선한 인상보다 선함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실망하는 부모만 아니었으면 덜 후회스러웠을까? 이전 인상은 정말 선한 인상이었는가? 몇몇에게만 선한 인상이고 사실 별 특색이 없는 인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바뀐 인상은 이전의 인상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최선 혹은 최악의 인상인가? 선한 인상을 가지고 갈 수 있었는데 의사의 미흡한 실력이나 외모적 조화를 고려하지 못하는 등의 여러 조건에 의해 그러지 못했다면 무엇을 탓해야 하는가? 더 못생겨진 건 아닌데 어딘가 불편하다. 못생김이 익숙성과 결합하면 덜 못생기게 인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잘생 못생을 떠나서, 내가 제일 기피하려고 했던 이미지가 된 것 같은데, 똘망한 눈망울이 아니라 레이저 쏘는 듯한 눈이 되어버렸다. 김민주 같은 눈 말이다.
- 나아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한 행위이다. 꼭 나아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 행위를 한다. 피고용인은 사용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리는데 다른 일을 구하면 그만이고 원래 맺고 끊음이 쉬운 계약 관계이니 크게 마음을 쓸 것이 없다. 하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쉽게 생각하기 곤란할 때가 있다. 나는 부모의 마음에 들길 포기하고 일반적인 미를 택했다. 젊은 여성에게 간택되기 위해 나는 이전의 외형에 대한 애착을 억지로 누르고 변화를 취택했다.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너무 멀다. 어쨌든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져야겠지. 성형엔 신중하자. 아무리 일반론의 확률이 낮지 않더라도 그래도 신중하자. 주변의 잘 된 케이스에 덜컥 혹하지 말자. 의사도 실수를 한다. 누구나 다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의사가 예상되는 결과물에 완전히 부합하는 이미지를 뽑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말자. 신중하고 또 신중하자. 한 번 바뀌어 버린 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어느 하나가 좋아진다고 하여 그것이 전체 조화가 좋아지는 데에까지 반드시 기여한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나아진 부위 하나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다른 것들과 조화시켜 놓으면 어색한 경우가 있다. 아마 그건 그 나아진 것 빼고 나머지가 망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 그 어느 것도 망가진 게 없었는데 욕심 때문에 주어진 최적의 조화를 흩트린 것일 수도 있다.
- 권위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참게 하는 어떤 힘이 아닐까. - 박완서[엄마의 말뚝 2]
-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같은 이들의 외모를 우리는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이 유대인 혹은 백인이어서 일 수도 있다. 김재권이 동양인이라고 해서 그가 물리주의에 기여한 공로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그의 눈이 째졌거나 작거나 사나운 인상을 자아낸들 그 어떠한 외적 요소가 그의 사상적 내용에 심대한 변형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다. 내 눈의 형태의 변화는 내 인식을 물론 변화시킨다. 다만 그것이 내가 남길 어떤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기보다는 그 변화된 형태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킬 뿐이다. 외모 자신감, 혹은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는 상태가 추에 대한 궁구와 몰입을 지양시킬 수 있다. 뭔가가 거슬리면 다른 것에 집중하기 어렵다.
- 부모가 빨리 영면하길 희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금전의 부담보다는 그들이 부과하는 인지적 요금 때문이다. 부모는 사는 동안 자식에게 많은 걸 기대하거나 하려고 한다. 따라서 오래 살아 있으면 살아 있을수록 그들이 주는 부담의 절대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자식이 그들에게 안길 고통은 그들과 자식이 공유하는 시공의 면에 일반적으로 비례할 것이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프고, 자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파 갈 것인데, 따라서 부모는 자신의 아픔과 자식의 아픔을 이중으로 안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나는 부모가 나로 인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부모가 나에게 실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부모로 인해 내 뜻을 마음 편하게 펼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차라리 부모 신경 안 쓰고 남남처럼 살면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을 지는 경우보다 마음이 훨씬 더 편하겠다 싶다.
- 부모에 걸려 내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게 제일이네.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친구든 뭐든 내 심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 인물의 나에 대한 가치 판단이 박하다면 나는 매우 큰 심리적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 부모의 부존재가 내 심적 안위를 가져오는 이유가 내가 부모에게 안길 고통이 실질적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라면, 어차피 언젠가는 부존재할 거, 그냥 존재하던 때에 부존재를 염두에 두고 신경 안 쓰면 될 일 아닌가? 꼭 부모의 물질적 존재성이 멸실될 때까지 내 자유의지의 발동을 유예할 필요가 있을까?
- 이게 다 성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보다도 변화에 대한 저항감과 주변의 반향에 기인했다고 하는 게 추상적이지만 정확하겠다.
- 주변에서 흡연자, 주취자만 걸러도 인생이 오조오억 배는 쾌적해질 것 확실하다.
- '할로윈의 이태원스럽다' vs '이태원의 할로윈스럽다'
매우 붐비는 상황을 표현할 때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 개인적으로 전자를 선호하는데 전자는 할로윈 중 하필 이태원을 가리키는 것 같고 후자는 이태원 중 하필 할로윈을 가리키는 것 같아 어차피 어딜 가든 붐비는 할로윈이라면 그중 단연 최고로 붐비는 이태원을 가리키는 전자가 더 붐빔을 강조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 이성애자 남성이라면 거의 누구나 여자를 좋아한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단지 성욕이 적은 것을 넘어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선언에 다름 아닐 것이다. 뭐 어쨌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그리고 흔쾌히 인정하는 모습은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여자에 어느 정도로 미쳐 보이는지 조절할 필요는 있다.
- 일부일처 가부장 사회에서 재혼은 오직 성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하에서 재혼은 그다지 좋은 가치가 아닌데, 이러한 편견과 낙인에 감투敢鬪한다는 것은 보통의 용단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그 용기를 추동하는 주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케이스가 얼마나 될까. 미래의 고독을 감내할 수 없다거나 아이에게 전통적인 가정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등의 사유는 재혼에 대한 전통적 비난의 배제를 합당케 하는가?
- 부모가 나에게 기대하는 게 뻔히 보여 나는 애를 낳지 않겠다.
- 고독의 고통과 부양•책임의 고통 중 무엇이 언제나 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대강의 정도를 계교하여 일반적인 더 나음을 취택해야 한다.
- 똥 싸고 담까지 피우느라 30분씩 까먹어 그 공백을 내가 매워야 하는 동료의 만행으로 인한 피해를 이제는 더 이상 묵과하기 어렵다. 나는 진짜 남이랑 같이 일 못 하겠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이들의 인생은 비참한가? 가치관에 따라 분명 그럴 것이다. 보통의 연인 관계라면 서로 좋아하는 관계인데, 연인 관계를 맺어 보지 못한 이들은 적어도 성적으로 서로 호감을 가지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비참할 것까지야 없을지 몰라도 되게 아쉬울 것이다.
-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지만, 6년밖에 못 본 애가 뭐 그리 소중했다고 남은 수십 년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복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6살 자식의 죽음의 원인이 된 자를 아버지가 복수하는 경우)
- 부모가 자식 자체를 사랑한다면 자식의 조건이 조금 변했다고 한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