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9. 11:20ㆍ생각
자식농사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어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잘 만들었다. 농사 당하는 자에게 불쾌감을 최대치로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비꼬는 거다. 살면서 들어본, 불쾌감을 안기는 단어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말일 텐데 참 우리 생식을 잘 묘사하는 말이다. 악의적 의도로 생겨난 단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문화에 맞게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그 사용에 있어 사용자들이 딱히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의 사용은 프레임 적용의 문제인 만큼 사고에 영향을 크게 끼친다. 가령 지금 우연히 게이 클럽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견됐듯이 문제자의 소속 집단이 성소수자라는 것이 집단 전체에 낙인을 찍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심리적인 오류지만 작금의 작태를 보면 많은 이들이 이러한 착류를 범한다. 내가 얘기하는 언어의 사용도 이와 같다. 이름은 소속된 구성원의 의미를 제한하며 프레임을 형성한다. 난 자식이며 자식이 없다. 난 자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자식이라는 소속에 편입되어 있다. 나는 저 단어에 의하면 농사지어진 소출이다. 농사에는 분명히 작황이 좋은 때가 있고 좋지 않은 때가 있게 마련이다. 생식활동도 이와 같다. 출산한 자녀의 상태는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모두 다르다. 다들 살면서 직간접적으로든 경험하겠지만, 부모는 자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부여되고 자격, 지위가 부여된다. 그것이 한 개인으로부터는 사회적으로든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체적으로 말썽꾸러기이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 아기가 자라 학생이 되면 학생에 맞는 대우나 취급을 받게 된다. 자식이 잘나는 못나든 자식을 사랑하는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 이러한 자격 부여에 의해 멸실된다고 강고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된다. 나이 먹은 캥거루 족이 요즘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때부터, 혹은 빠르면 그 이전부터 부모의 태도는 변한다. 마지못해 품고 사는 부모도 있고, 내쫓는 부모도 있다. 전자나 후자나 작황이 좋지는 못한 것이다. 반면 어떻게 운이 좋든, 의도한 대로이든 자식이 부모 맘에 맞게 잘 살아서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정도라도 되면 자식농사가 잘 된 것이다. 우리 부모는 자식농사라는 단어를 한 번도 내 앞에서 사용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식이 본인 욕구대로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다분히 표출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내 욕구가 아니라 자식 잘 되라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들이었다고 변론해도 소용없다. 그것은 본인의 욕구임이 분명하다. 자식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조금 순화해서, 본인이 원하는 마음이다. 애초에 두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상대를 위함이 있을 수 없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한 진심과는 별개로 자식농사라는 말은 쓰레기다. 이러한 말이 만연하게 되면 사람을 소출로 판단하게 될 여지가 상승하고, 그로 인해 소출의 등급을 매기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프레임을 형성하기 때문에 모든 이름 부여 행위에는 신중함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게이 클럽을 예로 들자면, 게이 클럽이 아니라 일반 클럽에서 코로나가 확장되었다면 다른 식으로 프레임이 씌워졌을 것이다. 애초에 코로나가 확산되는 데는 게이와 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신천지든 게이든 특정 집단의 이름이 낙인찍혔고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 자체의 성격과는 별개로 엉뚱한 오명을 쓰게 된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어쩔 수 없이 낳음 당했지만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웬만하면 부모에게 잘하고 싶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한 개체에 잘못된 자격이나 지위를 부여하여 등급 매김을 가하는 작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이 있는데, 나중에 따로 논하겠지만 이 저자의 주장은 한결같이 책의 제목과 같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어난 것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언제까지 태어남에 불평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뭔가 이유가 많다. 그것이 핑곗거리라는 것이 아니라, 간결한 다수,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뭐든 이유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식은 약자로 시작하고 길러지고 나중에서야 부모가 힘이 약해지면 지위를 역전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우리는 백지로 시작하고 이미 있는 것에 지배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을 인정하거나, 극복하거나, 무시하거나, 없애는 것은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다. 멍에는 구속인데 구속이 아니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가?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한다. 주어진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해버리면 정신적 멍에를 동시에 탈피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나 혼자 정신적 부담을 덜었다고 하여 외계로부터 오는 '부여附與'의 화살을 튕겨내지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자식을 낳기가 두려운 이유는 자식농사를 망칠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자칫 이런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까 봐서이다.
이상, 예전에 써놓은 아래의 글에 수정을 가한 것이다.
子息農事
내가 자식으로서 저 의미어에 대해 판단하건대, 정말 훼욕毁辱하고 싶은 의미어다. 우리 부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ㅡ사실 안 미안함ㅡ 당신들의 농사의 작황이 좋지 않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까지의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언제 풍년을 맞아 소출물의 격상이 수반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모母로부터 난질亂叱을 천문千聞할 때마다 신수身受가 진췌殄瘁하는 기분이다. 경제적 무능에 대하여 질타를 받을 때는 항론抗論의 여지가 없어 정신적 가치로 자변自辯하고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 나는 말로末路에 규고叫苦한다. '결국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은 내가 꼴 보기 싫은 것 아니냐!' 그리고 이제서야 3년 만에 母의 목전에서 염태厭態의 형모形貌가 소실消失된다. 나의 母를 차치하고 어떠한, 자기로부터 나온 것을 소유물로 여기거나,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자는 그 소유되는 것이 별무가관別無可觀일 때 그에 대한 염박厭薄이 가해지게 마련이다. 난 어렸을 때 나에게로부터 나온 것ㅡ가령 비안屁眼으로부터 탈루脫漏하는 인무人霧를 자가自家의 외에서 인허認許하지 아니하였던 경우나, 모발毛髮이나 조분爪分 등을 수집하였던 경우ㅡ에 대한 강박적인 계착係着이 있었는데, 동관童丱적부터 그러한 기습氣習을 갖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특奚特, 나는 동치童穉에 정서적으로 박지薄志하여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든 극화하기에 용이하였는데 해가奚暇에 지금의 내가 되어있다. 내 고래를 숙안熟案해보면 이러하게 산출될 수밖에 없었던 근인根因이 추측되는데 무엇을 탓하기에는 무용하고, 반구저기反求諸己하기에도 어린 인생이 긍민矜愍하다. 마냥 내벌적內罰的이기에는 부인副因이 너무 많다. 산출물의 격格은 산출물들 간의 유용성의 비교로부터 판단되는 것인데 비교의 법식法式이 판단을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그 자체의 독립된 가치에 대한 안맹眼盲적 사고를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런 말은 뭔가 고상한 것 같아서 수긍해야만 할 것 같지만 실상 사지 멀쩡한 동남童男의, 밀실에 복재伏在하여 복룡伏龍하기만을 망신妄信하는, 몽혼夢魂에 침윤된 형구形軀를 개목開目 시에 항용恒用 목견目見해야 하니 비방比方의 욕념慾念이 환출喚出하지 아니할 수 없으리라. 자식농사는 필연 백출百出하는 출아出芽 중 출류出類한 것이 용출聳出하기를 기망冀望하는 간한奸漢들이 양정量定한 의의소意義素일진대, 이는 사실상 도탕賭帑과 동어同語라고 볼 수 있다. 투자든 투기든 도기賭技든 자신들의 도물賭物이 소출물의 상태에 좌우되는 판국에 정신적 가치가 수갱垂坑으로 영락零落하여도 안전眼前에 파착把捉될 리가 있겠는가. 보전욕을 가진 종은 자신이 목적하는 임무에 성공하였을 때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그 성공의 기준은 응당 산출물이 열위의 반열에 승위乘危하지 아니한 경우, 즉 회임懷妊한 자와 착상着床의 중인重因을 제공하여 회임자를 배태胚胎하게 한 자가 굉유宏猷를 세워 예탁豫度하고 주비籌備하였을 때에 준시準視될 산출물이 준계準計에 의합宜合하는 경우일 것인데 실패한 산출물은 성태成胎 시에 자신의 생출을 희원希願하지는 않았다고 봄이 일응 합리적이고 나아가 성체成體의 고차적 규준을 제한능력자의 행동에 사삽斜揷한다는 것은 그 의사무능력자에 대한 과대한 가압加壓적 행위라고 볼 것인 바 그 방만한 의칙儀則을 패쇠敗衰하고 그 산출물이 자주적으로 정칙定則하여 궤칙軌則하게 하여야 한다. 각자의 목적되는 기간基幹은 빈삭頻數히 불상합不相合일 것인데 그 기준의 기우基宇가 모체로부터 증유贈遺되는 것이 아니라 후결적으로 험득驗得되는 사사事事인 바 그 상간相間의 의견의 비동치가 그 어떠한 수모誰某의 과류過謬도 되지 않을 것이고 필경畢竟 그 어긋난 의사를 가합加合하여야 함이 내엽來葉을 긍종肯從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미래를 긍정되게 신영新迎할 수 있는 동심합력同心合力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것이고 용혹容惑, 의사가 구합鳩合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절촉切促한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오感悟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식이지만 모두가 부모가 되지는 않는다. 장양將養하려는 둔한鈍漢은 노농勞農의 간성懇誠과 소출의 품질에 대한 정향定向적인 비가比價가 정여定與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각지覺知하여야 할 것이고 소출은 그 품질에 적격하게 편산遍散히 당용當用된다는 사실과, 해특奚特히 인간이라는 소출은 마냥 두고 망치忘置하면 부란腐爛하는 농산품 같은 것이 아니라 항용 억변億變하여서 언제 파훼될지도, 언제 건식健食되어 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관시觀視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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