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면

2021. 11. 16. 13:14생각

"퇴사 5개월 차... 퇴사 전 공황장애, 이유 없는 복통으로 응급실 행, 심장이 벌렁벌렁, 회사만 가면 식은땀이 줄줄, 이유 없이 눈물이 나서 벤치에 앉아서 엉엉 움, 주말에 집 밖에 안 나가고 침대에서만 24시간을 누워있음. 아 안 되겠다... 싶어서 퇴사함. 지금 드는 생각은... 그렇게 아플 정도로 왜 버텼나 싶음."

"출근길이 지옥으로 가는 느낌일 때. 차라리 사고가 나서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느껴질 때."

"먼저 회사의 모든 게 역겨워 보임. 그리고 주는 것도 받기 싫음. 그 사람들 길 가다가 보기도 싫음."

"언제 화낼지 모르는 사람이랑 일하는 거 존나 힘들어 하..."

"온몸의 세포들이 거부하고 있다. 이 시점은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아침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회사 주차장에서 내리기 전 울음을 꾹 참습니다. 도망치고 싶지만 그것도 못 참고 그만두냐는 말이 너무 듣기 싫습니다. 업무 특성상 성향이 맞지 않는 상사와 평생 일해야 합니다. 미래가 너무 불행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울해지네요. 살은 벌써 6kg이 빠졌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퇴사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거는 모를 수가 없는데... 내가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고 뭔가 내부의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아 버틸 수는 있는데 좀 더 가면 내가 진짜 큰일 날 것 같은데... 하면서 시한폭탄처럼 똑딱거리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사는 것보다 죽음을 더 생각하고요. 그땐 결정할 시기입니다. 정말로...."

"퇴사한다고 사직서 내는 순간 남보다 못한 적이 됩니다. 후임자를 직접 뽑아놓고 나가라는 둥, 인수인계 안 하고 나가면 고소를 하네 마네 그렇게 살지 말라느니..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 동안은 시달릴 것 생각하면 벌써 우울하고 힘들어요."

"그만둬야 하는 걸 아는데 대안이 없어서..."

- 유튜브 댓글 中

나는 지금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출근까지 5시간여를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다. 그전까지, 이 글로 생각을 정리한 후에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만약 퇴사를 하기로 결정한다면, 다음 주까지만 일을 하겠다고 통보할 것이고, 그러지 아니하기로 결정한다면 조금 더 참고 다니기로 하겠다. 사실 지금 심적으로 힘든 상태라,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가용성 편향적인 사고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 사안을 진단하리라. 그런데, 나는 왜 나라는 주체를 위한 선택을 함에 있어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댈까? 정말 그것은 맞는 행동일까? 이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한 듯이 보이며, 어쨌든 이 글이,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고통을 받는 여러 직장인이나 여타 자영업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에게 해결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같은 처지에 놓인 심적 동료로서 위안을 받는 계기라도 되었으면 한다.

위의 유튜브 댓글을 보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아니, 도대체 우리는 평생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 평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왜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아무리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라도 어느 시점에는 스트레스나 권태 따위의 고통이나 난관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통계를 보건, 어떤 반응을 보건 간에 스트레스 없는 노동자가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당장 나 역시, 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퇴사와 관련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댓글 창에 나보다 훨씬 심각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구성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대학교 선배는 얼마 전에 퇴사를 하고 지금 이직 준비 중에 있더라. 5년여를 한 중소기업에 몸을 담았는데, 높은 업무 강도와 잦은 야근에 매일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더라.

사실 나는 정확하게 따지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생이다. 즉, 퇴사나 이직 따위를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는 철새 상황에 놓였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진지한 고민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선택해 온, 그리고 앞으로 겪을 모든 의사 선택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가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거나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수험 생활과 장기 백수 생활로 젊음의 대부분을 인간관계없이 집에서 보내다가 올해로 28세를 맞았다. 잦은 실패와 적은 사회 경험으로 인해 여러 사회적 고난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과 회복력이 낮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실히 들어맞았다. 물론 그러한 유약한 캐릭터의 이미지를 스스로 구축하여 회피 기제를 합리적으로 발동시키려는 핑계와도 같은 대안을 확보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확증 편향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적은 인간관계 경험 때문이야"라고 말이다. 사실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인간관계로부터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가 적은 인간관계 때문이라면, 어쩌면 많은 인간관계로 그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함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늘리는 그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주지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는 이 역설. 나는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품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끝내 거부하고 회피할 때가 많았다.

그러한 회피는 나를 더 안으로 움츠러들게 했다. 재작년 첫 독립 때, 비교적 일은 무난하게 했다. 그 당시에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고, 관계적 스트레스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 일로부터 기대되는 미래적 가치는 현저하게 적었다. 아르바이트에 여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낭비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내 성향에 맞게 성장시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1년을 적당한 마인드로 보내고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집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공부를 아예 포기하게 될 전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공부에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다른 일에 도전할 것을 다짐하고 독립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즈음 코로나가 발발하고, 부모님의 만류를 포함한 안일한 나의 태도로 인해 1년을 집에서 다시 백수로 지내게 된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은 꽤나 많은 글이 쌓였지만, 상업적인 의도로 쓰거나 마케팅적 기법이 있는 글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큰 반응은 없다. 물론 글 자체의 저질성이나 불가 몰입성에 그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초반에는 작문이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내공이 쌓이니 이제는 읽기 보다 쓰는 것이 훨씬 부담이 덜한 경지에 이르렀다. 즉, 쓰기에 대한 스트레스 저항력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최근 소설에 관심이 생겨 습작을 몇 편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에 대하여. 나는 그다지 잘 하는 게 없고, 고졸에 사회 경험도 엄청 적고, 금융 지식도 전무하고 하여튼 정말 비루한 인생을 향유하던 중이었다. 뭔가 잘 하는 게 생기면 그때 길이 보이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별다른 노력도 없이 유한의 생을 허비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독립을 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후에, 나라는 존재의 인생의 향로를 이제는 어느 정도는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얻었다. 난 지금껏 확실성을 노래했다. "에이 이건 아니야", "이건 잘 못해", "이건 좋아하는 일이 아니야", "이건 전망이 좋지 않아" 하면서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고 결정을 미루는 날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생각의 과정' 그 자체가 어쩌면 내 길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는 이유는, 그 진지한 숙고가 비록 직접 경험은 배제하지만 사유를 풍요롭게 하고, 고통스러운 고민을 수반하여 어떤 의미로든 나의 내실을 다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만약 이것이 가용한 대안이라면, 그러니까 지금 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일거에 말소할 수 있는 현격한 회피 사유라면, 그런 회피는 수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하는 일로부터 자아실현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단순히 거수기와도 같은 반복적이고 사유와 자유, 수동성이 없는 삶에 매몰된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 나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생계 문제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자본과 지금까지 일한 것에 대한 보수, 미래에 내가 선택한 일로 얻을 기대 수익 등을 따져 보면 당장의 퇴사로 인해 그리 심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설령 당장의 생계의 위협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되더라도, 현재의 고통을 상계하는 비용의 지불로 여기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현재 느끼고, 그리고 앞으로 느낄 직장 생활의 고통을 일거에 없앨 수 있는 데에 비용을 지불한다면 당신은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 월급의 절반으로 현재의 고통을 상쇄할 수 있다면 그 교환은 합리적인가? 일단 나는 그렇다고 여겼다. 만약 최저 시급의 반만 받아도 마음 편하게, 자아실현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좋은 대안이다, 내겐. 단지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나는 지금의 일을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일 자체의 노동 강도나 객관성을 떠나서 아주 심각하게 고려할 만한 사안이다. 남들 다 잘 하는데 왜 너만 못하냐는 지적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객관성 지표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일이 숙련된다면 충분히 남들의 경지만큼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의 고통도 시간의 누적이 상쇄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있다. 허나 '왜 나는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지금의 고통을 인내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가 인정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고통을 나 자신을 죽여가면서까지 견뎌낼 필요가 없다면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겨울을 견디면 반드시 봄이 온다고 마냥 기대하는 태도는, 결과 의존성에 의해 어리석은 결정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이 사계절이 없는 혹독한 시베리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잘 판단해야 한다. 또는 사계절이 뚜렷한 것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순환성에 의해, 시련이 언제고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버텨야 한다. 즉 내가 하는 이 일이 현재 혹독한 시련의 겨울의 상황이라면, 비록 일의 숙련이나 인간관계의 진전의 관점에서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반면, 그와 반대로 더 한파를 맞을 수도 있음을 항상 가능성의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의 숙련도는 웬만하면 퇴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확률적으로 낫다면, 인간관계는 좀 변수가 큰 영역이다. 내 일의 숙련도와 관계없이 인간관계는 악화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걸 떠나, 일의 숙련도가 내 커리어나 인생의 방향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그 일에 매달릴 이유가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좀 더 심도 있는 합리성 분석에 돌입하도록 해보자.

1. 지금 이 일을 참고 계속 더 한다.

vs

2. 가차 없이 퇴사

어떤 걸 선택하든 기회비용을 따져야 한다. 고려해야 할 조건이 매우 매우 많다. 시점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더욱 까다롭고, 애매하고, 애초에 합리적인 결정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만약 1을 선택한다면 그 일을 지속함으로써 얻는 돈, 기회, 성장 가능성, 인간관계, 경험, 노하우, 인내심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택함으로써 얻는 이익에 비해 적다고 판단된다면 가차 없이 2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에 몇 가지 조건의 규약이 필요해 보인다. 성장 가능성, 성향, 인간관계, 현재의 심적 고통이 그것이다. 먼저 이 일이 성장 가능성이 있거나 적어도 높은 확률로 기대되는 일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일이 나의 성향과 합치하는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가령,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인 나의 스타일과 맞지 않게, 동료나 상사를 계속 마주해야 하는 스트레스로부터 오는 압박을 견뎌야 해서 업무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거나, 일 자체로부터 자아실현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회의감이 드는 경우, 권태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겠는 등의 경우에 우리는 그때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각지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현재 인간관계가 좋지 않거나 진전이 되기 어렵다고 기대되는 것을 떠나, 애초에 인간관계가 잘 맞지 않는지 따져봐야 한다. 불가피하게 인간관계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만, 내가 조절하여 인간관계를 줄이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가거나, 적어도 그런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면 과감하게 그 스트레스를 쳐내는 결단을 해야 한다. 가령 나 같은 경우, 만약 글을 쓰는 일을 선택하게 된다면, 적어도 면전에서 얼굴 붉히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나 스스로가 조성하는 것이 된다. 이는 불편한 인간관계를 극도로 기피하는 나에게 매우 합리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다행히 그에 대한 명분은 충분히 조성이 된 상태이고 나는 이제 결단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현재의 심적 고통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심적 고통을 조금만 견디면 기대되는 좋은 미래가 보장이 되었다면, 적어도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면 현재의 고통은 감내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예단은 불가능한 것이고, 더군다나 일로부터 오는 현재의 고통이 극심하여 자기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는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나에게 퇴사를 종용하는 강력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위의 댓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는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다. 나 역시 일을 시작하고 난 뒤에 매일매일 일에 대한 스트레스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 일단 여러 조건이 내 성향에 매우 맞지 않는다. 왜 도대체 난 일부러,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단지 단점을 극복해 내겠다는 의지로 이 선택을 한 것인지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든다. 물론 이런 생각 역시 결과에 의존적인 것이라서, 만약 현재 혹은 나중에, 일로 인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지금의 고통은 무시될 만한 한 줌의 해프닝적 편린으로 사그러져 갈 것이지 않겠는가.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기도 하거니와, 현재 수준의 고통 감내력으로는 더 이상 기대하며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적어도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어쩌면 회복 불가능의 상황에 처할지도 모를 미래의 자기 파괴적 결말을 목도하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오직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사업장은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간다. 물론 비교적 힘든 일이라 아르바이트생들의 추노 현상이 잦아 골머리를 앓고 있음이 확인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 한하여, 내 알 바가 아니다. 내가 무너지면 이 고통의 회복 가능성이 완전히 소실되는 것이다. 나는 그 행복에의 가능성을 맞지 못하고 무너져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업장이 수월히 운영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법인이라는 다소 역설적인, 비인격적인 인격의 삐걱거림으로 휘청일 뿐이지만, 나라는 한 주체의 정체성 말살은, 남에게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내가 죽으면 내 세계는 없다. 그러나 타인의 세계는 내가 없어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죽여가며 타인의 세계를 존중해 줘야 하는가? 정도가 있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 살아도,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심대한 피해를 안기지 않는 한, 괜찮다. 이건 자기합리화인가? 자기합리화여도 괜찮다. 일단 살고 보자. 섬약한 내 멘탈을 인정하자. 정말 회피 기제를 최극단으로 발현시키는구나!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물론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내 성향에 들어맞을 것 같은 일에 도전하자. 물론 이는 꼭 적절한 판단은 아니다. 상황이 따라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재작년에 했던 아르바이트와 지금 하는 알바는 그 유형이 꽤나 유사하다. 하지만 둘의 상황이 꽤나 다르다. 일단 재작년에 했던 알바는 관계적으로 매우 좋았다. 직원 단톡이 있고, 일을 함에 있어 나름의 여유와 교류도 있었다. 일이 그렇게 고되지 않았고, 상사의 개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업장의 위치나 규모상 고객이 적었고, 정해진 분량의 내 일만 끝내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일은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분명 업종은 유사한 것이지만, 하는 일이 모객을 하면서 여러 업무를 숙지해야 하며, 상사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일은 숙련되지도 않았지, 계속 옆에서 뭐라고 하지, 능동적으로 하면, 왜 남의 일에 개입하냐고 핀잔먹고, 그렇다고 나 할 것만 하면 다른 것도 좀 보면서 해야지 왜 그것만 붙들고 있냐고 지랄하고 하여튼 그간 짧은 기간 동안 1년 치 받을 스트레스는 다 받은 것 같다. 물론 이는 나의 원체 유약한 멘탈, 과잉 해석, 미움받을 용기 없음 등의 이유와 여러 조건이 조합된 결과이리라.

지금도, 글을 쓰면서도 일하러 갈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있자면 심장이 너무 떨린다. 숨이 가빠진다. 덩치는 조선만한데 멘탈이나 하는 짓은 왜 이렇게 소심한지 모르겠다. 성격 문제가 클 것이다. 자라온 환경이 너무 안락했나? 회피 성향이 너무 잘 발달됐다. 나는 위의 댓글을 쓴 사람들처럼 그런 정도까지 자신을 벼랑 끝에 내몰 정도로 인내심을 갖지 않았다. 어찌 보면 본능에 충실하는 현명한 생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적어도 이제부터는,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을 택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 하는 일은 내가 언제까지고 감내할 고통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최선과 차악의 협응으로 최적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나에게 최적의 선택은 무엇인가? 최적의 선택을 위해서는 최선과 차악이 아닌 경우는 배제되어야 하므로, 현재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이 일에 대한 고통을 완전하게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일을 강제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금의 선택이, 어쩔 수 없이 하게 될지 모를 미래의 그때를 대비해서, 단지 지금 연습의 일환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며, 이것만큼 결과 의존적인 삶,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내 약함을 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난 멘탈이 약하다. 과거의 여러 인간관계로부터 교육됐다. 나는 인간관계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것에 그리 의존적이지도, 미련이 있지도, 그것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지도 않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희망적이다. 나는 좋은 인간관계는 좋아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이게끔 세상이 그렇게 구성된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원하고 싶은 것만 원하는, 그런 만족스러운 삶이 그리 문제라고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당연히 여러 관점에 따라 그렇지 않아야 할 때가 있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통해서 만족하면서 잘 살 수 있고, 최대한 내 의지에 맞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나는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삶을 택하겠다. 확실히 이러한 심적으로 힘든 사건이 정서적인 풍족감을 포향하게 하긴 한다. 일 시작하고 계속 이런 풍족한 정서 산물이 쏟아지는 것 보면 결과적으로 일의 스트레스를 내 감수성, 깨달음과 교환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과 2를 다시 보자. 1은 당장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러나 이는 다른 대안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니까 이 일 외의 다른 대안이 있다면 이 일을 굳이 이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대안이 없지 않다. 일을 그만둔다고 당장 생계에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둠으로써 오는 것은, 일로 인한 고통의 해소와 내 진정한 가치에 더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 그리고 업장에 대한 미안함이 남는 것뿐이다. 사실 이 미안함,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받을 멸시가 이 일을 지속하게 만들긴 한다. 그렇다는 것은 타인의 그 예상되는 모멸감, 또는 나 혼자의 망상일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비난과 조롱이 지금 내가 겪는 심적 고통보다 크다는 얘긴가? 이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나의 정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남에게 일시적이거나 혹은 영구히 지속될지 모르는 멸시를, 아니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설령 있더라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그러한 걱정이 왜 내 현명한 결정을 억압하도록 놔둬야 하는가? 그냥 욕먹더라도 시원하게 한 번 먹고, 깔끔하게 그 집단에서 빠져나와 내 자유를 구가하면 되지 않은가.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이 집단의 문제는 심리적 고립감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집단 자체가 그렇다기보다는, 나의 나이, 성격, 대인관계 능력, 업무 숙련도 등을 포함하여 그러한 조건들이 이 업장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친해지고 싶다는 어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그들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것으로 발현되어 일할 때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독함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미 친한 무리끼리만 소통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일의 중도 이탈률이 많아 신규 직원에게 그다지 정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내 낮은 친화력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스케줄 매니저랑만 소통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1을 통해서 내 스트레스 인내력(저항력)을 단련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임계치를 넘어 자기 파괴에 이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2를 숙고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이다. 가령 현재 감내하고 있는 스트레스가, 내가 수용 가능한 스트레스의 역치를 초과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거나 버티면 그 스트레스가 감쇄될 것이 분명하거나 예상된다면 나는 섣부를 결단을 미루고 조금 더 기다릴 필요도 있다. 이는 스트레스 수용치를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예상되는 위험 부담에 비해 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스트레스를 견뎌서 종국적으로 얻을, 기대되는 스트레스 인내 용적량 증가치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을 떠나서, 도대체 그것이 어디에 도움이 될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 2의 선택을 그다지 꺼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2에 맞게 해석하는 확증편향인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더 견디면 회복 불능의 심각한 내상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즉 조금만 더 견디고 견뎌서 얻을 이익이 더 큰지, 그 인내의 축적으로 인한 손상의 불이익이 더 큰지 지금 상황에서는 알기 어려운데, 적어도 내 온몸이 적극적이고 악착같이 그 회사와 일,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꺼린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게 처신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많은 이들에게 쉬운 일이라면 내 문제라고 보는 편이 낫다.

경력의 퀀텀 점프나 축적 같은 성장이나 전환 국면을 맞이할 확률이 높은지 따져봐야 한다. 이것 역시 정확하겐 알 수 없더라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확률적 예측치는, 지금 내 나이에, 이 직장에서, 이 일을 하면서, 이 마음가짐과 멘탈로, 이 관계로, 이 직무 수행 능력으로, 설령 그 부족함이 미래에는 성장세를 탄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버티거나 견딜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빨리 미련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낫겠다.

더 버텨서 보장이 되는 것이 돈 말고 더 있는가? 물론 찾아보면 얻을 것은 많다. 그러나 나에게 맞게, 내 미래 구상에 맞게, 성향, 성격, 가치관 등에 맞게, 내 마음의 안정에 맞게 더 보장될 것이 있는가? 이 일로 인하여, 돈 말고도 배우고 얻을 것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러니까 이 일이 다른 일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이 일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일이 다른 일과 다를 바 없다면, 다른 일 역시 이 일과 유사하게 스트레스를 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꼭 그런 추론을 할 필욘 없다. 어느 점에서 유사한지에 대한 비교가 애매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 스트레스는 덜 받으면서 인간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생은 고통을 더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고통은 존재에 수반하므로 내 존재는 고통을 떼어놓기 어렵다. 물론 고통의 발현과 그것이 존재 자체에 수반되는 문제는 좀 다르다. 평생 고통이 발현되지 아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존재 없는 고통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고통이 있다면 반드시 존재는 있다. 고통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난 그 숙명을 거부하는, 적어도 즐기거나 감내할 수 있는 긍정적 고통을 맞이하는 삶을 살겠다. 주도적으로 살겠다. 결정을 미루지 않겠다. 고통을 묵과하지 않겠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두 시간의 숙고가 결과적으로 반드시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부족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전부터 항상 고뇌해 왔다는 점, 심각한 내상을 앓아왔다는 점, 이 일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도, 기대도 없다는 점, 이 일이 내 미래, 정신 건강 따위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 당장 그만둬도 당장의 금전적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대안이 많다는 점, 일을 그만둠으로써 기대되는 정신적 안정이 일을 지속함으로써 얻을 예상되는 잠재 이익을 월등히 상회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 그 간의 업무만으로도 배운 점과 얻어 가는 경험이 상당하였다는 점, 적어도 그 고통을 통해 깨달은 것이 매우 많다는 점, 감사하게도 이 고뇌의 계기를 통해 앞으로의 나의 향로를 어느 정도는 분명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고객이 많으면 그에 따른 직원의 고통이 압도적으로 수반되는 것을 몸소 체득한 점, 내 성향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내 한계가 어디인지 시험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 있을 퇴사 통보에 대한 비난의 시선을 온몸으로 맞을 기회를 제공해 준 점, 나 자신이 상대와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과잉 해석을 하는지 깨닫게 해준 점, 오늘의 이 경험이 앞으로 올바르고 더 나은 선택을 하라는 격려가 되었다는 점, 적어도 나는 나를 완전히 패괴하는 지경까지 몰고 가기 전에 합리적인 결단으로 그 고통의 고리를 끊을 주도성은 있다는 점, 설령 그것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회피 기제로서 발동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자책보다는 현재의 생존이 더 우선된다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은 점, 덕분에 이러한 양질의 숙고를 할 수 있게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 점, 당장 그만두지 않음으로써, 앞으로의 잔여 근무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며 심적 변화가 있을지 기대가 된다는 점, 무엇보다 이 고통을 더 오래 끌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근무 종료 후, 업장을 나가면서 느낄 그 해방감을 더 빨리 기대할 수 있다는 점, 그 해방감의 극대화를 위해 더 끌 필요가 없이 지금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 점 (생각이 나면 더 추가될 것) 등에 이유에 의해 나의 오늘의 고뇌는 성공적이다.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인내하며 일을 하는 여러 노동자들이여. 난 비록 일시적일지도 모르지만, 주도적으로 자기 해방을 선언하는도다. 나중에 맞을 인고의 시간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자기에 대한 이해가 아직 완전히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설령 나에 대한 파악이 완전하게 외었을지라도, 이번에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중의 일이며, 그에 대한 대비를 완벽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그 대비가 지금의 이 일의 포기로 인하여, 어쩌면 중대한 재선택의 이 기로에서 처절하게 무산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간다. 일단 지금은 살고 보자. 나 약한 거 인정한다. 이 정도까지 왔으면 충분히 단련했다. 그렇게 믿는다. 군대 생활도 힘들었지만, 지금도 그만큼 정신적으로 고되다. 나이가 먹으면서 더 나약해진 것일까? 뭐가 되었든 일단 한 보 물러서서 재정비 후에 다시 도약을 꿈꾸도록 하자. 이 시대의 많은 고통 받는 이들이여. 파이팅! 부디 자기를 살리는 결단을 하기를. 나 먼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