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증가능성

2021. 12. 7. 23:39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Gt_cv6FUbcw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한 명제를 유의미하다고 보았고 검증 불가능한 명제를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검증 가능성에 해당하는 명제란 주로 관찰할 수 있는 과학적 명제들을 일컫고, 검증 불가능성에 해당하는 명제란 관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윤리학, 미학 따위의 명제들을 일컫는다. 예컨대 '신은 박애주의자이다'라거나 '영혼의 무게는 20그램이다'라는 것 따위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하나는 '귀납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구획의 문제'이다. 귀납의 한계란 블랙 스완의 예시처럼 아무리 많은 관찰을 통해 입증된 사실도 단 하나의 반례를 통해 거짓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구획의 문제는 검증 가능성을 기준으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학문이 자신들의 학문은 검증 가능하다며 자신들의 학문이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을 이론으로 받아들임에 있어 귀납법을 통해 개별 사실을 관찰한 후 그것을 일반화하여 과학 이론을 정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포퍼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여, 먼저 가설 연역법을 통해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에 대한 반례를 찾아보고 그 반례에 의해 가설이 반증되면 다른 가설을 설정하여 반례를 찾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더 이상 반례에 의해 반박되는 가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가설을 과학 이론으로 확립한다. 그런데 케쿨레라는 독일의 화학자는 벤젠의 구조의 가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꿈에서 얻는다. 벤젠의 구조가 고리 형태라고 가설을 설정하고 반례를 찾아보니 반례가 찾아지지 않아 이것을 과학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것이 가설 연역법인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가설이 나온 경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가설이 결과적으로 들어맞기만 하면 가설의 단서를 꿈에서 얻는 신에의 영감으로부터 얻든 상관이 없다. 가설은 말 그대로 탈가설 이전에는 가설일 뿐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논리실증주의자의, 모든 것을 검증 가능성을 기준으로 과학과 비과학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한 반기를 든다. 검증이 가능하더라도 비과학인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들러의 심리학을 예로 든다.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열등감으로 설명하는데, 가령 어떤 사람이 물에 뛰어드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라고 주장하고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해서 뛰어들지 못했다."라고 설명한다. 즉, 뛰어들어도 열등감 이론이 검증되었다고 하고, 뛰어들지 않아도 열등감 이론이 검증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마르크시즘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되고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마르크시스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백 년 후에도 마찬가지로 주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원히 틀릴 수 없는 이론으로 남게 된다. 포퍼는 이것이 사이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설만이 과학 이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반증 가능성이다. 반증주의에 대한 반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확률에 대한 반증 불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져 3이 나올 확률은 1/6인데 3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3은 나올 수 없다거나 확률이 1/6이 아니라는 둥, "3이 나올 확률을 1/6이다."라는 가설의 반증 가능성을 주장할 수 없다. 존재에 관한 가설도 반증될 수 없다. 가령, "외계인이 존재한다."라는 가설에 대해서 입증의 증거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반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설에 대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없는 것에 대한 증거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증주의 반론자들은 또, 반증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반증 가능한 이론이 과학이다.

반증주의가 과학이면, 반증주의도 반증 가능해야 한다.

반증주의가 과학이면, 반증주의도 틀릴 수 있다.

틀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영원히 가설일 뿐이다.

이에 대한 탈출구는 반증주의는 해석일 뿐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증주의 자체가 과학인 것이 아니라 가설을 이론으로 만드는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증주의 자체가 반증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반증이 안 될 때까지!"라는 태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증주의에 대한 반론 네 번째는 "반증이 되더라도 어떤 가설이 틀렸는지 결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내가 호수에서 블랙 스완을 보았다고 해서 즉시 "모든 백조는 하얗다"라는 가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는 흰색과 검은색을 구별할 수 있다."라는 가설을 포기한다면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가설의 신뢰도가, 포기된 가설의 도움을 받아, 손상되지 않는다. 어떤 가설을 포기할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를 뒤엠-콰인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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