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로 x를 알 수 있는가?

2021. 12. 7. 23:36생각

"가령 어떤 대상 g가 있다고 상정해보자. 일단 더는 아는 것이 없다. 이제 g를 아는 누군가에게 g가 a냐고 묻는다. 아니오. 그럼 g는 b인가? 아니오. ... 이건 마치 스무 고개 같다. 아주 시간이 많아서 g 이외의 모든 다른 대상을 일일이 언급했음에도 상대방은 계속해서 g가 아니라고만 확인해 주었다고 하자. 이 경우 g는 다른 모든 대상과 다르다는 점에서만 그 자신과 동일하다. 그렇지만 이로써 g는 도대체 핵심이라는 것을 가지지 않는 어떤 것이 된다. 그저 모든 다른 게 아니라는 부정으로만 규정되는 셈이다.

우리는 g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g가 그 어떤 다른 대상과 동일하지 않다는 걸 아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알아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g의 정체성은 g와 다른 모든 대상의 차이와 동일한 게 아니다. ... g는 다른 모든 대상과의 차이 이상의 내용을 가지는 어떤 독자적인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 어떤 대상이 그 자체라는 특성을 갖는다는 말은 놀라울 정도로 말해 주는 게 없으며,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해주지도 못한다." -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중

위의 구절을 사례로 이해해보자.

100명의 집단에 나은이는 오직 한 명이다. 나은이를 아는 누군가에게 나은이가 예은이냐고 묻는다. 아니오. 그럼 나은이는 명은이인가? 아니오. ... 나은이를 제외한 99명이 나은이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럼 나은이는 이 99명이 아닌 것이다. 나은이는 나머지 99명과 다르다는 점에서만 그 자신과 동일하다. 100명 중에서 나은이가 어디 있는지 판별할 수는 있지만 나은이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99명과의 차이점 외에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은이를 100명 중에서 지시할 수는 있다. 그런데 단지 무어라고 하지는 못할 뿐이다.

나은이와 ~나은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나은이는 ~나은이의 부정이라는 차이점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나은이 그 자체의 정체성이 필요한 것인가? 세상에는 나은이와 나은이 아닌 것만이 존재한다. 이를 '나은 ∪ ~나은'으로 표기한다. 이것은 집합 관계로 표기해야 옳다. 나은이가 아닌 것 중에는 예은이나 명은이 따위가 있다. 그런데 예은이가 ~나은이인 것은 확실한데, 예은이 자체만으로 나은이를 알 수 있는가? 아닐 것 같다. 검지 않고 까마귀가 아닌 것이 검은 까마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극미량 입증한다는 헴펠의 주장처럼 예은이의 존재는 나은이의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검지 않고 까마귀가 아닌 것, 예를 들어 빨간 신발이 검은 까마귀 자체를 설명하지는 않는 것 같듯이, 예은이는 나은이 자체를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설명이라면 오직 '~'으로만 간접적으로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형식 논리에 의하면 부정은 '~부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단지 인간의 심리적 착각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지의 대상 x를 상정하자. 우리는 x가 아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즉 ~x를 안다. 그러므로 x는 ~x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다. 그것은 오직 x 밖에 없다. x가 무엇인지 모호한 이유는 ~x가 함의한 뜻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까 나은이의 예를 100명으로 들었지만 만 명, 그 이상이 넘어가면 도대체 우리는 다은이, 라은이, 가은이 등을 알고 어떻게 나은이를 알 수 있느냐는 인식의 한계를 예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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