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9. 11:27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Fh8W8Q32hXk
플라톤은 어떤 명제 P가 지식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명제 P가 참이다.
어떤 S가 명제 P를 믿는다.
명제 P에 대한 S의 믿음이 정당화된다.
즉,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게티어는 이 JTB 조건이 모두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예외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게티어의 문제이다.
먼저 영상에서 소개한 예를 옮겨보겠다. 철수와 민수가 회사 면접을 보러 갔다. 철수는 민수의 주머니에 동전에 10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면접 후에 비서가 민수에게 합격 통보를 한다. 이것을 본 철수는 '합격한 사람의 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들어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잠시 후 비서가 민수가 아니라 철수가 합격이라고 정정한다. 그때 마침 철수의 주머니에 우연히 동전 10개가 들어있다.
'합격한 사람의 주머니에는 동전 10개가 들어있다'를 명제 P라고 하자. 이때 명제 P는 참이고, 철수는 명제 P를 참이라고 믿고 있고, 명제 P에 대한 철수의 믿음은 정당하다. 그런데 이것이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우연적 요소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철수가 민수의 차 x를 보고 '민수는 차 x를 소유했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영희가 지금 미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수는 '민수는 차 x를 소유했거나 영희가 지금 미국에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민수의 차는 렌트카이고 마침 영희가 지금 미국에 있다. 이 선언 명제는 둘 중 하나 이상만 참이라면 참인 명제이므로 철수는 옳은 판단을 했다. 역시 이것도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는 명제적 지식이다. 이병덕 교수는 그의 저서 현대 인식론에서 지식을 크게 세 가지로 명제적 지식, 실천적 지식, 대상적 지식으로 구분한다. 책에서도 명제적 지식 위주로 논의 전개를 하듯이 게티어 문제 역시 명제적 지식을 다룬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예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로데릭 치좀이 제시한 예시를 한 번 살펴보자. 들판에 양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양이 아니라 양처럼 생긴 개다. 그리고 실제로 들판의 나무 뒤에 양이 있다. 이 역시 우연한 명제적 지식이다. 이에 대하여 논파주의는 지식의 세 조건에 다른 논파 가능성 배제 조건을 추가한다.
S는 P를 안다
1. P는 참이다.
2.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기 위한 적절한 증거 e를 갖고 있다.
4. P를 믿기 위한 S의 증거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명제 d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 논파주의는 이 "네 번째 조건이 비현실적으로 강한 조건임을 보여준다(p. 22)."
"운 좋게 참이 된 믿음은 결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오직 진리 개연적인 믿음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 '사실적 논파자가 없어야 한다'라는 조건은 운 좋게 참이 되는 믿음들을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시킨다(p. 22)."
이병덕 교수는 책에서 지식의 정의를 정의항과 피정의항의 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지식의 정의는 외연적으로도, 내포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적합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 같다. 게티어 문제가 발생하는 어떤 사례에 대해, " '지식'이라는 피정의항의 외연과 '정당화되는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항의 외연이 일치하지 않는다."라며 그것이 지식이 아니라고 한다.
https://textexture.tistory.com/69
게티어 문제 해결을 위한 한 가지 시도: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 이론
https://brunch.co.kr/@texto/91 브런치로 글을 옮깁니다
textexture.tistory.com
필자가 게티어 문제를 검색하던 중에 둘러본 블로그의 내용 중에 흥미 있는 주장이 있어 참고했다. 앨빈 골드만의 인과적 지식 이론 causal theory of knowledge인데,
"인식주체 S가 P를 알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P라는 사실과 P에 대한 S의 믿음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 연관성이 성립하는 것이다(p. 369)."
즉, 내가 들판의 양과 닮은 개를 보고 들판에 양이 있다고 믿는 것은, 그 들판에 정말로 양이 있다는 사실과 인과적으로 연관성이 없다면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로부터 느낀 점은 실재에 대한 명제적 착각이 불러일으킨 지식 개념의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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