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0. 18:49ㆍ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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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 사태와 시민독재에 관한 도덕철학적 의문점들: 여성혐오와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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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반대할 생각이라면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 만약 차별에 반대할 수 없는 어떤 경우가 반드시 존재한다면 이 대전제는 반박된다.
'여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를 (여 → ~차)라고 하자. 그의 부정은 ~(여 → ~차) ≡ (~여 → 차)이다. a와 ~a는 양립 불가능하다. 'a ∧ ~a'를 (여 → ~차)로 치환하면 '(여 → ~차) ∧ (~여 → 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양립 가능하다. '여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와 '여자가 아닌 것을 차별해선 안 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없다. 그러므로 치환된 연언식은 엄밀하게 a와 a의 자기부정을 다루는 식이 아니다. 그리고 a와 a의 반례를 다루는 식도 아니다. 만약 위의 조건문의 연언식을 양립 불가능하게 하려면, '(여 → ~차) ∧ (여 → 차)'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차별을 할 수 있는 경우가 가능함을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모든 차별 반대'가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차별에 대한 반대'에 (여 → ~차)와 (~여 → ~차)가 함축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 '모든 차별 반대'가 거짓일 수 있으려면 '어떤 차별 가능'이 가능해야 한다. 즉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 모두에 대한 차별 반대가 참이지만 여자에 대한 차별 가능이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가능하지 않은 역설적인 상황이다. 모든 차별 반대가 참이라면 어떤 차별 가능은 반드시 거짓이다. 하지만 어떤 차별 가능이 참이라면 모든 차별 반대는 반드시 거짓이다. 즉 우리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차별이 반드시 참인(허용되는) 경우를 제시한다면 모든 차별에 대해 반대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판단을 위해 현실의 개입은 필수이므로 '어떤 차별 가능'의 사례를 찾기는 쉬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순수하게 그 자체만으로 차별을 할 수 있는 대상이란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만약 암세포가 다른 생명에 비해 천하므로 차별되어야 한다면 해충 또한 익충에 비해 차별받을 수 있다. 이것은 해나 익이라는 외부적 조건이 개입했기 때문에 평가가 달라지는 것인데, 해충인 모기와 익충인 거미의 가치 판단을 제거하고 곤충 그 자체만을 따진다면 모두 차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차별 요소는 너무 가변적이므로 공정한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일관된 차별의 기준을 세울 수 없다. 아니 그런 것이 있지 않다. 후결적으로 기준을 설정하는 사후적 판단은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고 근본적이지도 않다. 차별에 반대할 수 없는 경우, 즉 '어떤 차별 가능'은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존재할 수 있지만 일관성 있는 기준에 의해 존립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차별 가능'은 '모든 차별 반대'에 대해 사례적으로 반론 가능하지만 일관성의 측면에서는 반론하기 어렵다.
이하는 D에 대한 반론
모든 차별은 일관된 차별과 비일관된 차별을 함축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면 일관된 차별과 비일관된 차별 모두 반대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가능세계에 인간의 모든 심리와 역사를 분석하여 최대한 건전하게 차별하는 차별 기계가 있다고 하자. 이 기계가 지정하는 대상의 차별 적합도에 대해 모든 인간의 99% 이상이 신뢰를 보인다. 애초에 차별 기계는 인간의 차별 적중도(만족도)가 99%가 넘을 것을 예상한 경우에만 차별 대상을 선택한다(이는 인간의 차별 밀집(실제로 99% 이상의 차별이 발생하는 결과)과 기계의 선택 간의 인과가 대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판단자 x는 오직 차별 기계가 차별 대상을 지정해 주는 경우에만 차별하며, x가 지정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 이루어지는 차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예를 들어 차별 기계는 다른 생명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차별받는 생명체인 암세포를 차별 대상으로 지정하며(실제로 인간의 99% 이상이 암세포를 차별(혐오) 하는지는 모르나 이 경우는 사고실험이므로 그렇다고 가정하자), x는 이에 따른다. x는 차별 기계라는 일관된 기준에 따라 차별을 할지 말지 선택한다. 만약 모든 차별을 금(반대)해야 한다면 x의 차별 또한 금해야 한다. 하지만 일관된 경우에 한하여 차별을 허용한다면 이는 모든 차별을 금해야('금함'과 '반대'의 의미가 다르지만 여기서는 둘을 유연하게 부정의 의미로 간주하자) 한다는 명제와 대치된다.
D의 의도는 '차별의' 비일관성도 비일관성이지만, 차별의 '반대에 대한' 비일관성에 대한 지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차별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주관적인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지 말고, 차별 지지든 차별 반대든 일관적으로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예시를 다시 보면, x는 차별 기계의 선택에 의해 차별을 할 때도 있고, 차별 기계가 지정하지 않은 차별의 대상ㅡ대중의 감정에 의해 임의적으로 설정된 차별 신뢰도가 낮은 대상ㅡ에 대해서는 차별에 반대할 때도 있게 된다. 즉 경우에 따라 합당한 근거 기준만 충족된다면,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중국인 혐오에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 가능세계에서의 차별 기계(차별의 합당한 근거)라는 기준이 우리 세계의 차별에 대한 합당한 어떤 근거와 대응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우리 세계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모든 차별 반대 행위에 대하여 비일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아예 모든 차별을 지지하기로 했다면 차별 기계가 지정한 차별 대상을 포함하여, 대중이 임의적으로 지정한 대상까지 차별하게 된다. 이는 건전하지 않아 보인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아예 모든 차별에 반대하기로 선택했다면 차별 기계가 지정한 차별 대상은 우리의 차별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되는데 이 역시 그리 건전해 보이지 않는다.
결론. 차별에 대한 기준 설정이 일관되고 정당하다면, 차별 반대에 대한 비일관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ps. 쓰고 보니까 제 결론이 D 님의 주장과 같은 것 같기도 하면서 다른 것 같기도 하네요. 정확하게 드리머님의 주장이, 모든 차별이나 혐오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요, 모든 차별이나 혐오가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비일관적으로 지지나 반대를 해도 된다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차별에 대해 비일관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가 있지 않다면, 아예 일관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뜻이겠지요?
D : 혐오에 대한 저의 스탠스는 이렇습니다: 「혐오를 하려면 차라리 공평하게 모두를 혐오하라. 혐오에 반대하려면 차라리 공평하게 모든 혐오에 반대하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비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모두를 사랑하라.」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동시에 중국인을 혐오하는 사람 P를 가정해봅시다. 이 경우, P는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이유로 「여성도 인간이다」 는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P는 똑같은 인간인 중국인을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P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나의 중국인 혐오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의 여성 혐오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논변은 근본적으로 내로남불에 입각해 있습니다. 중국인 혐오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면 여성혐오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코로나를 이유로 중국인을 혐오하게 된 사람이 있듯이,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횡포를 이유로 여성을 혐오하게 된 사람은 존재합니다. 타인의 개인적인 혐오 이유를 두고 부당하다거나 정당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주제넘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한 지적이 가능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똑같은 말을 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혐오에는 관대하면서 타인의 혐오에는 불관용으로 일관하니까요.
혐오자에게는 저마다의 혐오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혐오가 그 자체로 부당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마다 혐오의 동기 및 혐오 형성 이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노인혐오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일까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떤 노인에게 강간당했다면, 노인혐오는 충분히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실험은 모든 종류의 혐오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모든 혐오는 (1) 상황적 변수(situational factor)에 의해 혐오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경우, (2) 기질적 변수(dispositional factor)에 의해 혐오를 방지할 수 있는데도 혐오하길 선택한 경우, (3) 사회경제적 변수(socioeconomic factor)에 의해 혐오를 체득하는 경우, (4) 유전적 변수(genetic factor)에 의해 혐오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경우 등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에겐 부당한 혐오가 다른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혐오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자연스러운 혐오가 누군가에겐 부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합니다: (a) 우리가 어떤 혐오에 반대한다고 해서 혐오 반대를 강요할 수는 없고, (b)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특정 혐오자를 비난할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 역시 다른 누군가에겐 다른 종류의 혐오자일 수 있으니까요. 물론 비난도 개인의 자유입니다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외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것이 핵심이네요.
『비난 반대 선언』에서도 논한 바 있듯 저는 개인이 스스로의 스탠스에 얼마나 솔직한지를 눈여겨봅니다 (2.2.3.). 어떤 여성혐오 반대자가 별 생각 없이 여성혐오를 반대하는 동시에 중국인을 혐오한다고 해봅시다. 만약 그가:
「나는 여성혐오가 싫다. 그리고 중국인도 싫다. 비일관적이라고 해도 내 감정이니 어쩔 수 없다. 여성혐오는 반대하지만 중국인 혐오는 상관 안 한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저의 비판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비일관성을─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혐오 반대가 주관적인 기호에 따른 결과일 뿐임을─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의 요지는 모두를 혐오하라거나 모두를 혐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혐오는 주관적인 기호에 불과하므로 감정을 사실관계로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요지입니다. 본인이 진정 일관적이라면 모두를 혐오하거나 모두를 혐오하지 말아야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논점을 가리키기 위한 가벼운 문제제기에 가깝습니다.
스스로가 비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든 혐오자는 저의 비판에서 자유롭습니다. 우리 자신의 비일관성과 이중잣대를 명확히 인지해야 혐오/차별 문제 및 각종 논란거리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모든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했으면 좋겠습니다.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좀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고, 비난하기 전에 이해를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되는 상당수의 문제들은 이해의 포기에서 발생합니다. 스스로의 사상에 대한 자기객관화가 가능했다면 기안84 사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입장은 마지막에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차별/혐오에 대해 비일관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가 있지 않다면 아예 일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스스로가 비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진 말자는 이야기네요. 이는 곧 도덕적 우월주의를 버리자는 주장입니다.
[출처] 대화 167: 기안84 사태와 헬퍼 논란, 그리고 예술적 표현의 경계에 관하여|작성자 DRE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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