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대화 주제

2021. 12. 6. 20:49생각

민감하다는 것은 사람과 관계, 상황에 따라 다르겠는데, 대개 일상적인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 정치나 종교, 성적 발언은 민감하다고 여겨질 것이고,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치 얘기는 민감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민감할지도 모른다.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치 얘기가 왜 민감하냐고? 정치인들은 정치 얘기하면서 싸우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다른 일로 싸우나? 물론 당리당략이나 이권, 사소한 자존심 문제로 다툴 수도 있지만 대개 그 소재는 정치 유일 것이다. 정치인들은 자기와 정치적 성향이 맞는 사람과는 덜 싸우리라 예상되고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더 싸우리라 예상된다. 종교인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종교적 성향이 맞는 사람과는 덜 싸우리라 예상되고 종교적 성향이 덜 맞는 사람과는 더 싸우리라 예상된다. 일상적인 가족이나 친구, 직장 관계에서 정치나 종교가 대화의 소재로 등장하면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크다고 보인다. 이 경우 가장 최초로 그 민감한 논제를 던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이렇게 판단한다.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그 발언으로 인해 앞으로 받을 어떠한 반박도 마다 않겠다는 논쟁의 출사표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그래서 필자는 기꺼이 그에 무조건적으로 토를 단다. 정치나 종교는 옳고 그름이 없고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므로, 내가 어느 편을 들던 내가 틀린 것은 아니기에, 웬만하면 필자는 그냥 반대편으로 간다. 이런 논쟁적인 스타일이기에 필자의 주변 사람들은 몇 안 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듯하다. 물론 요즘엔 귀찮기도 하고, 답이 없는 공허한 논쟁이라 이런 들이받는 행동을 지양하는 편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필자가 상대의 어떤 주장의 반대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정의 경우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틀릴 수 있음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기독교적 절대신은 실존한다."라고 주장한다면 필자는 우선 그 실존의 근거를 요청한 후, 신이 실존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이 실존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사실 간단하다. 아직 실존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이 근거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가 관건이라고 할 것이지만 그것을 어찌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또 다른 경우 누군가가 문재인을 욕하면 문재인이 잘못하는 것에 대한 정보의 제시를 요청하고 그것의 진위 여부가 명징한 기준에 의해 판명된 것인지 재차 요구한다. 반대로 박근혜를 욕하면 그 사람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일단 변론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해본다. 정치적 대화의 문제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대화의 종식을 선사하지 못하는 강력한 주범인데 이는 관계적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강력하게 한다. 정치적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자신이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별반 다르지 않다. 옳은 것이 애초에 모호하기 때문이다. 법적 판단은 물론 가능하겠다. 법적으로 그르지 않은 선에서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 의해 악으로 규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정치는 정의나 옳고 그름의 쟁투가 아니라 이권 다툼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물론 모든 합법이 정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합법은 일시적 정의이다. 내가 이러한 단언을 과감하게 하는 이유는 법이 공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후결적 사상의 집합체가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지지 않은 사상이 어디 있겠냐마는 말이다. 나는 민감한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뻔한 대화는 따분하다. 뉴스를 보면 매일 유사한 일들의 반복이다. 그 세부적인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굳이 그런 것들을 다른 사건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살인 사건은 어떤 범주에서 같은 살인일 뿐이다. 단지 흉기가 어떠니, 범의가 어떠니 피해자가 누구니 등 세부적인 요소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멀리서 보면 그냥 똑같은 사건의 나열에 불과하다. 일상적인 대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시콜콜하게 안부 연락하고, 할 일 없이 카페에서 한담이나 하는 것을 즐기지 못한다. 적어도 이제는 그 따분함이 나만 느끼는 것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나는 나에 더 집중하는 인생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불필요한 관계에 너무 신경을 쏟았다. 내 이권을 챙기지 못했다. 내 인생을 살지 못했다. 민감한 주제는 나를 살아있게 한다. 진부한 주제는 이제 싫다. 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보수적이 되고 일상에 진부함을 느끼고 반복되는 일에 귀찮아하는지 알았다. 세상이, 인생이 매번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또 새로운 민감한 주제는 싫어한다. 물론 나도 이에 동의하는 면이 있다. 아무리 새로운 주제라고 할지라도 답에 도달하는 과정이 진부하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일부 본인의 문제도 있다. 같은 책도 시간의 간격을 두어 다시 보면 새로운 면이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책도 마찬가지지만, 이미 아는 내용이 대부분인 경우도 존재한다. 이 글을 읽은 사람 중에 이 글이 완전히 새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글은 세상을 조금 산 사람이라면 진부하게 느낄만하다. 내가 새로운 지식을 뽐내고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말들과 내 경험과 가치관을 진부하게 나열할 따름이다. 소설은 어디 새로운가? 물론 SF 따위는 배경이 비일상적이고 내용 전개도 어느 정도 새롭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꽤나 현실의 상식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애초에 문체 자체부터가 완전히 외계어가 아닌 이상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로움을 주는 것이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희소해진다. 가령 새롭지는 않은데 민감한 주제 중에서 매번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적인 것이다. 이는 새롭지 않은 주제이지만 새로운 흥미를 매번 산출해낸다. 인간은 참 희한한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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