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7. 20:50ㆍ생각
필자는 최근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한창 오겜 열풍으로 여기저기서 떠들 때까지 안 보다가, '어차피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튜브에서 결말이 포함된 요약 영상을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결말 내용까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오징어 게임을 보게 되었는데도 꽤나 흥미진진하게 본 것을 보면 작품 자체가 최소한 오락성에는 충실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겠다. 어쨌든, 그렇게 주행을 완료하고 나서 평점을 매기기 위해 왓챠피디아에 접속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평점 평균(3.2/5.0)이 열풍의 규모에 비해 엉망(물론 작품의 재미와 평가는 별개일 수 있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댓글들을 쭉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특정 시각에서 사안을 해석하는 부류들에게 집단 테러를 맞은 듯이 보였다. 물론 그것이 집단적 공세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유사하게 겹치는 내용의 댓글이 많이 눈에 띄었기에 나름 개연적인 회의라고 할 수 있겠다. 딱히 영화 내적인 상징이라든가 은유, 의미 등에 대해 분석하고 논평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럴 실력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러나, 댓글 반응이 재미가 있어서 이에 대해서는 좀 논해보고자 한다.
왓챠에서 세 번째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이다. 해당 댓글 작성자가 문제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든, 그것이 심각하게 편향되었든 아니든, 그러한 개인적인 평가나 견해에는 심대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지나치게 선동적이거나 악의적인 비방의 목적이 있거나 거짓으로 점철된 견해라면 비판 등의 저지 수단으로 견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해당 리뷰가 거짓이나 날조를 담고 있다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대중을 기망하기 위한 의도로 비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해당 리뷰어가 특정 신념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적 합집을 도모한다거나 사후 해석적 관점으로 사안을 일괄되게 해석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리뷰어는 먼저, 작품의 저열한 젠더 감수성을 지적한다. 젠더는 사회적 성을 의미하고 감수성은 감각을 받아들이는 성질 정도로 여겨진다. 영어로 sensitization이라고 하면 민감성 정도로 번역되겠다. 아무튼 사회적 성을 다루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성질을 뜻하는데, 먼저 이 작품의 감독은 작금의 민감한 젠더 이슈를 크게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긴 하다. 현금의 불편한 실태를 인식하고 있는 내가 오징어 게임의 감독이었다면,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만 모인 아비규환의 장에서 여자한테 년년 거리지 않고 귀하나 레이디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할 것이고, 한미녀 캐릭터가 덕수에게 오빠 오빠 거리게 하지 않고 자네 혹은 그대라고 지칭하게 할 것이며, 미녀가 덕수와 연대하기 위해 갑자기 섹스를 하는 게 아닌 점진적인 평등한 연애의 과정을 묘사한 뒤에 서로의 충분한 합의로 인한 성교를 하도록 할 것이고, 후에 놀이터에서 별 모양 띠기의 분리의 난관을 타개하고 덕수를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키기 위해 사용될 필수적 도구인, 질에 비장祕藏된 라이터를 빼내는 신을 삭제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수정할 것이고, 70년대생 정도의 남성이 (그가 설령 가부장 문화에 찌들지 않았더라도) 시쳇말로 한 번쯤은 할 수도 있을 법한 발언인 '며느리가 차려준 밥상' 따위의 빻은 발언을 운운하는 짓거리는 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시신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직 신체 해체 작업에 들어가지 않은 사상자인 여체를 간음하지 않거나, 애초에 남체를 다루는 것으로 조정했을 것이며,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인 종교인 남성의 입을 막거나, 캐릭터 자체를 굳이 도입을 하지 않을 것이고, '구멍에 넣는 건 나도 잘하는데' 따위의 발언을, 창녀가 아닌 능동적 알파녀가 '구멍으로 흡입하는 건 나도 잘하는데'라고 여성 주체적 관점으로 대사를 치는 것으로 바꿔서 구성해 봤을 것이고, 지영이 목사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스토리를 평범한 가부장 쓰레기인 느개비충을 재기시키는 주체적 혁명 여전사 지영의, 사회적 부조리와 폭력에 대항하는 투쟁과 고난사로 변경할 것이다.
도대체 작금의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어떠한 시대를 지향하고 어떠한 시대적 양상을 거부하는가? 리뷰어가 역설하는, '(내가 추측하기에)젠더 감수성이 모자라지 않는 시대'란 무엇인가? 무언가에 대하여 여혐적이지 않아야 한다면 왜 여혐적이어선 안 되는가? 만약 여혐이 부당한 것이라면, 왜 자신들의 혐오 만들기는 허용되는가? 큰 혐오를 부수기 위한 작은 혐오의 연대가 미러링으로 합리화될 수 있고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면, 그(작은 혐오)에 반동하는 혐오(가령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반-페미니즘)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작금이 정치적 올바름이 주류인 시대라고 해도 그것이 고정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분위기는 언제고 전복될 수 있다.
혐오적 시각이 건전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혐오의 지양은 개인의 가치 판단과 태도에 귀속시켜야지 강제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리뷰어는 작품에 여혐적인 요소가 있다며 불편을 호소했다. 그리고 작품에 남혐적이거나 다른 차별적 요소가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리뷰어가 작품으로부터 여혐적 요소를 부각시켰다고 맹비난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 '다른 혐오들이 뒤섞여 있다고 이 콘텐츠에 포함된 여성 혐오 코드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주장 역시 그리 불건전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 혐오적 코드는 양립이 가능하고, 해석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당부당, 존부존을 논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리뷰어가 '시대착오'를 논하며, 굳이 '여혐' 요소만 언급했다는 것은 다소 납득이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의 추세는 여혐이 아니라 혐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착오를 언급하지 말든가, 작품 내의 모든 혐오를 동시에 언급하면서 시대착오를 언표하는 게 마땅하리라 여겨진다.
"여성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 그리고 창녀(성적 요소) 아니면 어머니(모성애) 이 두 가지 상으로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의 댓글의 대댓글이다. 먼저, 여성을 남성과 같게 보지 않거나 남성을 여성과 같게 보지 않는 시각은 어디에나 만연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그것이 정당하냐, 그렇지 않냐의 여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우선 많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보는 것은 자명한 듯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성적 사물화인 것은 아니다. ('대상'은 인간과 사물을 동시에 함축하므로 '성적 대상화'라고 하면 성적 인간화를 지칭하는 수도 있기에 혼선을 줄이기 위해서는 둘로 구분해야 한다.) 어떤 남성이 여성을 성적 도구나 사물로 여긴다는 해석은 그 남성의 의도와, 성적 사물화를 당한다고 느끼는 여성의 기분이나 해석에 의존한다. 물론 대체적으로 성적 대상화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례나 기준들이 제시되고 있긴 하다. 가령,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든가, 오직 성적으로만 바라보거나 하대하는 경우, 여자는 남자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시각 정도가 되겠다. 이런 관점들은 다소 극단적이거나 실체가 모호하고 검증도 지난하다. 많은 남성이 여성을 성적 인간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여성 역시 남성을 성적 인간화하기도 한다. 만약 남성이 여성을 성적 도구화하고 그것이 실제로 만연하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여성 역시 남성을 성적 도구화하고 나아가 물적 도구화까지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반론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개인의 관점이나 사회적 분위기 따위의 모호한 것을 지시한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여성이 남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도 동일하게 잘못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대상화는 힘의 기울어진 구도적 측면에서 더 잘못되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남자가 더 강하기 때문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해선 안 된다는 것. 강자가 약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적 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역의 경우보다 약자 피해적인 경향이 나타날 수 있음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 남성의 성범죄가 여성 성범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가 성욕이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기인하는 것 같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이건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힘을 가진 자가 품는 의도는 힘이 없는 자가 품는 의도보다 실현의 측면에서 영향력이 클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리뷰어가 지적하는 여성에 대한 성녀-창녀 관점만이 내재한 게 아니다. 오히려 리뷰어 본인이 작품을 그런 시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제작자의 의도와 작품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제작자의 의도가 확고하고 작품이 그것을 토대로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의 전달 의도를 제작자의 의도와 동일시하고 고정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설령 오겜의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성녀-창녀 관점에서 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감독이 해당 작품을 자신의 여혐 견지에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초에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여성을 이분화하여 창녀 아니면 성녀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창녀가 아니면서 성녀가 아닌 여성이 존재하며, 그 다양성은 무한대라고 할 것이다. 즉 이로 보아, 모든 무지능자가 여혐인 것은 아니지만, 성녀-창녀 관점으로 여성을 이분화하는 여혐론자들은 무지능자다.
"남자들은 인간답게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반면 여성들은...?"
전적으로 프레임에 갇힌 시각이다. 나는 오히려 이 리뷰어가 성녀-창녀 관점으로 여성을 이분화하는 여혐론자 겸 무지능자로 보인다. 리뷰어가 서술한 남자와 여자의 비교 표현을 보면 전형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작법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답고 다양한 인간상'은 남성 참가자들뿐만이 아니라 여성 참가자들 또한 동일하다. 물론 주, 조연이 남성이 더 많기 때문에 남성의 생활사가 더 많이 그려진 건 사실. 그러나 그 사실은 여성이 덜 다양하게 그려졌다는 사실만을 지시할 뿐이지, 여성의 삶이 덜 인간적이라거나 비참하다는 것까지 지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자들의 삶을 통해 남자들의 비참한 삶을 더 확인할 수 있다. 여성 캐릭터들의 삶은 구체적으로 서술된 게 없어서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이상한 삶을 살아왔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창녀와 어머니 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캐릭터가 한 명이라도 있던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나는 그렇다고 보았다. 전적으로 해석의 차이다. 일단 이 리뷰어가 성녀 혹은 창녀로 묘사되었다고 주장한 모든 여성 참가자들을 나는 '성녀-창녀-그 외의 여성'의 관점으로 보았다. 가령 지영의 경우는 딱히 창녀라거나 성녀로 보이지 않았다. 즉, 자신의 부친에게 성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지영이 성적 피해자로 그려지므로 여성에 대한 창녀적 관점의 한 축을 담당한다고 단정하는 건 지영 캐릭터에 대한 편협한 해석이다. 지영은 새벽을 위해 희생하면서 모성애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희생을 강요받는 여혐적인 모사라고 할 수 있다면, 왜 개인의 주체적인 희생이 여성 혐오적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실제로 주체적으로 희생하려는 여성이 있지 않거나, 미디어가 그려낸 여성에 대한 희생적 면모가 여성을 주체적이 아닌 세뇌적인 희생적 존재자로 만드는 인위적 작업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입증되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허위의 창작물이 가공하는 작태가 부당한지, 부당하거나 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그냥 단지 혐오적인 행태라면 왜 그러한 것인지 공중을 납득시킬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오징어 게임에 여혐적 요소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러한 해석을 하였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설령 제작자의 의도가 전혀 여혐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남혐적인 요소나 종교인, 외노자 차별적인 요소도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오징어 게임이 혐오적이고 불편한 요소들을 전부 제거된 채로 세상에 나왔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열광할 만한 작품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러한 열광과 별개로 예술 작품에 혐오적 요소가 담기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창작의 자유를 침해받는 것이 되는데, 이는 혐오를 지양하는 자들이 원하는 방향과 합치하는가? 혐오를 지양하거나 철폐하자는 발언의 자유는 혐오를 할 자유와 동일 취급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문화마다, 제도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띤다. 어떤 국가에 개인에 대한 모욕죄가 없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설령 혐오가 무수한 병폐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자체가 더 존귀하다는 가치를 사회적으로 조금씩 제한해 나간다면 그것은 개인에 대한 가혹한 구속이 될 수 있다. 스스로의 자정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악플로 인한 해악이 크더라도 익명성은 보장될 가치가 있다. 혐오 표현을 반기지는 않고,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자중되어야 하는 것이지 강제로 금지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혐오 표현을 제한할 수 없다면, 혐오에 대하여 혐오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페미니즘 양상은 부당한 가부장에 무지성으로 대항하는 기조를 내비치고 있다. 이들이 이용하는 전략을 혐오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 혐오는 혐오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페미니즘의 혐오가 허용되는 만큼 반-페미니즘의 혐오 자유도 허용되어야 한다. 애초에 혐오는 지양되는 편이 낫고, 혐오 프레임에 갇혀 많은 것을 일괄적으로 해석하는 작태도 지양되는 편이 낫다. 오징어 게임이 여성 혐오적인 작품이고 그것이 많은 여성에게 안 좋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작품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 것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으며 제작자 또한 억울하더라도 그러한 비판을 감내할 용기를 함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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