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2. 14:22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dc9su8RJ72g
- YouTube
www.youtube.com
1.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회적 성, 즉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되어 있다.
- 일면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지만 온전하게 그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것은 유튜버 본인이 그 내용을 그렇게 믿어지도록 학습되었거나, 학습했거나, 그렇게 믿어지도록 타고났거나,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내가 과학적 개연성마저 고려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여성들의 논리는 사실의 입증이 태무한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남성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스스로가 방증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사실의 입증 여부이다. 1의 내용이 말실수가 없다는 가정 하에, 그들이 이 내용의 참됨을 믿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되었다는 사실이 참임을 입증하여야 하는 점, 그리고 이것의 반례 즉,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여야 하는 점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들의 말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한다고 할 것이다. 사회적 성은 말 그대로 자연적 성과는 다른 후천성 요소를 기반으로 한다. 선천적 요소를 함의한 자연적 성과, 사회적 성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자연적 성으로부터 사회적 성이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하지 못하는데, 가령 그나마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성이 자연적 성과는 별개로 학습된 것이라는 자연 독립적 양태라는 주장마저 사후 해석에 불과할 수 있으며, 여러 인과적 반증례를 배제하지 못하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표본의 오류를 범한다.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된 집단을 A,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되지 않은 집단을 B라고 하자. 설마 이들이 모든, 혹은 거의 대다수의 인간(여자)을 A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럴 수도 있다.). 일단 그들이 그렇다고 믿든 말든 간에, 집단 A와 B가 각각의 어떠한 비율로 분포할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가 인식의 한계로부터 나온다. 즉 내가 사회적으로 코르셋 씌워졌는지 아닌지 구분할만한 지능이 있거나 없다고 단정하기가 애매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후 해석 편향과 확증 편향이 발생하는데 결과치나 기존의 신념을 토대로 그에 합당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과가 자의적이 된다는 말이다. 속된 말로 그 판단 과정과 결과가 개판이라는 소리다. 흄에 의하면 인과관계 자체는 관측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개별 사건이며, 특정한 사건 X와 Y가 인과적으로 연계되어 있는지 알기 어려움을 천명한다. 어쨌든 이에 따라 우리는 코르셋의 강요가 내면화되어있는지 내면화되지 않았는지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고 어느 하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가 그러는 이유는 자신이 믿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입증했거나, 자신의 믿음의 내용에 대한 반례를 반증했거나, 단지 특별한 근거 없이 자신의 신념을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조금 논점 이탈의 요소가 있을 수 있는 첨언을 하자면, 이들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지, 그것이 정확하게 적용이 되는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강요가 어떤 식으로 되는 것인지, 내면화가 사실 외면화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2. 마르고 싶다거나 머리를 기르고 싶다는 욕구가 '온전한 나의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나의 취향'이라고 보는, 즉 선천성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상동上同인데 부언하자면, 어떠한 여성적이라고 알려진 욕구가 선천성이라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의 특별한 근거가 없다면, 어떠한 여성적이라고 알려진 욕구가 선천성이라는 것이 어불성설이 아니라는 주장도 특별한 근거 없이 주장될 수 있다. 이것을 조건문으로 표현하기는 복잡하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그리고 애초에 전건이 후건을 함의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조건문 형식으로 우연히 표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명제의 논리 관계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저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과적 근거 말이다. 저들은 사건 간의 개연성 높은 상관관계에 대해 주장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우연한 상관관계이거나, 사건 간의 인과성이 무관한 것들을 논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애초에 저들의 주장은 인간의 인지 영역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성인은 아니지만 한 평범한 사람의 소견으로 보아, 자연적 성과 사회적 성의 인과적 일치, 불일치의 여부를 인간이 알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든다.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는' 그것을 알 수 없고, 그것을 규명한 사례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긴 논의도 불필요한 것이, 마르고 싶다거나 머리를 기르고 싶다는 욕구가 선천성이라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대라고 하면 될 일이다. 높은 확률로 이들은 관측되는 사례나, 드러나는 것, 결과만을 가지고 근거라고 들이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근거라고 들이댄 것들의 표본이 높은 개연성을 입증할 만하게 충분한지, 인과관계가 뚜렷한지, 반례는 존재하지 않는지 등의 여부를 따질 수 있다.
3. 여성은 선천적으로 장모長毛의 속성을 함의한 채로 생출하지 아니한다.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돼"는 답습된 것.
- 첫 번째 문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필요하다.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한다.'는 가치 명제이자 당위 명제이다. 즉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이에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당위 명제의 도출을 위해 당위 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이에 여러 주장이 대립한다.). 여자의 머리가 길든 짧든 그것은, 여자의 신체의 속성이나 생출 이후의 생활과는 별다른 논리적 연관이 전무하다. 여자가 긴 머리를 고수하는 행태는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가설도 주장한다. 여자가 긴 머리를 고수하지 않더라도 생존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왜 여자가 어깨 밑까지 내려가는 장발을 보편화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그것이 단지 예뻐 보여서였을까? 여성의 머리가 길면 길수록 남성이 그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일까? 그럼 대한민국의 과거, 조선이나 그 이전의 시대처럼 여성이 머리를 늘여뜨리지 않은 경우에 대한 반례를 설명할 수 없다.
위의 사진을 보라. 위의 머리는 모발이 길어야만 할 수 있는 머리다. 머리가 상부와 측면으로 돌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저 당대의 관습이거나 멋이거나 규칙이었거나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소리다. 저 당시에는 남자도 머리가 길었다.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유교의 교리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가 머리가 길었다고 하여 그것이 남성성을 헤쳤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저 당시에는 장발이라는 요소가 남성의 사회적 성의 일부를 구성했으리라. 여성도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한 요소가 여성의 사회적 성의 일부를 구성했다. 유교가 존재하지 아니하는 가능세계에서, 저 당시에 여성의 머리가 숏컷이 아닐 논리적 근거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유교가 존재하는 조선의 가능세계의 세계선을 거쳤고 결과적으로 여성의 장발의 사례가 하나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여성 장발의 사례가 추가된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반드시 장발이어야만 한다'라는 명제의 합당성을 강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성들이 장발을 선호했다면 왜 선호했는지, 여성들이 장발을 강요받았다면 왜 강요받았는지, 여성이 장발일 수밖에 없게 행동하도록 선천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여러 사례나 결과만을 가지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러 다양한 해석이 난무한다. 계속 얘기했지만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전무하다.
4. '숏컷/단발'은 장발이 디폴트인 단어이다.
- 이는 후결적 설정치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는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만연한 디폴트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이고 경험적으로 여성 모발의 디폴트는 장발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치적 판단에 근거한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 디폴트로부터 탈피하여 숏컷이 된 후에 듣는 낙인(?)이 무지함에 근거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참말이다. 숏컷과 페미니스트를 연결할 논리적 근거는 없다. 만약 숏컷을 한 여성을 보고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고 추측하는 정도는 경험칙에 비추어 일응 효율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판단이 빗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지성인의 자세라고 할 것이다. 숏컷은 페미니스트를 함축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남성 역시 단발이나 숏컷이 디폴트이기 때문에 장발을 한 남성은 여성 같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디폴트의 설정은 후결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냥 때에 따라 바꿔 나갈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남성은 대한 제국을 기점으로 고종의 결단에 의해 장발에서 단발, 숏컷으로 디폴트를 재설정하였고, 여성도 이제, 아니 원래부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과거의 통습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디폴트 변경의 이행이 지난했다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점점 여성들이 변해간다. 물론 시대를 거스를 선택권은 항상 있었지만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제는 다가올 미래를 개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성의 숏컷에 대한 시각이 곱지만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숏컷을 하는 여성의 표본을 잘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숏컷 때문에 멸시를 받는다고 느껴진다면, 정말 숏컷 때문에 멸시를 당하는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가능한 멸시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상례를 벗어나는 것도 정도가 있고 암묵적 허용치가 있게 마련이다. 내 경험상(아주 편향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일정 연령 구간을 벗어나 아줌씨가 되어가거나 이미 된 여성이 숏컷을 하는 경우 남성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0 ~ 20대 정도의 여성이 숏컷을 한다면 미묘하게 다른 관심을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 젊은 층에서는 숏컷과 페미니스트를 연관 짓는 습성이 한몫할 것이고, 중장노년 층에서는 여성의 장발 디폴트를 염두에 두고 통념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 수 있다. 나도 젊은 남성으로서 이런 시각이 학습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내가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숏컷이 어울리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나의 평가 대상에 대한 '어울림'을 판단하는 시각에 학습된 성관념이 함의되어있을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인정하는 바이고 딱히 철회하거나 수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차후에 수정하거나 철회될 수 있다. 어쨌든 숏컷과 탈코는 비동일성 관계이다. 논리적으로 숏컷과 탈코는 무관하다. 숏컷을 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탈코를 한 것은 아니며, 숏컷을 하지 않고 탈코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탈코를 하였다고 반드시 숏컷을 할 이유는 없으며, 탈코를 하지 않고 숏컷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적인 관점에서 탈코는 숏컷을 부분적으로 함축하고 숏컷은 탈코를 부분적으로 함축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둘은 동치의 관계를 형성하지 아니한다.
나는 남성의 큰 근육을 선호하는 여성을 성적 타깃으로 하여 그 동인으로 운동을 한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큰 근육은 사회적 코르셋인가? 그럴 수 있다. 물론 내가, 큰 근육을 얻어야 하는 남성의 고통을, 감수될 필요가 없는 고통이라고 비판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여성의 사회적 코르셋에 대한 항거가 비순응에 의한 사회성 결여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이 코르셋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저항은 그들의 이익 추구일 뿐이다. 추인은 미인의 기준을 낮춰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고 할 것이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러한 발악은 발생한다. 이들이 느끼는 불합리함은, 애초에 우리가 열등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내 신장은 정확하게 대한민국 평균이다. 그래서 나는 성적 가치가 우월한 장신을 대하면 상대적으로 열등해진다. 장신이 단신에 비해 성적 가치가 우월하다는 사실과 평가는 후천적인 코르셋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물론 상황 중심적으로 사고하여야 한다. 큰 키가 생존에 유리하거나 원시적 성적 매력을 더 잘 끄는 상황과 환경에서는 장신의 요소가 우월할 수밖에 없다. 반면 작은 키가 번식이나 생존, 성적 매력을 더 잘 끄는 상황이나 가능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단지 '지금' 우리의 세계가 그렇지 않을 뿐이다.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복잡하고 거대하다. 바꾸려면 엄청난 힘과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의 저항이 성공하여 사회적 디폴트가 모호해지거나 중립적이게 되길 빈다. 그러면 현재 기준에서의 열등 인자도 그때에 가면 더 이상 열등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희박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쨌든 건투를 빈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지적 구두쇠 (0) | 2021.12.05 |
---|---|
내 그럴 줄 알았다 (0) | 2021.12.05 |
탈코르셋 (0) | 2021.11.22 |
탈 가부장제 (디폴트 운동) (0) | 2021.11.22 |
페미니스트의 피해망상 (0) | 2021.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