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2. 14:20ㆍ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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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영상으로 이 많은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선 감사하다.
7. 화장품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짜인 소비사회의 대표적 공산품이다. 화장은 얼굴의 체계를 만들고, 얼굴을 모델에 따라 대량 생산한다. 성 상품화와 소비사회의 강요된 미의 전형과 관련이 있으며 이미지와 기호에 의해 표시된 것으로, 미의 기표가 계산되고 그 계산에 따라 구성된 미를 가공하는 것. 끊임없이 유행을 만들고 새로운 현실 원칙을 생산한다. - 「2000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 페미니즘은 일견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띠는데 왜냐하면 이 유튜버가 주장한 것을 토대로, 이러한 성적 계층의 구분이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자본으로 간주되므로 성적 가치는 성적 자본이 된다. 알게 모르게 모든 인간은 성적 주체자이자 대상물로서 상대를 성적 자본의 관점에서 품평하기도 하며 반대로 품평 받기도 한다. 그렇게 선택하고 선택을 받으며, 선택을 받지 못한 자는 성적 자본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성적 자본의 사회에서 성적 선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화장품이 성적 가치를 올리기 위해 특화된 전형적인 도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장품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성적 자본이 넘쳐난다. 의복도 성적 가치를 올리는 데에 일조하는, 성적 가치로 간주될 수 있는 성적 착물着物이다. 무형의 산업도 성적 자본이다. 최근 피트니스 산업의 활성화도 성적 가치가 중요시된 세태를 반영하는 움직임이리라. 하지만 싱크대가 집안일을 하는 여성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결과만을 놓고 성 고착화에 일조하는 작태나 망동 따위로 치부하는 단견은 동조할만하지 않다. 왜냐하면 제작자나 사업가는 사회적인 쓰임의 기준으로 물건을 제작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인데, 사업가들이 그러한 세류에 소극적으로 편승하였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들이 질타 받아야 할 정당한 명분이 확보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어떤 페미니스트는 그렇지 않은 사업가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인데, 그 대표적인 분야가 의복과 화장품이다. 화장품 회사의 CEO는 어떻게든 화장품이 많이 팔리는 것이 목표이므로, 세상의 미적 기준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다. 어차피 화장품의 기술이나 성능은 또이또이이기 때문에, 회사는 브랜드 가치의 상승과 대중성 확보에 필사적이라고 할 것이고, 마케팅적으로도 자신들의 물건이 많이 팔릴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편이 낫다. 즉 세계를 자신들의 이익에 합당하게 최적화하는 것이다(최적화 이론을 여기서 쓰다니;). 이는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다. 내가 화장품 회사의 CEO이고 오직 자본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면 나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사업가에게 국경이나 이념은 없다. 오직 돈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이념이다. 물론 돈을 우선순위로 여기지 않는 사업가도 많으리라. 하지만 많은 회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설정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지만) 이익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세계는 어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나 무리의 의도에 맞게 조정되기도 하며, 그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기도 하고 이러한 투쟁이 균형을 유지하기도 하며, 엄청난 파국을 낳기도 한다. 유행을 선도하는 주체는 소비자라기보다는 소비자를 조종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8. 탈 가부장제(디폴트 운동). 전 세대에 걸쳐 여성들에게만 가해지는 그릇된 사회 기제를 깨부수고 권력 계층으로 올라가자.
- 탈코르셋이 단지 외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거시적인 의미의 사회적 모순과 착취에 있다는 주장이다. 아랍권의 히잡 문화 같은 경우를 보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탄압이라고 간주할만하다. 사실상 문화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잡하긴 하지만 식인 문화도 문화이니 뭐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히잡을 쓴 여성들, 정작 당사자들은 이런 문화적 '이상함'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거나 이상함을 느낀다. 여기서 이상함을 느끼는 여성은 히잡 문화에 반발심을 가지거나 반발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반발심을 가진 여성들 중에서는 반발심을 표출하거나 반발심을 표출하지 아니한다. 뒤로 갈수록 문화와 집단의 억압적 분위기에 의해 그 수가 줄게 된다. 다수에 대한 항거는 무릇 어렵다. 아무리 이상함을 느껴도, 그 이상함이 정당하건 정당하지 않건 간에, 그에 대한 저항은 어렵다. 행동하는 자는 용기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명하지는 아니할 수 있다. 행동의 내용이 행위자에게 현명도를 부여한다. 히잡에 반대하는 '당사자'인 여성의 울부짖음은 용기 있고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자가 섣부르게 나서는 것은 마냥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사자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은 제3자의 개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 명백하게 억압을 당하는 위해가 존재하거나 그 부당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가능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당사자가 사안의 문제를 인지하지 아니함에 대해서는 문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명백하게 위험이나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라면 어떠한 특단의 조치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한국 여성의 불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다른 나라와의 비교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남이 나보다 더 고통받거나 덜 고통받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 실질적인 고통이 감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 성 평등 지수 117(?) 위이니 하는 이딴 통계는 쓸모가 없다. 애초에 표본이나 기준이 많이 이상하기도 할 수 있다. 애초에 정량적으로 계측되는 영역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불필요하게 작용하는 경우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불안하다는 감정이 매우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며 실체가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허상이 다른 유의 문제를 파생할 수 있다는 점이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어쨌든 다양한 공포의 요소에 대해 불안감을 가진 한국 여성들은 위험이 실재하는지, 자신의 감정이 온전한 정신 상태로부터 작동하는지를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현명하게 진단하여야 할 것이고, 이리하여 구체화된 모든 위험 인자를 멸살하기 위한 여러 화합적 모색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그릇된 사회 기제를 깨부수는 것은 좋은데 그 표적이 모든 남성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남성이 강자였던 시기를 이미 지나서, 신체적 우열의 구도가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하지 아니한다고 볼 여지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상한 범죄적 마음을 먹고 실행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인 어떤 남성은 신체적 우위를 앞세워 여자를 탄압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남성이 많이 증가했다고 판단되고, 사실상 여성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할 만한 남성은 많지 않다. 이는 신체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법과 양심과 성격, 습벽 등 여러 기타 제반 사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기득권 여성은 기득권에 대항하여야지 비기득권 남성에 대항하여 손해를 볼 이유가 없다. 비기득권은 남녀 가리지 않고 합세하여 기득권 남녀에 대항하여야 한다. 그러하지 아니하는 한 파국은 지근거리에 있다. 어쨌든 과거에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만연하였고 지금도 현존하지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미루어, 현실적인 위해의 감쇠를 받아들이고 그 잔류의 멸퇴를 위해 현실에 맞는 타당한 방도를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성이 과거에 보편적으로 폭력적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편향된 두려움에 의거하여, 남성이 폭력성을 선천적으로 가진다고 치부하고 일말의 화합의 가능성마저 원천 배제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