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18:09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c8xCF-4d2Mo
판단과 결론은 생각의 결과이며, 확신은 생각과 별개의 문제이다. 즉 판단이나 결론은 생각의 내용이며, 확신은 단지 믿는 행위에 불과하지 그것이 생각된 내용이라거나 생각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생각의 내용과는 별개로, 잘못된 생각에 대해 확신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1. 확증 편향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반증하지 않음. 다음의 문제를 풀어보라. "한 면에 모음이 있다면, 뒷면에는 홀수가 있다."라는 규칙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음 4장의 카드 중 2장을 뒤집어볼 수 있다.
A, 3, J, 4
어떤 카드 2장을 뒤집어야 위 규칙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까? 정답은 A와 4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A와 3을 뒤집는다고 한다. 위의 규칙을 조건문으로 나타내자.
모음 → 홀수
이에 대한 반증은 '모음 → ~홀수'이다. 3을 뒤집는 것은 ~모음과 ~홀수를 확인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즉 반증례를 확인하지 않으면 대우를 확인할 수 없다. '모음 → 홀수'가 참이라면 그의 대우인 '~홀수 → ~모음'도 마찬가지로 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홀수가 아닌 4의 뒷면이 모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A와 3을 뒤집었는데 모두 홀수와 모음이 나왔다고 하자. 그런데 알고 보니 4의 뒷면이 모음이었다. 이것은 본래의 명제의 반증인 것으로 한 면에 모음이 있지만 뒷면이 홀수가 아닌 경우가 된다. 3을 골랐다고 하자. 3만 고른 행위를 보면, 이것은 조건문에서 후건 긍정에 속한다. 후건 긍정은 논리적 오류이다. 뒷면이 홀수라고 하여 앞면이 모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쌍조건관계라는 것이 입증이 되지 않은 이상 이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어쨌든 영상에서는 이것이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아빠와 아이가 있다. 아이가 멀리서 아빠에게 달려간다. 그러다가 아이가 아빠 앞에서 넘어지는데 아빠는 이를 보고, "내 이럴 줄 알았다."라며 핀잔을 준다. 그런데 아빠는 아이가 넘어질 줄을 몰랐을 공산이 크다. 영상에서는 인간의 당황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이러한 발화를 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심리적 이유는 제쳐두고,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만 보고자 한다. 우선 아이가 아빠에게 달려갈 때 아빠는 아이가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하였느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빠는 이 상황에서 여러 개의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아이가 넘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경우와 그렇지 아니한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를 A, 후자의 경우를 B라고 하자. 만약 아이가 넘어지는 결과 발생 후 A가 실행된다면 아빠는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 발생 후 B가 따라나온다면 아빠는 확증편향에 빠졌다. 그런데 여기서 아빠의 추측이 뒤에 발생하는 '아이의 넘어짐'이라는 사건과 인과적으로 연관이 있냐는 문제가 생긴다. 분명히 아빠의 예측이 아이를 넘어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단지 내 생각의 내용과 예측이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다. 아빠의 예측이 그 예측에 들어맞는 미래의 사건을 인과적으로 반드시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우리가 증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예측과 예측에 대응하는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계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증명하지 못한다는 인식의 한계만으로는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파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아빠의 예측과 아이의 넘어짐이 실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단지 그것을 증명할 수만 없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의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빠가 여러 예측을 하고 그것이 맞는지 실제로 확인하는 것이다. 분명히 어긋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며, 단지 결과적 참값만을 가지고 그것이 사실의 입증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반증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아빠의 예측과 아이의 행동이 들어맞음이 결과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아빠가 이때에 "이 사건의 경우에만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 이 사건을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복기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물론 무언가가 입증되었어야 한다. 반증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즉 표적이 불분명하다. 마치 러셀의 찻주전자 논증과 유사하다. 지구와 화성 어딘가에 찻주전자가 공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 러셀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를 반증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억지 입증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어쨌든 아빠의 예측이라는 개별 사건과 아이의 넘어짐이라는 개별 사건이 인과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은 일응 합리적으로 보인다.
2. 명사 탐닉 현상
내 판단의 정확성 여부보다 '내가 판단을 잘했다'라는 느낌을 더 좋아하는 현상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 예은이가 사람을 죽였다.
- 예은이가 살인자다.
두 문장을 보거나 들은 해석자의 판단은 자못 다르다. 전자는 예은이가 사람을 왜 죽였는지, 무언가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반응이 많은 반면, 후자는 전자에 비해 비난하는 자의 비율이 높고 단정적이 된다. 그 이유는 후자에서 '살인자'라는 명사를 사용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 판단이 맞았다는 확신과 정확성이 별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