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18:15ㆍ생각
근래 들어 정치 거물들이 성과 관련된 문제로 나가떨어지고 있다. 대권 주자였던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김지은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 오거돈 부산 시장의 보좌진 면담 자리에서의 성추행 사건, 정봉주의 성추행 의혹과 정계 은퇴 등. 그런데 오늘 박원순 서울 시장의 실종 사건과 더불어 여비서에 대한 성추행 의혹이 제기됐다. 박원순 성추행 혐의 건과 관련하여 말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성과 관련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듯 보이지만 아직은 확단할 수 있는 근거가 태무한 관계로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언급을 금하겠다.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보아, 성과 권력이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기에 이러한 사달이 나는지 예전부터 의문이었던 것을 오늘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러 성범죄 중에 성희롱이란 희롱의 하위 범주에 속하는 특별한 희롱이다. 성폭행도 마찬가지로 폭행 중에 성이 개입한 특별한 폭행의 일환이다. 추행은 언어 상으로는 추한 행동이고 성추행은 성적으로 추한 행동이리라. 논의에 앞서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a가 b에게 못생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b에게 상처가 되는 일임을 일반적인 성인인 a는 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직장 상사인 남성 a가 자신의 하급자인 여성 b의 어깨를 토닥였다. a는 자신의 행위가 b에게 상처가 될 것임을 일반적인 성인으로서 아는가? 최근에서야 그것을 아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여성에 대한 섣부른 신체적 접촉이 성추행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한 것이리라. 일각에서는 우스개로 추남이 만지면 성추행, 미남이 만지면 설렘이라고 비꼬는데, 그 행위가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맥락적이고 관계적인 판단이 중요하지만 잠깐 제쳐두고, 신체를 불필요하게 접촉하는 행위가 왜 성추행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중요하다. a가 b에게 못생겼다며 완롱하는 듯한 발화를 하였을 시에 '못생겼다'라는 명징성이 여타의 해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즉 명백한 희롱의 뜻이 '못생겼다'의 지시어에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못생겼다'라는 희롱은 명백한 뜻을 가지지만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사람과 관계와 상황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희롱의 정도도 다르다. 가령 잘생긴 친구에게 못생겼다고 하는 발화에는 '못생겼다'에 담긴 희롱의 뜻이 현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맥락적 판단에 의해 희롱의 정도가 낮게 해석되는 것이다. 하지만 못생긴 사람에 대한 '못생겼다'의 발어는 희롱이 강한 정도로 작용한다.
이제 어깨를 토닥이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어깨를 토닥임'은 객관적인 물리적 행위이다. 앞과 마찬가지로 이것에 희롱이라는 해석이 낮거나 높은 정도로 개입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연애 감정의 기류가 흐르는, 서로에 대한 선호의 관계에는 이 물리적 행위의 희롱의 정도가 낮다. 그러니까 범죄적인 성희롱의 정도가 낮은 것이지 연애적 희롱의 정도는 높다. 반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직장 상사가 서로에 대한 연애의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상사 쪽에서의 일방적인 연애의 감정만 있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물리적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를 당하는 자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때에 행위를 당하는 자는 그 물리적 행위를 범죄적인 성희롱의 정도가 높다고 해석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에 대한 오인된 해석이 발생한다. 행위를 당하는 자, 즉 해석자는 해석에 대한 근거를, 그 행위가 작동하는 상황과, 행위자와의 관계의 친밀도의 정도와, 행위자와의 위계적 격차와, 해석자의 그 당시의 느낌과, 그 행위가 통용될만한지에 대한 도의적인 계교와, 그 행위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지에 대한 융통과, 행위 발생 기점으로 전후 여러 사정에 대한 비교와,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명확하고 편향되지 않은 인지가 가능한지에 대한 판단력과, 여러 정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근거에 의해 '주관적으로' 찾아낸다. 쉽게 말해 그 행위가 성추행인지 아닌지 직관적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인데, 더 쉽게 말해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내심의 영역은 관찰이 불가능한 완전 밀폐 지대이다. 즉 마음은 숨기려면 철저하게 숨길 수 있다. 해석자는 오직 드러나는 것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느끼는 여사원 b는 칭찬의 의도로 토닥여 주는 a의 내심을 오인하여 읽어낼 수 있다. 요즘에 들어 성범죄에서 행위자의 의도가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법적 판단이나 법리 해석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직관적으로 이상해 보이는 판결도 까보면 근거가 튼튼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것이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사안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지만, 여러 정황에 근거하여 통상적으로 심대한 피해가 초래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문제를 약식으로 처리하는 등의 융통성도 보인다. 가령 지하철에서 서로 마주하여 앉은 남녀에 대해, 남자가 여자의 특정 부위를 10여 초 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여성이 주장하는 경우에, 여자가 단지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인해 심대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유무형의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추단하기 어렵고, 남성의 시선을 특정하기 어려운 점 등을 이유로 성범죄의 일환으로 남성의 행동을 단죄하기 지난하다고 할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즘에는 옛날에 비해 피해 주장자의 내심을 범죄 구성의 비형식적 요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인과가 모호한 판결이 자주 목격되는 것을 경험한다. 어쨌든 성범죄란, 지금 특정한 사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총론이라는 것도 사실상 특정한 사안에 개입하면 다종다변하게 변곡될 수 있기에, 상황 편중성이 매우 높은 문제일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 중 하나로, 성적 구도가 불균형하다는 것이 있다. 역사적으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착취가 존재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에는 그런 것이 발생하는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성범죄의 큰 비율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범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성의 구도가 불균형한 근본적인 이유로 '권력'을 주장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범죄의 어떤 부분은 약한 쪽으로 향한다는 점에 의해 권력형 범죄가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범죄는 특정한 방향으로만 향하지 않는다는 무작위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상한 시각이 존재하는데, 가령 어떤 페미나치에 의해 주장되는 것으로, 비범죄자에게 범죄자의 권력을 씌우는 것이 그것이다. 가령 어떤 페미니스트가 한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로, "한남은 잠재적 범죄자이며 권력형 범죄의 맹아."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한남'이 한국 남자를 지시하는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특정한 한국 남자를 지시하는지에 대한 외연의 모호성이 존재하여 해석자로 하여금 의문을 자아내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따로 할 것이다. 일단 나는 아직 현재까지는 비범죄자이고, 절대적으로 잠재적 범죄자이다(내가 잠재적 범죄자인 이유에 대해서는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논하였다.). 범죄의 잠재성이 현출되지 않은 시점에 내가 범죄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범죄자가 되지 않는 한에서 계속 비범죄자이다. 나에게 범죄를 발생시킬 권력이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는데, 그 권력이 '남성' 그 자체라면 이 자연적 굴레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한남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남성이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자 중에 남성이 많은 것이다. 약자인 남성도 많다. 물론 강약의 기준이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기준과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다고 할 것이다. 나는 남성으로서 약자인 경우도 있고 강자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남성을 떠나 나는 다른 기준으로서 약자인 경우도, 강자인 경우도 존재한다. 요즘에 여자가 벼슬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예전에 여자는 남자에 비하면 종이었다. 사실상 여권이 현재 수준까지 상승한 것도 '남성의 배려'가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제 와서 배려냐고? 그렇다. 이제 와서야 배려다. 시민 의식이 성장하고 모든 인간이 인종, 성별, 피부색을 떠나 평등하다는 생각이 주류로 부상하게 된다. 혹자는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생각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당연하다는 생각은 근래에나 들어서야 생겨난 인식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이라면 그 생각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상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당연하다는 생각은 만들어진 생각일 뿐이다. 더 나아가 남성의 배려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여성 인권에 대한 배려파와 당연파로 갈려 싸우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여성 인권이 처참했던 시기에서 여권 신장으로 나아가는 과도기 이전 세대는 배려파가 당연파에 비해 압도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배려파보다 (여성 인권) 탄압(반대) 파가 훨씬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과도기에 들어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교육을 받을 것이고 배려와 당연 사이에서 혼동을 겪으며 자기만의 생각을 구축한다.
많은 분야에서 주류였던 남성이 여성에 대한 배려로 인해 여권이 신장되었다는 해석은 그리 불건전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여권 신장은 남성의 배려가 아니라 여성(소수자)이 거대 남성 권력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쟁취해낸 피의 결과물이며, 남성의 도움이나 배려는 적었거나 없었다고 주장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인정은 하지만 시대상으로 보아 그러한 경우는 희박하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여성이 투쟁한 것은 맞지만 압도적으로 권력을 남성이 쥐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것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사실상 치맛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이라고 봄직하다.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은 백인이 이룩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백인의 배려 없이 흑인 노예는 지속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흑인 노예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백인의 배려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의 권력은 압도적으로 백인이 점유했다. 백인의 결단 없이는 흑인의 자유가 불분명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정확히 말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은 원래 자유로웠다. 백인이 인디언(흑인에서 인디언으로 바뀌었지만 맥락상 이해하길)의 자유를 강탈했고 다시 자유를 부여했다. 여기서 배려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도 참 웃긴 것이다. 이제 다시 남녀의 문제로 가자. '원래' 남자가 여자를 지배한다는 논리는 없다. 자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어쩌다 보니' 남자가 여자를 힘과 여러 면에서 압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암묵적 지배를 민주 사회 들어 지배 해소라며 배려의 차원으로 얘기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하지만 힘의 논리를 기준으로 하면 남자가 여자에 대한 지배를 해소할 이유가 없고, 만약 지배가 해소된다면 그것은 힘의 관점에서 강자의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힘의 논리에서는 힘 이외의 '원래'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센 것이 '원래'에 근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힘의 논리는 강성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의 노력에 의해 세계의 기준이 바뀌어가고 있다. 힘으로부터 자유, 평등, 도덕, 원칙, 법 등의 개념이 세계 주도권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념 전쟁, 경제 전쟁 등 이권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남녀 분쟁은 단지 인간의 이권 다툼의 일환에 불과하다. 우리는 계속 싸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남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면 싸움은 끝날 수 없다. 어쨌든 힘의 논리를 기준으로 하면 여권 신장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배려이고, 원래 여성이 자유로웠다는 사실은 힘의 논리 앞에서 어떠한 힘도 쓰지 못한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아닌 것을 기준으로 하면 여권 신장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원래부터 당연한 것일 수 있고, 원래 여성이 자유로웠다는 사실은 힘의 논리가 아닌 다른 논리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약간 흐지부지 마무리 짓는데, 지금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렇다. 성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할 것이므로 여기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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