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

2021. 11. 22. 14:21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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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탈코의 이유는 '편함'이 1순위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탈코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탈코의 이유의 중요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탈코를 하는 여성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코르셋이라는 이념을 타파하기 위해 탈코르셋이라는 이념을 입은 것이다. 분명하게 이에 대한 반발을 예상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하나의 수단인 탈코르셋이 이념의 탈을 쓴지는 오래되었다. 물론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이 신뢰하고 몸을 담은 이념이 이념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념이라는 것은 단지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이념 안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약간 언어적 문제이긴 한데,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이 탈코르셋이라는 수단을 함축한다면 탈코르셋을 이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궁금하다. 페미니즘은 이념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탈코르셋은 그 이념적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코르셋은 '이념적 방법'이라고 지시될 수 있을 것이다.

탈코르셋이 없는 페미니즘은 존립할 수 있는가? 반대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아니하면서 탈코르셋을 할 수 있는가? 전자는 존립 가능하다. 탈코르셋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념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방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이외의 수단이 페미니즘을 위해 가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후자도 가능한 듯 보이지만 더욱 논의가 필요하다. 탈코르셋을 하기 위해서는 코르셋의 기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적 관점의 코르셋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페미니즘과는 관련이 없는 코르셋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른 경우가 존재하는데, 코르셋의 기준이 페미니즘적 관점에 근거하지만 페미니즘은 지지하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때의 탈코르셋은 페미니즘적 행동이다. 그런데 이것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은 약간의 행위 호응이 불협화 하다고 할 것이다. 페미니즘적 행동은 하고 있고 그것을 인식하기까지 하지만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말은 다소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방식에 맞게 산다고 하여 자본주의를 반드시 옹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행동을 하면서 자본주의에 반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군대를 누구보다 혐오하지만 군대식 체계를 누구보다 따르고 적용하는 자들의 사례도 이와 유사하다. 탈코르셋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가능은 하지만, 일관된 행위를 위한 정당화의 근거가 필요할 듯이 보인다.

6. 치마, 원피스는 어떻게든 신체 활동을 제약하지만 편하다고 합리화함(앉는 자세부터 다르다.).

- 치마나 원피스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성의 기준으로서의 '여성복'적 디폴트를 상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치마나 원피스가 불편하다는 것을 디폴트로 설정하면 안된다. 치마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작은 사이즈이거나 단지 사이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앉는 자세를 강조한 것으로 보아, 치마의 일부를 통해 보이는 속옷의 노출 등의 여부가 불편함의 요소로 고려되었으리라. 이에 치마를 입을 경우 속옷 노출의 배제를 위해 속바지 등의 속옷 가리개가 추가로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치마를 입어야 했던 경우가 있었고 지금도 없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불편함에 대해 필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본인들이 불편하다는 데 이의가 없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불편함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부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약간 그런 듯이 보이는데)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착용의 불편함은 별론으로 하고, 의복의 사회적 불편함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반드시 교복 치마를 입어야 했던 과거의 학교를 예로 들자. 교탁의 선생이 자신의 치마 사이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 불편한 한 여학생이 불편한 자세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는 한탄은 사회적 불편함의 일환으로 간주될만하다. 교복 자율화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현실적으로 아니었음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편함이 전제된다고 하더라도, 치마, 원피스를 편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사실은 불편한데 편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추론은 건전하지 않다. 가령 6을 주장했던 유튜버 본인은 그러하였을지도 모르겠으나 다른 여자들도 그러하리라고 추단하는 것은 명백한 일반화의 착류이자 맹동이다. 우리는 실제로 치마나 원피스가 편하거나, 착용의 편함을 떠나 그것을 입기를 원하는 여성들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단지 세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 박탈하는 오판에 의한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 레이싱걸이, 그들의 직업이 성적 대상물이라는 간주 하에, 실업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레이싱걸이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중요한 그들의 가치는 본인들이 설정하는 것이다. 가령 레이싱걸에 대한 사회적 성의 부여나 입혀진 코르셋이 레이싱걸 그들이 현재 소유한 여러 성적 요소라고 간주하자. 나아가 그 소유한 성적 자산을 이용하여 직업 활동을 하는 것과, 본인들 스스로가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이 별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사회적 세뇌의 일환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들은 이미 그 코르셋의 사회의 승자이다.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성적 자산을 스스로 놓을 이유가,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없다. 그들은 사회의 농간에 놀아나는가? 사회가 성적으로 그들을 유린하는가? 자본과 성적 우열의 관점에서, 그들이 가진 성적 자산은 이익이면 이익이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추측한다. 그렇다고 성적 도태녀가 그들을 질투하여 그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들(성적 우위자)을 '계도'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자산을 강탈하여 그들을 실직 상태로 내모는 것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백 번 양보해서 레이싱걸이나 성 산업 종사자, 성 관련 자산으로 어떠한 이익을 취하는 어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세뇌되었고 그것이 (어떠한 관점에서) 나쁘기까지 하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불법이 아니거나 세뇌당했음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선택이 이어진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의 '계도'라는 명목의 강요는 무의미하다. 그들의 관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성적 자산의 늑탈로 보임에 다름없다. 이제 이런 여자들은 흉자의 반열에 속하게 된다. 성 착취 대상으로 하여금 성 착취자의 만행을 알리고, 성 착취 대상을 계도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목적에 가담케 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은 흉자의 (여러 의미의) 순응에 의해 일거에 무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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