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싸움 났을 때 올바른 대처란?

2021. 11. 17. 14:36생각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짐을 싸던 필자는 모母와 마찰을 빚게 된다. 그 발단은 어찌 보면 굉장히 사소해 보이는 사건으로부터이다. 필자는 그릇을 두 개 가져갈 것을 주장했고, 필자의 모는 4개를 더하여 총 6개를 가져갈 것을 필자에게 주문했다. 필자는 사실 두 개도 많다며 6개는 반드시 짐이 될 것이라고 반론하였고, 모는, 지금 챙겨주는 것은 자취하는 데에 '기본'이라며 모두 가져갈 것을 강하게 어필했다. 이때, 누구의 권리가 더 우선하여 받아들여질 만한가?

대강의 사건은 위와 같고, 각각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의 입장

1. 자취하는 데에 일정량의 그릇은 기본으로 갖춰져야 한다.

2. 밥 먹을 때 최소한의 격식이라는 게 있다. 즉 모가 주장하는 그릇의 개수는 최소한의 격식을 보장하며, 필자가 주장하는 그릇의 개수는 격식이 없다.

3. 자식이 자취하는데 그릇이 몇 개 없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4. 다 자식을 위한 것이다.

필자의 입장

1. 규격화된 기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생활방식의 기본은 말 그대로 개인 귀속적인 것이다. 일반적인 생활방식이라는 규범은 적어도 개인에 해당하는 한 고려할 필요가 없다.

2. 여럿이 아닌 혼자만의 격식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개인 귀속적이다. 즉 본인의 격식은 본인이 정한다.

3.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요즘엔 타인의 생활 방식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이 민폐로 여겨진다.

4.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자식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는 자신의 행동이 자식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모의 입장을 필자의 입장으로 대강 반박하였지만 더 자세하게 다뤄보도록 하자. 일정량의 개수의 그릇이 누군가의 식사 시에 갖춰져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처사다. 물론 모는 반드시 6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분명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 정도는 필요하겠다 싶은 적정한 개수였으리라. 어쨌든 그렇다고 한다면, 왜 5~6개에 비해 2개는 비난받을 만한 개수인가? 설령 그릇 두 개가 적당하지 않은 개수라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부적당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물론 필자는 필자의 모에게 그러한 열린 사고를 기대하지 않는다. 뭐 어찌 되었든 필자에게 그릇 두 개란 개인적으로 적당한 개수에 해당하며 6개는 과도한 개수에 해당한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하는 것은 필요한 만큼의 대화를 매우 소모적이며 의미가 없는 격쟁으로 이끌 우려가 높다.

단지 내리사랑, 부모의 도리 따위의 미명으로 자식의 자율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부조리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만약 진정한 사랑이, 사랑의 출발자보다 도착자에 치중되어야 한다면 도착자의 진정한 욕구에 의존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고려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물론 마약을 강하게 욕구하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옳은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도착자의 욕구는 진정으로 도착자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한 작업은 지난하며, 따라서 그러한 작업이 가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도착자의 욕구가 오직 개인에게만 귀속되는 것임을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취급해야 한다. 가령 위 사건과 같이 오직 필자의 생활 방식에만 귀속되는 기호 행위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필자의 선택은 그 누구에게도 금전적, 물리적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모로 하여금 정신적 손상을 입힐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손상은 허구적인 것이므로 잘못된 고려 대상이다. 더 자세한 건 뒤에서 논하도록 한다.

그러면 이 경우, 모의 주장이 받아들일 만한가, 필자의 주장이 더 받아들일 만한가? 이에 필자는 주관적인 규준을 설정하고자 한다. 권리의 우선을 논함에 있어, 전통적이고 가변적인 규범은 되도록 배제하도록 하겠다. 즉 나이, 부모 자식 관계, 성별 따위의 통념은 고려하지 않겠다. 가령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에 우선한다는 것은 우연적인 나이의 선점이 우연히 늦게 태어난 연소자를 우선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다지 합당한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연소자는 연장자에 비해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배려될 수 있다. 끼워 맞추기다.

생명을 준 부모로서 자식의 일에 관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마찬가지로 생명을 강제로 부여한 부모에 대항하는 자식의 권리로써, 부모는 자식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반격할 수 있다. 물론 부모는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양육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반강제적으로 양육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헌신이 자식의 사생활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간섭을 허용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다.

전통을 배격했으니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겠다. 우선 두 대치 세력 중 물리적이고 금전적이고 정신적인 피해가 덜한 쪽의 권리를 우선하도록 한다. 이 사건의 경우는 서로의 물리적이고 금전적인 피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정신적인 피해가 존재한다. 서로의 정신적 피해의 정도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므로 이 경우에를 대비해 새로운 조건을 도입해야 한다. 각자가 주장하는 정신적 피해의 내용이 실제와 덜 연관을 맺을수록 권리 존중을 우선하지 않도록 한다. 가령 母가 주장하는 정신적 피해는 필자가 그릇을 2개만 가져감으로써 얻을 실질적인 피해와 동치이다. 그런데 실제로 필자는 그릇 2개로부터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애초에 재작년 자취 때에는 그릇 1개로 1년을 생활했다.). 그러므로 母의 정신적 고통은 허상이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어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