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의 피해망상

2021. 11. 22. 14:19생각

 

사실 별로 대응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혹시 뭔가 납득할만한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재고해보겠다. 먼저 성차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성차이가 아니라 성차별이다. 그러니까 단지 성차이는 차이에 대한 대우待遇를 함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차별은 차이에 따른 대우를 함축한다. 예를 들어, 여성 축구는 남성 축구에 비해 스피드나 박력이 떨어진다. 이것은 차이만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에 따라 남성 축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요하는 것이 차별이다. 차이의 우열을 따져 우위의 것을 열등한 것보다 더 대우하는 것이다. 결과물만 보자면, 여성 축구보다 남성 축구가 더 재미있나 보다. 왜냐하면 전자에 비해 후자의 수요가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수요가 재미를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적 융통성을 허용한다는 전제 하에, 누군가는 후자의 공급이 전자보다 압도적인 이유가, 남성 권력이 스포츠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있다.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약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이 계속 정치, 경제, 학문 등의 다양한 제반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면, 스포츠가 여성 중심적으로 주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사회에서는 마치 귀족이 검투사 노예들의 경기를 관람하듯이, 남성 스포츠인이 여성 관람객들에게 소비되는 형태로 스포츠가 발전하였을 수도 있다. 반면에 남성에게 스포츠 참가가 관람의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약한 남성 관람객이 신체적으로 우월한 남성 스포츠인을 소비하면서, '왜 약한 남성보다 강한 남성이 더 소비되는가!'라고는 거의 주장하지는 않는 점으로 보아, 단지 신체적 차이에 따른 스포츠 시장에서의 차별적 대우를 문제 삼는 것은 민감한 반응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성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대개 성적 열등자라고 생각된다. 물론 '성차별에 민감함'이 '성적 열등성'을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성차별의 해소를 주장하는 자의 행동은 성적 자본 투쟁에서 도태된 자의 발악이라고 강하게 추측된다. 반면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꾸밈 노동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탈코르셋을 한 자가, 이전에 사회적 코르셋의 기준을 근거로 하면 우위를 점했던 자신의 높은 서열을 과감하게 버린 데에는 여타 여러 요인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쥔 것을 놓기란 쉽지 않다. 가령, 여성 연예인들 중에 높은 성적 가치로 성적 고자본의 반열에 올랐다가 다 내려놓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들의 행동 전환은 무언가의 깨달음의 방증이리라.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높은 성적 가치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 따랐지만 나중에 가서 그 가치에 대한 변심이 생긴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기에 문제는 아니다. 이 성적 우등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기까지, 애초에 성적 자본이 없어 내려놓을 것도 없었던 부류에 비해 어려운 결단의 과정을 거쳐야 했으리라. 이들도 물론 성차별을 느꼈으리라. 상위 클래스에서도 성차별은 존재할 것이다. 비교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 인간이니 말이다. 그리고 올라가서 보니 아래에서 여러 열등자와 도태자가 난립하는 현실이 목도되었으리라. 뭐 이런저런 세상에 대한 부조리가 감성적으로 각인되고, 결국 그는 가진 것을 내려놓고 투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아 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차별 발언이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성차별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네가 느끼는 너에 대한 성차별이, 다른 성차별이 만연함으로 인해, 더 약해진다거나 잘못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별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마치, "남들 다 힘드니까 너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뚱딴지같은 헛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위의 사진에서의 반박의 내용은 고려하지 않으리라. 단지 그들이 느끼는 성차별이 잘못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다. 우선 여성들이 듣는 성차별적 발언 자체는 상황 중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가령 '오빠 밥 좀 챙겨줘'가 성차별적 발언이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 발화된다면 그것은 성차별적 발언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차별적 발언은 해석자의 해석에 의존하기도 한다. 인물 중심적 해석도 일면 요구된다. 물론 인물은 여러 사회적 상황에 놓여, 전적으로 독립된 주체성을 확립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지만 마냥 일말의 자율성마저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개인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성향 따위에 의해 미묘하게라도 백이면 백 다른 해석적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하니 일찍 다녀라."는 여성에게만 특화된 성차별적 발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여성 편향적일 수는 있다. 왜냐하면 여성에 대한 범죄가 '여성에게는' 심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남성은 남성에 대한 범죄를 심각하게 느낀다. 어쨌든 저 발언을 청취하는 대상은 남녀 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청취자가 남자이냐 여자이냐에 따라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편향되게 들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남자친구 있어?"라는 발언은 굉장히 성 평등한 발언이다. "총각, 여자친구 있어?"라는 발언과 함께 생각해보자. 두 발언 모두 성적인 파트너의 유무를 묻는 질문이다. '성적 관계'란 단순히 '성관계'만을 위해 이루어진 관계는 아니라고 할 것임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젊은 사람이 성적 유대를 맺는 사람과 어떠한 관계 형성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차별적 문제라기보다는, 성적 파트너의 소유 유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가져야 할 불쾌감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이 발언에는 남자친구가 없는 여자가 성적 관계자인 남자친구가 없음을 부끄럽거나 열등하게 여기는 경우에 불쾌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질문에 불쾌할 수 있는 사람은 성소수자이다.

"살만 빼면 예쁠 것 같은데."는 성차별주의적 발언이라기보다는 외모 비하일 여지가 더 많다. 뒤룩뒤룩 찐 살은 남자든 여자든 미를 헤친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여성에게만 부과된 사회적 짐이 아니다. 남녀가 동등하게 짊어지어야 할 짐이다. 혹은 던져버려야 할 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적 시각이 바뀌는 것은 각고의 노력이 수반되더라도 현격하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추측된다. 가령 반사실적 조건에 의해, 미래에 뒤룩 돼지가 미의 표본이라고 유아 때부터 주입된다고 가정하자. 물론 이러한 가정은 실제로 행해지지 않는 이상 무의미하고 결과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가정 하에 우리의 미감은 변화할 것인가? 물론 상황에 맞게 미적 시각이 변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상황 중심적 판단을 하기 때문인데, 주변에서 뒤룩 돼지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을 성격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경험한 아이들은 그러한 미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전무하지 않다. 물론 뒤룩뒤룩 찐 살을 미의 표본으로 설정하자고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의 사회적 표준을 없애자는 것이다. 미의 표준이 없어질 수는 없다. 미적 표준을 높은 가능성으로 해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혁파해야 한다. 자본과 사회적 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론 이 관계가 단지 우연한 상관관계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단정 짓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성급하고 위험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떤 의사 결정권자도 고착화된 사회적 성의 혁파를 위해 발 벗고 동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에 동조하는 기득권 남녀의 움직임의 조짐은 보이지만 힘의 구도를 전복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발휘될 것이라고는 아직은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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