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타고 있어요

2021. 12. 9. 11:24생각

살면서 목격한 이상한 문화(?)가 있다. 자동차 뒷유리에 '아이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이다. 내가 이상함을 느끼는 부분은 '까칠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 같은 별의별 변형된 스티커가 운전자의 이목을 끄는 것이 아니다. 왜 하필 자동차 뒷유리에 그것이 붙어야 하며, 왜 하필 아기냐는 것이다. 이에 나는 어떤 자료도 참고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설이 난무할 것이다.

1. 왜 하필 아기인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사고가 났을 때 구조자가 이 스티커를 보고 아기를 구조할 수 있게끔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붙인다는 정보이다. 단지 구조의 측면에서 이 스티커를 붙이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본 바로는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 다른 연령에 비해 아기는 스스로 위험을 회피할 의지나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노약자나 장애인도 분명 사고의 상황에서 아기와 다를 바 없이 약자가 된다. 애초에 도로 위에서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약자가 된다. 그런데도 굳이 '아기'를 지시하는 이유는 아기가 특히 더 약자라서라기보다는 몸집이 작아서 차체 파편에 가려져 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리라. 그러면 구조자는 우선적으로 부서진 차체에서 뒷유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아기의 존재 여부를 뒷유리로부터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뒷유리의 스티커 부분만 소실되었다면 스티커 부착의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하지만 어느 재난 상황에서나 마찬가지로 생존 가능성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스티커가 사고로 유실될 가능성이 다분하다거나, 뒷유리 스티커 찾다가 골든타임 놓치고 시간 잡아먹는다고 하더라도 가능성은 달아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맞는 논리인가? 나도 가설에 대한 시나리오를 전개해 나가면서도 정말 효율적인 것인지 계속 의문이 든다. 아무래도 이건 실무자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맞다.

'어머니가 타고 있어요' 같은 'x가 타고 있어요'는 아기에 비해 왜 적은가? 아이의 생명이 다른 이의 생명보다 소중해서 그런가? 부모의 입장에서 아기는 자신들의 전 재산과도 같다. 어쩌면 자신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고 여기는 부모들이 있다. 그래서 곧 죽어도 개새끼가 타고 있다거나 자신들의 부모님이 타고 있다고 써놓지는 않는다. 물론 요즘엔 부모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 거의 없어서 '부모가 타고 있어요'가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부모를 잘 태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재난 상황에서 신체적 약자는 신체적 강자에 비해 배려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 마땅한 구조 수단이 없다면 그 위난에 대해 생존 가능한 강자는 없다고 보인다. 물론 모두가 바다에 빠졌을 경우 아이나 노약자에 비해 신체 건강한 남자가 더 오래 버틸 수는 있을 것이지만 구조 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시간만 다르지 다 죽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구조 수단이 있고, 배려 규준이 없다면 신체적 강자는 그 구조 수단을 우선적으로 쟁취할 가능성이 신체적 약자에 비해 높아 보인다. 이로 보아 위난의 진행 속도에 따라 상대적인 배려 기준이 적용된다. 대체적으로 자동차 사고는 배의 침몰에 비해 더 위급하고 즉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 위에서는 바다 위의 침몰선에서에 비해 신속한 판단으로 신체적 약자를 우선 배려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위난 상황에서 신체적 강자는, 도덕심이나 통념에 의해 결과적으로 약자로의 최후를 맞는다. 신체 건강한 남자나 부모는 자기의 나머지 가족을 살리고 싶어 하지 생판 모르는 신체적 약자까지 살리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기울어진 생명의 무게이다.

 

2. 왜 하필 자동차 뒷유리인가?

여러 가설을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뒷유리가 다른 차체에 비해 찾기 용이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실무자가 아니라서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만 제기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단지 개연성 있는 추리로는,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는 습관이 그대로 이어진 것, 혹시나 뒤차와 사고가 나거나 뒤차가 사고를 목격하는 경우를 대비해 뒤 차 탑승자에게 본인의 차에 아기가 탔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 운전 시에 스티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 뒷유리라는 것, 마땅히 붙일 곳이 없어서 우연히 뒷유리에 붙인 것 등 정해진 이유가 없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https://namu.wiki/w/%EC%95%84%EA%B8%B0%EA%B0%80%20%ED%83%80%EA%B3%A0%20%EC%9E%88%EC%96%B4%EC%9A%94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나만 이상한 의문을 가진 것이 역시 아니었다. 구조 목적이란 것도 도시괴담에 의한 미신이고, 실제로는 스티커가 운전에 방해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접촉 사고의 1/20이 스티커에 의한 주의 분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실무자의 의견을 알 수 있었는데, 차량 사고 시 차체 뒷유리의 스티커를 확인해야 한다는 매뉴얼을 본 적이 없고, 스티커가 화재로 인해 소실될 가능성도 있고, 애초에 사고 차량 내부에 대한 완벽한 검색이 중요하다고 한다.

'소중한 내 새끼 타고 있다', '차주 성깔 있다' 따위의 스티커는 그것을 보는 운전자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도 한다. 굉장히 모자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애새끼 관련 스티커를 붙여 놓은 놈들은 너무 이기적이다. 네 새끼만 소중하냐? 도로 위에선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고 약자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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