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0. 18:47ㆍ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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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 반대 선언: 범죄자 비난의 지양과 책임감 있는 분노를 위한 권고
*참고 #1: 이 선언문은 굉장히 길다. 원래는 시리즈물로 기획하고자 했지만, 하나의 완성된 논증을 제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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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165: 인민재판의 실태와 도덕적 우월주의 비판
*참고: 이번 글은 『비난 반대 선언: 범죄자 비난의 지양과 책임감 있는 분노를 위한 권고』에 대한 토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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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링크에 들어가면 D가 매끄럽게 정리해 놓았다.
2.2.1. 민의가 임의로 결집된 인터넷 마녀사냥 같은 형식의 인민재판은 법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은 특정 기간 동안 헌법 기관에 준한다(국민 ≠ 헌법 기관)'는 판례가 있지만, 그것이 '국민을 헌법 기관으로 본다(국민 = 헌법 기관)'는 아닌 것처럼, 현대의 인민재판을ㅡ과거에 인민재판이 사법적 지위를 이양 받은 경우 마냥ㅡ처벌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아니 된다고 할 것입니다. 현대의 배심원제가 인민재판과 동류가 아니냐고 묻는 물음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저는 임의로 구성된 인민재판을, 처벌이 아니라 변향變向한 가해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가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범법자에 대한 처벌의 권리가 없다'라는 선언에 동의하며, 애당초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는 임의적 인민재판은, 설령 그것이 선의의 목적을 띠거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법적인 의미에서의 처벌이 아니라 가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결과적 피해를 발생시키지 아니한 경우마저, 임의적 인민재판을 가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또한, 악질적 비난이라도 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선의'는 결과와는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법적 판단에 진의/비진의의 구분이 있고, 선의 따위의 '의도'를 양형 기준으로 삼는 점 등에 의해ㅡ그 의도가 어떤 결과를 발생시켰는의 여부를 떠나서ㅡ의도에 대한 실효성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판단의 지난함에 의해 저는,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은 모든 행위를 '임의적 행위'라고 간주할 것이며, 상황의 복잡성에 의존한 사안의 옳고 그름 여부는, 당해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은, 임의적 인민재판은 인민재판의 옷을 입은 임의적 행위이다. 이러한 임의적 인민재판은 법적 처벌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설령 처벌이 법적 성격을 띠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처벌과 가해의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둘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2.2.4.의 ㄱ을 보면, 비판 +, 비난 +인데, 비난을 '-'로 간주해서, 2. 3.의 A의 ㄱ을 -1로 만드셨네요. 둘 중 하나의 요소에 의해서만이라도 바뀌는 자(+)는 '갱생의 가능성이 있는 자(+)'인데, 왜 A의 ㄱ을 재기 불능(-)이라고 하셨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비난이 비판보다 악영향이 크죠. 하지만 비판이나 비난이 갱생 가능 여부에 대하여 '+'적 속성을 가지는지 '-'적 속성을 가지는지의 여부는, 비판이나 비난을 수용하는 자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태도에 달려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난을 비판에 비해 '-'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간주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2.2.4.의 ㄱ에서 비난의 속성이 '+(바뀜)'라고 조건 지어졌습니다. '왜 그 조건을 무시하셨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니, 비판과 비난의 우선순위와 영향력의 차등을 두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3.2.의 A와 B를 이해하려면, 비판이 비난보다 낫고, 비판이 비난보다 먼저 이행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선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드리머님은 2.3.의 ㄱ에서, 비난을, 태도 변화에 대하여 아예 '-'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비판이 비난보다 먼저 이행되지 않았다는 조건에 의해서 '-'로 간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지면 복잡해지므로, 부차적 이해는 독자의 문해력에 일면 위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2.4.4.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보다 본인이 낫다는 전제를 내려야만 한다. 거의 모든 도덕적 비난은 도덕적 우월의식을 전제한다."에 대한 비판.
비판/비난 따위의 지적 행위에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한가? 예를 들어보자. (도덕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입시 교육을 비난하는 자의 자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행위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 이유의 근거로, 타당한 근거와 부당한 근거로 대별하자. 분명 우리가 논의하는 비난은 이 근거들의 성격에 구속되지 않는다. 즉, 애초에 지적은 '자격'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입시 제도를 비난하는 자가 (수능을 기준으로) 9등급이건 1등급이건, 그가 노력을 했건 말건, 그에게 대한민국 입시 제도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건 개인의 감정이므로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입시 제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객관성을 충족하는 근거에 대해, 아마 일치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거가 너무 개인 귀속적이고 결과론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게 공부하고 대다수가 절대적으로 높은 성적을 기록한다고 하더라도ㅡ시험자가 모두 만점을 맞는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ㅡ9등급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애초에 수능의 이름과 목적이 상대 평가다. 상대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를 점하는 자는 이 제도에 반발할 것이고, 그 반발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한 언제나 거의 확실하게 발생할 것이다. 설령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평가나 지적은 다분히 개인 귀속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도덕적 우월감 역시 개인 귀속적으로 보이는데, 설령 도덕에 대한 객관적 지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도덕의 객관적 기준에 의한다기보다는 도덕에 대한 개인의 평가에 의존한다. 그런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비난은 평가(타당도)의 성격에 반드시 구속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난은 평가자의 도덕적 우열에 관계없이 무작위 공세를 펼친다. 가령 쯔양이 실수로 광고 표기를 하지 않은 것이, 시청자를 과도하게 기망할 정도의 뒷광고적 성격은 띠지 않아, 그녀의 도덕적 우월성이 보존되는 경우, 그녀에 비해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가, 논점과는 다른 이유로(가령 쉽게 돈을 번다는 질투심에 의해) 그녀를 비난할 수 있다.
결론. 비난자는 피비난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할 필요가 없다.
나는 "따라서 우리에게는 타인의 도덕적 결함을 비난하고 악의를 퍼뜨릴 자격이 없다."라는 드리머님의 발언에 대하여, "~자격이 필요 없다."라고 반론한다. 피비난자의 도덕적 결함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족하다. (비난 옹호 아님. 비난은 비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비판자 역시 피비판자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할 필요가 없다.)
ps. 너무 당위에 사실을 들먹인 느낌..
D : 좋은 지적 잘 읽었습니다! 차근차근 답변해보겠습니다.
1.말씀하셨듯 현대의 인민재판에는 법적 처벌의 권한이 없습니다. 허나 군중은 마치 인민재판에 그러한 권한이 있는 듯이 행동합니다. 제가 인민재판을 법적 처벌에 대비시킨 이유는 인민재판을 통한 피의자의 죽음이나 심적 스트레스가 결과적으로 법적 처벌을 빙자한 민중의 폭력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민재판을 통해 죽거나 피해를 본 사람은 존재합니다. 이 경우, 법적 처벌이 대신해야 할 문제가 인민재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민재판이 법적 처벌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은 인민재판이 합리화된 가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인즉 그것은 인민재판이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법적 처벌이 아니라, 인민재판이 법적 처벌의 대행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관한 일종의 풍자적 표현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모든 인민재판이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민재판은 불의에 대한 분노에서 추동되고, 동기 자체가 선한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허나 동기의 선함이 그 자체만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예컨대 (2.5.3)에서 언급한 바 있듯 살인범의 아이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으로 또 다른 살인마가 태어난다면─그것이 설혹 선한 의도에서 빚어진 비난이라 해도─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살인마를 양성하는 동인으로 작용했을 뿐입니다. 계도를 목적으로 아이를 구타하는 부모, 계도를 목적으로 가해지는 동성애 비난도 그렇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종교계의 비난도 의도만 놓고 보면 선합니다. 예컨대 동성애는 죄인데, 순전히 죄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동성애를 비난하는 선한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순수하게 동성애자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동성애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선한 의도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습니다만, 이들의 비난은 결과적으로 많은 동성애자들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즉 의도가 좋아도 방식이 그르다면 그것은 무의미합니다. 이 경우 동성애자들은 종교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바뀌지 않았고, 종교인들에게 상처를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종교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생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의도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상대방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고 외려 악영향만 야기하는 선한 의도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의도는 선한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 핸들을 꺾었는데 차가 오른쪽으로 간다면, 왼쪽으로 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오른쪽으로 갔다는 점이 의도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일은 아닐지라도,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변치 않습니다. 외려 자동차가 의도와 달리 움직였다면 우리는 차를 멈춰 세우고 문제해결을 위해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의 목적과 방향성을 검토해야 합니다. 우선 (1) 계도를 목적으로 하는 비난과 (2) 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비난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한 의도라고 주장되는 모든 사례가 실제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어떤 비난이 진심으로 계도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갱생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갱생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면 외려 범죄자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선 안됩니다. 잘못을 했다고 무작정 구타하는 것은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체를 부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입니다.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수리기사를 불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잘못을 했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고 개선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저는 계도를 위한 비난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굉장히 드물고, 되도록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계도를 위한 비난으로 인한 악한 결과의 사례는 계도를 위한 비난으로 인한 선한 결과의 사례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당장 범죄 관련 기사에 달리는 댓글 중 몇 퍼센트가 계도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검토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저주의 언어는 의도와 무관하게 개인의 삶을 파탄나게 만듭니다. 동일하거나 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건설적인 비판이 있는데 굳이 비난을 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도를 위한 비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도를 위한 비난과 계도를 위한 비판이 있다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낫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2.(2.2.4)/(2.3)의 점수 환산 논변에 대한 말씀은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셨듯 저는 갱생가능성을 중요시하기에 비난을 통한 갱생이 가능하더라도 비판을 통한 갱생만큼 건강한 형태의 갱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혹 비난을 통해 범법자의 태도에 변화가 있을지라도 범법자는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재기불능하다는 점에서 마이너스의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비판/비난을 통한 범법자의 태도 변화라는 변수와, 정당한 법적 처벌을 받고 풀려난 범법자가 사회에 복귀했을 때의 삶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정의한 방식에 따라 비판이 타인중심적이고 비난이 자기중심적이라면, 비판을 통한 갱생은 범법자의 사회복귀를 환영하는 방향이지만, 비난을 통한 갱생은 범법자의 사회복귀를 불허하는 방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자의 갱생이 가능하더라도 전자만큼의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사료됩니다.
3.도덕적 비난이 우월의식을 전제한다는 주장은 도덕적 비난이 위선적이라는 점에 대한 지적입니다. 우선 제가 비난의 종류를 구분한다는 점은 (2.2.3.)에서 논한 바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비난이 자기만족적 비난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을 높게 평가합니다. 즉 스스로의 동기에 관하여 솔직한 비난이 있고 그렇지 않은 비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비판 대상은 후자입니다. 도덕적 비난이 도덕적 우월의식을 전제한다는 점은 사실관계입니다. 우리가 뒷광고를 비난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적어도” 뒷광고는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가 친일파를 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는 적어도” 친일파의 후손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관건은 그 사실관계가 비난의 자격에 관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저는 비난의 자격에 대한 당위명제를 논증적으로 증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서두에서 밝힌 바 있듯 이 글은 비난을 반대하는 이유에 관한 합리적 권고이지, 논리적인 증명은 아니니까요. 누군가가 모두를 차별하고 비난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면 제가 그의 스탠스를 반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가치관 자체가 다르니까요. 말씀하신 쯔양의 예시에서 가해지는 도덕적 비난은 정당한 이유 없는 (1a)의 비난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건강하지도 않고 정의로운 비난도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나, 해당 비난자가 자기만족적 비난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상이한 도덕적 잣대에 관하여 침묵해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악플들을 방관해야겠지요. 사실로 당위를 논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렇기에 저 역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다면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권고의 글을 썼습니다.
두 번째, 자격이 없다면 비난을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저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고, 외려 저는 우리가 정의의 사도나 선을 자처할 자격이 없으며, 우리 역시 범죄의 직간접적인 동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난을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정의구현이나 선한 사회를 위하여 비난을 정당화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위선적일 수 있음을 저는 역설합니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의 비난이 선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정당화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위선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면, “그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비난의 정당화 시도는 실패합니다. 이 경우, 비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 누군가의 비난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비난자 본인의 가치관에 따르면 비난의 명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비난을 하겠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저는 솔직한 비난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는 않더라도) 솔직하지 않은 비난보다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그러므로 비난의 자격이 없다는 저의 주장은 비난을 하기 위해 어떤 자격이 요구된다는 필요조건에 관한 주장이 아닙니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자격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상대적으로 건강한 비난과 건강하지 않은 비난이 갈릴 뿐입니다. 언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악플러들은 많습니다. 저는 언어의 책임을 질 각오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비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비난을 통해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무책임한 언어들에 의해 피해자는 발생하고 무고자들이 매장당합니다. 그런 자격 따위 없어도 비난을 하겠다는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만, 저는 책임감 없는 비난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아파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가 제거된다면 우리는 건설적인 비판을 두고 소모적인 비난을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잘못에 대한 지적을 금지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잘’ 지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명하지 못한 비난은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야기합니다. 즉 방식과 방향성의 중요성을 저는 논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생각해볼 점이 많은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출처] 비난 반대 선언: 범죄자 비난의 지양과 책임감 있는 분노를 위한 권고|작성자 DREAMER
나 : 제가 고려하지 못한 요소가 있었군요. 전반적으로 드리머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세 가지 답변에 대해 이견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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