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6. 13:15ㆍ생각
난 성공에 대한 막연한 희원과 현실에의 자포자기적 안주를 병립적으로 취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성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본주의적 성공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 만족스러울 정도의 성공을 원한다. 그 기준은 매번 달라지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일정 부분 경제적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또 남한테 받는 인정 역시 성공의 부분적인 조건이기도 하며, 그 조건은 높은 확률로 경제적 자유에 다가서게 해줌에 틀림이 없다. 인정은 소비로 이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누군가에게 많이 소비될수록 성공에, 아니 경제적 자유에 가까워질 확률이 높아질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내 성공의 큰 부분이 경제적 자유에 있다면, 내가 무턱대고 남에게 쓰임 받는다고 해서 그러한 경제적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단순히 공사판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그래서 단지 힘 좋고 쓸만한 잡부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나는 적어도 경제적 성공에 가까워지는 삶을 사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어 선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적 자유에 근접하기 어려운 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경제적 성공에 가까워지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제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까?
먼저 이것을 생각해 보자. 돈을 버는 분야, 즉 경제적 자유에 특화된 분야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가령, 축구 선수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 그러니까 경제적 자유에 도달하기 용이한 직업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지 '축구 선수'라는 조건만으로는, 그것으로부터 인한 어떠한, 얼마만큼의 가치 창출이 있는지 예단하기 어렵다. 즉, 축구 선수 그 자체는 성공에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메시와 동네 축구를 비교해 보라. 축구 선수가 성공에 근접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동네 축구 에이스 역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성공에 근접하는 중이라고 봐야 한다.
문제는, 설령 그 필요조건 관계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성공 도달에의 간과할 수 없는 부가 조건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바로 시간이다. 다른 조건과 변수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많은 이들이 성공 조건을 만족시키는 시간을 벌지 못하여 성공에 도달하지 못한다. 사실 글은 어제 친구를 만나 무가치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느낀 허망감으로부터 쓰는 것이다.
이 글의 발단이 되는 어제 사건을 언급하겠다. 나와 성향이 매우 다른 친구와의 7시간 정도의 만남을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채워 넣었다는 찝찝함과 낭비감을 느낀 사건인데, 오랜 경험 데이터에 따르면 난 이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친구와의 만남에서는 주로 공통된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친구의 관심사에 편중되어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나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선택의 주체자로서, 상황의 주도권을 회수하거나 애초에 이런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어야 현명하다. 그러나 나는 매번 현명하지 못한 결단을 내린다. 그에 대한 형벌로, 무관심하고 쓸 데 없는 정보의 폭격을 맞는다. 이는 적어도 내 개인적인 성공에 도움이 덜 된다고 판단된다. 물론, 그 친구가 성공을 하면 그 친분에 따라 나에게 어떠한 영향이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말을 했듯이, 그것이 내 분야에서의 개인적인 성공에 대한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것 또한 마냥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교수가 되려는데, 그 친구가 대학 총장이라면 쌓였던 친분에 의해 내 개인적인 학적 실력을 초월한 성공을 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매 순간순간을 기회의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는 자세는 물론 좋다. 그러나 친구의 성공은 내 실력을 향상시키지 않는다. 실력이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은 물론 아니다. 내가 웹 소설 작가가 되었다고 하자. 실력도 부족하고 별다른 반응도 없다. 그런데 친구가 전혀 다른 분야, 가령 유명 가수가 되었다고 하자. 그의 입김은 세다. 그가 미디어에서 나의 웹 소설을 언급한다면 나는 그 영향력으로 관심을 얻어 성공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떠한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게 만든다. 적어도 실력 그 자체로 성공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말이다.
아무튼 순전히 실력 향상에 대한 성과만을 단순히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배척되어야 하는 태도다. '이 시간이면 이걸 하는데', '이 돈이었으면 이걸 할 수 있었는데' 따위의 환산을 많이 하곤 한다. 그래서 매번 내 선택에 민감하다.
어제 일할 때 신는 신발을 시장에서 하나 구매했다. 만 오천 원이다. 바닥이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사야 했다. 그런데 그 신발이 물기가 있는 타일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을지 확인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것보다 더 미끄러지지 않을 것 같은 2만 원짜리 신발을 포기한 선택인 것 같아 환불하고 다시 선택을 할지 엄청난 숙고를 하였다. 결국 기존의 선택을 고수했다. 만약 내가 선택을 바꿔 2만 원짜리 신발로 교환하였다면 난 손해를 덜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2만 원짜리 신발을 실전에서 착용하여 실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실행 이전에는 그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하다. 만 오천 원짜리 신발로 충분할 수도 있고, 그것이 부적격으로 판정되어 다시 이만 원짜리 신발을 사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만 오천 원을 손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단돈 만 오천 원으로 얻은 깨달음이라서, 물론 짠돌이 심보에 따르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인생에서 양자의 선택 상황이 있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둘 다 선택하거나 둘 다 포기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적어도 하나의 선택은 반드시 해야 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맞는 선택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우리는 최소 한 번의 선택은 필요로 한다. 내 신발 구매 경험과 마찬가지로, 만 오천 원짜리 신발을 선택하거나 이만 원짜리 신발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서 현장에서 직접 실험을 하여 성능을 확인해야 한다. 물론 간접적으로 그 재질에 따른 데이터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정보다 당시에는 없었다. 돈이나 시간이 얼마 들지 않는 이와 같은 경우에는 두 선택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동시 선택은 내 삶에 그다지 손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한 선택은, 만 오천 원짜리 신발을 먼저 선택하여 착용해본 후에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면 이만 원짜리 선택지를 택하기로 한 결정이다. 이것은 별 손해가 없을 만큼의 미미한 선택들의 결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으로 시야를 확장하면 얘기는 다르다.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대학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고3 학생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놓인다. '도대체 어떤 과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가?' 각 학문에 대한 대강의 데이터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마냥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체대 입시 준비를 7개월 여간 하다가 포기를 하고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 철학과는 1년 반 만에 중퇴하였다. 내가 체대에 갔으면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군대놀이가 있었다면 내 성격에 더 일찍 추노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한 번 한 선택을 뒤집기에 굉장한 비용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선택과 포기에 따르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본인의 선택의 우회에 대한 돈, 시간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어떤 알바를 할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어떤 알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앞으로의 굉장히 많은 요건이 그에 맞게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요식업에 이동 시간 포함하여 9시간여를 투입하다 보니, 그로 인하여 얻거나 잃게 되는 것이 많고 그것은 그 일에 대한 내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다. 만약 스트레스와 시간 소모가 덜한 알바를 했더라면 나는 그 알바를 오래 했을지도, 일에 대한 만족감으로부터 절약한 의지력을 통해 미래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쩌면 지금 일이 힘들기에 내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숙고하게 된 것도 도움이라면 도움이다. 잘 한 선택이라면 잘 한 선택이다. 편한 일을 시작했다가 그냥저냥 현실에 안주해버렸더라면 결과적으로는 악수인 것이 아닌가.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는 결과가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즉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그것으로부터 기인한 결과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순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 시간 넘게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나의 선택은 올바른가? 그 올바름은 무엇으로부터 부여받는가? 단지 나의 지금의 만족감에 의존하는가, 미래의 잠재적인 결과에 의존하는가? 이 작문 노력 하나하나가 쌓여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 막연한 기대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그런 평가는 그 평가자의 상황이나 조건 나름이다. 나는 지금 나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글을 쓰지 않고 대충 유튜브로 시간을 때우는 것과 비교한다면, 나는 작문이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겠다. 그러나 마침 그 글을 쓸 당시에 볼 수밖에 없었던 어떤 유튜브 영상에 의해서 내 성공에의 도달이 보장될 수 있었다면, 그러한 반사실적 가정이 기정사실로의 지위를 확립 받을 때에야 비로소 내 작문 행위가 그 당시의 유튜브 시청에 비해 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잠재적인 기회비용을 어느 누가 파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가정을 배제하고 지금 눈앞에 놓인 작은 성과의 누적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
제목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하지 않겠다. 나는 이번 생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을 가끔 느낀다. 그런데 도대체 그 성공이 어떤 양태를 띠길래, 그것으로부터 이토록 큰 불안과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가? 비합리적이다. 왜 나는 지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가? 당연히 욕심과 비교, 그리고 절대적인 현실의 비루함 때문이다. 비루함의 척도가, 기본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돈이라면, 적어도 나는 백수이고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비루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을 일면 해소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이 천차만별인 것을 떠나 내 인생에 대한 내가 규정한 성공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그 규정이 외부적인 척도로부터 기인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그 성공에의 미도달로부터의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다. 이제 좀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에 대한 만족감을 포향飽享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현재의 처지에서 탈피해야만 행복해지는가? 난 왜 그렇게도 불안감을 느낄까? 어떠한 기준의 성공이 내 인생에 없더라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것이 현실적 한계에 의해 반강제로 포기되어 수정된 생각에 기인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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