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충

2021. 12. 9. 11:19생각

오빠충이란, 말할 때마다 "오빠는 말이야~"라며 항상 자신을 오빠라고 지칭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단 필자는 굳이 '蟲'자까지 붙여가며 그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검색어 유입을 위해 다소 자극적으로 표현한 점 양해 바란다. 형충, 언니충, 누나충, 선생님이충 등 여러 충들이 있지만 오빠충이 제일 대중적인 것 같아 부득이 사용한다. 우선 오빠충 관련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는데, 그것이 싫은 이유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 같다.'와 '자기가 오빠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가 대다수였다. 나도 그걸 알기에, 관계에 있어 지위를 내세우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애초에 누구보다 위에 있던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필자는 이 권위라는 관점에서 주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오빠충 뿐만 아니라 다른 충들의 사례도 같이 살펴볼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에서 '충'의 사용은 그들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발화할 때마다 '지위어가~'나 '지위어는~'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쨌든 지칭이든 뭐든 '충'이란 단어가 비하의 의도가 아니냐고 하는 반문에 대해, '내가 그렇게 의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 글에서만 편의적으로 차용한다.'라고 답변하겠다.

도대체 왜 자신을 지칭할 때 지위어地位語를 사용할까?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거의 첫 번째로 마주하는 충은 '엄마충'과 '아빠충'이다. 살면서 많은 '지위어충(지금부터 '~가충'을 '지위어충'으로 통일한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지위의 사람이나 지위어충이 되지는 않는다. 그 범위가 생각보다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지위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위의 사람의 지위어 사용에 대한 가능성이 막혀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대표적으로 유사한 교육 집단인 교사와 교수를 비교해보자. 교사든 강사든 학생에 대해서 '선생님은~'을 남발한다. 사용하지 않는 교사도 많지만 거의 패시브로 달고 있는 사람이 많다. 반면에 교수로부터 '교수는 말입니다~'라고 들어본 사람 있는가? 우선 필자의 경험으로는 없다. 확실히 하기 위해 최선책으로 인터넷 검색을 실시한 바, 선생님충, 선생님이충, 교수충, 교수가충 등, 어떠한 검색어에도 이 지위어충을 비판하는 언급이 발견되지 않았다. 살면서 '선생님이충 극혐.', '엄마가충, 아빠가충 극혐'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일단 본 적도 없을뿐더러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저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사회 정서상 표현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빠충은 비교적 최근에 지위어충에 대한 (내가 알기로는) 첫 공격으로 발단되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 페미니즘의 융성으로부터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추단한다. 페미니즘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도대체 왜 상대에게 말을 할 때 자신을 가리켜 이름이나 어떠한 1인칭의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지위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선생님을 예로 들어보자. 선생님은 학생에 대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하는가? 이런 경우는 없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지만 없다. 이는 지위의 차이가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 a가 선생 b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구분 지을만한 지위어가 있다면 그것을 사용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국사 선생인 a가 생물 선생인 b에게 자신을 "국사 선생은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사 선생"은 오히려 생물 선생인 b가 국사 선생을 호명할 때 사용된다. 이렇게 동급의 지위를 가진 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지위어로 자기를 지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위계자가 상위계자에게 자신의 지위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어 보인다. 동생이 형에게 "동생은~"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장난이나 애교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그 관계에서 '동생'이라는 지위어는 위계성이 없다고 보인다. 이는 마치 별명과도 같은데, 가령 연인 관계에서 연인이 상대자에게 "별명은~"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소인'은 일인칭 대명사이다. '동생'과 '소인'이 같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형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춰, "동생은 형님께 컴퓨터를 양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 쓰면서도 뭔가 이런 집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은 예감에서이다. 어딜 가나 특이한 관계와 언어 사용은 가끔 있게 마련이다. 어쨌든 문법적으로 이러한 사용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단순한 자연 언어의 사용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사용 가능성이 막혀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단지 현재 통용되지 않는다고 보일 뿐이다. 중간 정리를 하자면, 동급자의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신의 지위어로 자기를 지시하지 않고, 위계관계에서는 하위계자가 상위계자에 대해 자신의 지위어로 자기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면 정말 거의 대부분의 지위어의 사용은 위계관계에서 상위계자가 하위계자에게로 향하는가? 일단 이 명제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 '위계관계에서'와 '상위계자가 하위계자에게로'이다. 대표적인 '오빠가'를 예로 들자.

오빠와 동생의 관계가 위계관계가 아니라고 하자. 즉 오빠가 동생에 대해 상위계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빠'는 '동생'에 대해 상위계어인가? 즉, 어떤 x가 상위계자가 아닌 자를 상위계어로 지칭하는 것은 가능한가? 조금 엄밀하지는 못하지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회사에서 사장은 사원에 비해 상위계자이다. 사장이 사원에게 상위계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당연히 사장이 사원에게 사장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지위어는 마치 관계에서 고유하게 부여된 이름과도 같다. 하지만 사원님이라고 예의를 갖춰 표현할 수는 있다. '님'자가 붙었다고 해서 사원이라는 지위어가 상위계어가 될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사장 : 사원

상위계자 : 하위계자

지위어 : 지위어

이지,

상위계어 : 하위계어

는 아닌 것 같다. 다시 오빠와 동생에 적용해보자.

오빠 : 동생

상위계자 : 하위계자

지위어 : 지위어

상위계어 : 하위계어 (x)

다소 이상하다고 느끼는가? 부연이 필요하다. 오빠가 동생에 대해 상위계자인 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위계를 나누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의 정당성까지 내가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통념적으로 부여된 기준이 있다. 즉, 유교적 규범과 수치 상으로의 나이가 그것이다. 먼저 태어난 것이 뒤늦게 태어난 사람에 비해 상위계자라는 논리는 도의적 어폐가 있다. 가치 부여에 지나지 않는다. 출생의 시간적 차이는 단지 시간적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유교적 규범은 그것에 위계를 부여했다. 모든 탓은 그 규범에 있다. 즉 유교적 규범을 벗어버린다면 오빠와 동생의 관계는 위계 관계를 벗어버린다. 하지만 유교는 이에 미꾸라지처럼 피해 간다. 형제자매는 항렬이 같다. 오빠는 '손위'의 남자를 여자가 부르는 말이다. 손위는 자기보다 나이나 항렬이 높은 사람을 뜻한다. 말 그대로 연장자인데, '오빠'라는 지위어에, 나이의 '많음'에 의해, 상위성이 부여된 것이다. 즉, 유교는 나이를 선후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 개념으로 파악한다(책잡힐 것 같아 부연하자면, 유교는 나이의 선후 개념을 물론 파악하고, 거기에 상하 개념을 입힌다. 유교는 나이를 상하 개념만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많고 적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나이의 많고 적음은 그 의미로 미루어 봤을 때 시간적 선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그러므로 유교는 나이를 선후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어쨌든 규범을 벗어버린다면 오빠와 동생은 위계 관계가 아니다. 혹, 어떤 유교 신자가 연장자에 대해 존대하라는 말이, 위계적으로 차이를 둔다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면 필자는 그에 동의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존대는 위계로부터 독립적이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의 통념 상, 연장자가 연소자에 비해 더 존대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그러한 관습이 옅어지는 추세이지만 아직 강세이다.

오빠충 중에 '오빠가'를 사용하면서 존댓말을 하는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는가? "오빠가 ~~게요."와 같은 유의 말 말이다. 물론 '오빠가'라는 지위어가 하대를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기에, 위와 같은 식의 존대형 어미와, 같은 문장에서 동시에 사용될 수는 있다. 하지만 '소인'과 같은 일인칭 대명사는 스스로 낮춘다는 의미가 반드시 함축되어 있으므로, 반말 따위와 동시에 사용될 수 없다. "소인은 이만 잠에 들 것이니라."는 굉장히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용이더라도 발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오빠가'와 존댓말이 한 문장에서 동시에 사용되는 것은 가능은 하다.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서 발화자가 도대체 왜 자신을 지칭할 때 지위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 지금까지의 논의로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지위어충이 자신을 지칭하는 지위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위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위계자가 상위계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리고 중립적인 지위 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지위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유교적 규범의 관점에서, 나이나 다른 통습적인 규준을 기반으로 하여 상위계자가 하위계자에게 자신의 지위어를 사용한다. 결론, 지위어의 사용은 다분히 하향한다. 하지만 발화자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하는 예전에 써놓은 글

主語 位置에 一人稱代名詞가 不定置되고 特稱 一般名辭가 使用되는 理由

만중萬衆이 유성遊星의 권역에 투족投足하여, 그 노면에 부착付着되어 온족溫足감을 포향飽享하며 자작자활自作自活한 이래로, 어느 누구나의 태무심殆無心이 무위동작無爲動作하지 아니하는 정도로 가의可疑되는 의문이 있다. 한국에서ㅡ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ㅡ는 타견他見에 따라 호칭되는 피호명자로서의 명칭을 자언自言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듯이 보이는데 일례로 오빠가, 형이, 언니가, 누나가, 엄마가, 아빠가, 선생님이 등이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인들이 위계를 적시적소에 자작自作한다는 추측에 대한 방증을 규시窺視할 수 있는데 가령 older brother에 대하여 연소자인 발화자가 '동생이'로 운을 떼거나, 부모로부터 생출된 자가 '자식이'로 자신을 언명하거나, 혹은 교실에서 가르치는 자에 대하여 피교육자가 '학생이'로 적시適時 혹은 매시每時에 자기를 특칭 하지 않는 통념이 지배적인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이는 모든 위계화할 수 있는 경우에 항용恒用되는 것은 아닌데, 가령 대학 강의 시에 교수가 자신을 '교수가'라고 초두初頭에 잘 언명하지 않는 경우나 브랜드의 대표가 자신의 브랜드명을 자칭(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일례를 들어 보면 영상 제작자가 자신이 출연하며, 자신의 영상을 합집하는 채널을 개설하여 채널 명을 설정하고 그 채널명을 자신으로 언칭言稱하는 경우, 단지 자신이 채널을 총괄한다는 이유로 지시체에 상치되는 지시어를 본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지, 독립된 지시체에 불가분리적인 유일지시어가 사용되는 것이 일응 들어 맞는건지, 애초에 분리된 각각의 지시체에 대한 지시어의 대응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하는 비위계의 이해관계적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더 보편적인가? 각각의 관계별로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뒤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며 그와 더불어 관계 내에서 고유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보편명사를 사용하여 상대를 지칭하거나 또는 그 반대인 경우 왜 그러한지, 가령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고 아들, 딸로 호성呼聲하는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 또는 그러한 다른 문화에 대하여도 숙고해 보고자 한다. 총론을 개괄하기 앞서 개별 사례부터 상찰想察하여 보고자 했으나 적확히 가분可分되게 기술하기 간난艱難하다는 점에서 혼용 기술한다. 표제부에 적시된 연소자-연장자 관계 등을 사례로 들어, 발화자의 발화가 의도적인 건지, 그렇다면 그 추동적 요인은 무엇인지, 암묵지의 무의지적 발현인 건지, 그렇다면 문화적인 요인이 상당하다거나 학습의 영향이 다분한지, 보편적 사용의 변경이 초래될 상황에 놓일 때에 발화자가 이를 '별다른 거리낌 없이' 수용 가능한지, 그 사용에 대한 문제가 있는지, 그렇다면 왜 문제이고 누가 문제시하는지 등이 궁리될 것이다.

1. 유희

내 동생이 예전에 자신의 친구들끼리 '형이 말이야'하면서 장난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때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의문이 든다는 언명을 동생에게 하였더니 그는 재미로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하였다. 그 당시 분명 그들의 관계는 위계관계가 아니었고, 서로의 호칭이 규정되어있지 아니하였고, 그 호칭이 발화됨에 있어 부담이나 위구심을 갖지 아니하였다고 봄에 이론의 여지없다. 얼마 전에도 내 친구와 대화 시에 언급된 여자 연예인에 대하여 그는 '오빠가'로 시작되는 완롱玩弄하는 듯한 언설을 하며 상완賞玩하였다. 물론 그의 극화된 속태俗態는 논점에 이탈되는 희소한 경우에 해당됨이 상당하다. 어쨌거나 이들의 즐김은 그 즐거움의 요인을 요할 것인데 그 원류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비동등성, 위계성, 비일상성 등으로부터 오는 이질감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상호 동이同異한 인간은 그 유사성 속에서도 다른 면을 매시 굴개掘開해내고 구분 지어옴에 위화감이 약소한데 그러한 경우에야 예태豫怠한 일상에 대한 파국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러한 권태한 일상이 위화違和되는 작용에 대한 위화감이 약소하다는 이율배반이 발동하는 상황의 일상으로의 도래가 태만자로 하여금 흥기興起하게 한다. 간혹 우리는 한국 남자가 외국인 여성에게 자신을 'oppa'라고 가르쳐 주며, 그것을 불러주는 여성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규수閨秀로부터 발어된 가청신호可聽信號를 이령耳聆하여 관이慣耳케 된 자는 이국적 감상과 위격位格의 계제階除를 경험하게 된다. 또 간혹 누군가는 "이 xxx(자기 이름)가 말이야", "xx이 삐졌어" 등 위계가 들어가지 않은 고유명사를 사용하여 재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2. 명시

자신과 상대를 분명히 반시班示하고자 함의 일종으로, 그 관계 내에서 내 위격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지적인 표현으로 보이는데, 초두에 언급한 영상 제작자가 자신을 영상이 집합된, 자운영 하는 자自채널의 명名을 자신에게 복용復用하는 경우ㅡ직관적 이해를 위한 예시를 들면 내가 'x'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개설하고 그 브랜드 채널 내에서 브랜드를 나타내는 영상을 제작함에 있어 내가 그 영상에 출연하고 "x가 봤을 때 x라는 브랜드는..."이라고 언사 하는 경우ㅡ를 일례로 들 수 있으며, 이것이 내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에 대하여 확고한 명시성을 감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들~", "딸~"이라고 부모들이 가끔 호성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보편 명사는 전혀 명시의 의도로 쓰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별명이나 애칭이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기껏 이름 지어 놓고 왜 저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따지면 부모에 대해서는 왜 멀쩡한 당신들의 성명을 두고 "엄마", "아빠"라고 일반명사를 사용하는지에 대하여도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이 구분이 없는 보편 명사에 고유한 자의 목소리가 개입할 때에 비로소 명시성이 확립된다고 할 것이다.

3. 위계적 우위를 점한 자가 하위계자에 대하여 자신을 XX라고 칭함

나와 하위계자의 관계에서의 탐위貪位의 발동으로, 어떠한 위계를 분分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모두가 보편적으로 의식하여 사용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단지 특정한 상황에서 경우에 따라 의식적으로나 무의지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과거 십수 년 전의 학교에 많은 폭력 교사가 상존했고 학생들에 대하여 적어도 실질적으로 상위계를 점했음에 반론의 여지없을 것이며, 이 어떤 폭력 교사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자칭 발어한다면 자신의 지위를 명시함으로써 위계를 지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이 자가 그 지위어의 사용을 의지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고, 반면에 지위어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그 미사용자로 하여금 위계가 파각破却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초두에 언급하였듯이 학생은 선생에 대하여 자신을 "학생이.."이라며 운을 떼고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이에는 분명히 겸양어謙讓語를 사용하는 언어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 하위계자가 상위계자에게 자신의 직위명을 1인칭 주어에 대입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을까? 적어도 소인, 소신, 소제 등 초시부터 발화자를 저열화低劣化하도록 사용되게 만들어진 용어가 있을지언정 학생과 같은 중립어를 낮춤의 의미에서 1인칭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문화와 맥락

영어권 문화에서는 1인칭 보편 대명사인 'I'가 문법 구조에 의해서인지 반드시 사용되는데 "I love you"가 문법에 적확히 들어맞는 것이고, 발화자의, 상대자에 대한 단순"love you" 언명은 맥락상 그 의미가 추론되는 데에 그친다. 그러면 1인칭 대명사 자리에 화자의 성명을 삽입하여 발화할 시에 의미 전달에 있어 영어와 한국어의 어감 상의 큰 차이가 존재할까? 그 언어사용태를 보자면, 가령 John이 Peter에게 "John like you"라고 하는 경우 Peter가 John의 발화를 혼동 없이 1인칭 주어가 발화자 본인이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이 언어문화적으로 보편적인가(문법상 John 뒤에 likes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자 텍스트만으로는 John이 1인칭으로 쓰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나 발성된 언어 텍스트를 통하여 John이 다른 John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반면에 한국어 사용에서는 나은이가 예은이에게 "나은이가 너를 사랑해"라고 언명하는 경우 청자인 예은이는 다른 나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발화자 나은이 청자 예은을 사랑한다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여기서는 언어적 차이를 떠나 다른 동일 고유명사의 개입의 여부가 의미 전달에 있어 큰 문제로 부각된다. 한국어의 주격조사 이/가 앞에 오는 이름은 주어로 해석됨에 일응 타당하고 영어의 동사 앞에 오는 이름 역시 문법적으로 보아 어떤 형태의 이름이든 주어로 보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할 것인데, 이 주어상의 인칭대명사 격格 파악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고, 의미의 전달은 문법이나 문화적 차이를 떠나 그 발화 당시의 상황과 조건, 대상 간의 관계성을 살피고 따져 맥락적 적확성을 규명해야 함이 응당 합리적일 것이다. 나의 예전의 혼동되는 일화가 있다. 나와 내 선배와 그 선배의 선배 셋이 좌담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로부터의 한 단계 선배가 "형이"라고 발화하는 것을 듣고 두 단계 위의 선배를 칭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 당시 대화의 맥락을 고려하여야 정확한 의미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세소細小한 혼동을 겪었으며, 차후에도 숙려하여 보았지만 그것이 비생산적인 사용임에 항심抗心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5. 상습

상습은 그 문자 의미로 보아 발화자의 무의지성과 청자의 불감도를 전제하여야 할 것인데 가령 엄마가 출생한 자에 대하여, 母 당신이 스스로 "엄마. 엄마!"라고 발어하여 태잉胎孕으로부터 탈거脫去한 자에게 관청關聽하게 하고, 그 해아孩兒가 장성하여 고차적 사고를 하는 성체가 된 이후에도 계역繼亦 '엄마'를 숙복熟復한다면, 성태成胎가 해소된 이후 다시多時가 경과한 상태의 자者나 엄마는 그 처지어處地語의 사용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게 된다. 별 의구심 없이 사용하던 이 용어 사용의 중지를 요청받은 자는 일전에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의문감을 차제에 자각하게 될 것이며 이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체의 당연한 반응으로 사료되고 문제시할 여지도 적다고 생각한다.

6. 문제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는데, '문제 삼으면 문제고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아니다.'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스스로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이며 사람의 문제ㅡ인간의 가치가 개입된 문제ㅡ, 즉 question이나 matter와 같은 중립적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problem이나 trouble과 같은 부정성이 가미된 문제를 지시할 때에,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의 경우 그 양상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는데, 가령 양자 간의 관계에서 상호 이해관계가 규착糾錯되어있는 경우 양자가 그 사안을 문제시하지 않으면 그 관계에서 문제는, 차후 개개인의 심리나 상황의 변동 가능성을 차치하고, 현재에는 형식적으로는 없는 것이 되며, 나은이 문제 삼지 않지만 예은이 문제 삼는 경우 나은은 예은과의 관계에서의 결절점을 교착交着하여 공유하기 때문에 단지 나은이 혼자만 문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 게 되어, 상호의 문제가 되고, 그러므로 서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타협하여 나가야 할 것이고, 양자가 모두 문제 삼는 경우 처음부터 서로 문제를 각지覺知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애초에 문제가 발생, 비화, 지속되지 아니할 것이며 설령 문제가 시작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화에 이르기 전에 문제를 직시한 상호가 적절한 수단을 통해 문제 제거에 화급히 착수하지 아니하리라 볼 수 없다. 즉 문제ㅡ하나 혹은 둘 이상의 이해관계자들 간의 문제ㅡ의 발생은 최소 한 사람이 문제를 인식하는 경우에 가능하다. 이 주제에 대한 사안은 쪽 수 와 힘으로 약자의 문제 제기를 누르고 엄폐하는 경우는 아니며 단순한 호기심의 발동에의 중립적 문제라고 치부하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인지 그전부터 다수적 중론이 형성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특히 여성-연소자 측에서 남성-연장자의 '오빠가'를 문제 삼는 경우를 다수 접하면서 이들 간에ㅡ혹은 혼자만의ㅡ 묵시적 분규가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을 하대한다는 신호로 여겨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자신을 통규通規적 수권위자受權威者인 연장자로서 흘연屹然시 하는 남성에 대한 반발감이 약소하게나마도 없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영상이 있어 소개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6-zfqbT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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