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가 김정은과의 악수를 영광이라고 한 것은 잘못인가?

2021. 11. 15. 12:52생각

3년도 더 전에 써놓은 글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이 블로그로 옮긴다. 2018년 대한민국 예술단이 평양에 방문했을 때 레드벨벳 예리가 김정은과 악수한 건을 두고 '영광'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대중으로부터 질타를 받은 것인데, 필자가 이에 대한 논박을 한 적이 있었다. 3년도 더 전이라면 지금보다 월등히 사고력이 빈천했을 시기이기에, 내용이 대충 기억은 난다만 다시 본다면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를 만큼 일천한 수준의 논증이기에 이 점 유념하길 바란다. 그냥 내 사고 부산물을 이 블로그에 집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아래의 글은 지금의 내 생각이 아니라 3년 전의 내 생각이다. 물론 디테일하게는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을 것이지만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예리의 영광 언사는, 비난받을 만큼 심각하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김정은에 대한 격찬이나 과잉 숭앙을 하지 않기로 자기 통제를 하고 있지 않는 한, 적어도 과한 표현을 금하는 게 낫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지 못하는 한, 예리의 언사는 긴장으로 인한 우발적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지 조금 미숙하고 예리하지 못했던 발언 정도로 보인다.

- 단어의 의미는 형식논리와 다종다변한 실질 양상을 고려하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야 한다.

1.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영광의 의미

영광 :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

영예 : 영광스러운 명예

명예 : 1.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2. (관직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쓰여) 어떤 사람의 공로나 권위를 높이 기리어 특별히 수여하는 칭호.

영광 표현이 강한 긍정성을 띤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반어로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분명해 보인다.

2. 영광 표현을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

2-1. 영광이라는 단어가 상향식으로 사용되거나 특별히 중대한 상황에 사용되는가?

가령 A가 걷다가 공사 중인 맨홀에 빠졌는데 마침 지나가던 노숙인이 자신을 구해주어 그에 대해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이 영광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제한되지 않듯이 상대자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용 가능하며, 일상적인 술자리에서 선배의 술을 받는 후배가 영광이라고 언명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영광은 서슴지 않게 사용 가능한듯하다. 물론 바로 앞 사례의 발화자가 타인이 보기에 평범하고 보통적으로 보이는 사건에 개인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면 일반 사건은 특수사건으로 격상된다. 예리에게 김정은과의 만남이 보통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 통념을 떠나서 일반 인간 정서상 신뢰하기 힘들 것이라고 보인다.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반드시 그 상대자의 사상이나 행위 따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치사로 영광 표현을 남발하는 경우가 일상적으로 많을 수 있다. 물론 내 생각엔 예리가 싫은데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 거짓 영광을 외쳤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북한 체제나 상대의 인품 따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영광을 표현했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가움과 신기함의 표현에 대한 섬세함이 부족했던 것 정도로 보인다. 어쨌거나 긍정성을 함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2. 반목하는 상대자에게 빈말이 아닌 진심의 영광 표현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가?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가령 누군가는 히틀러를 만나 악수하고 식사도 같이 한다면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이때는 그가 독재자이며 학살자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상대자의 권위와 특수성, 그 어떤 범인(凡人)에게도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상황의 희소성 등이 결합한 복합적인 문제이리라. 가령 피라미 살인마가 유영철을 만나 살인 방법을 전수받는다면 그 자에겐 영광일 수 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영광의 의미가 잘못 적용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영광의 의미를 적용함에 있어서 그 정당성과 기준이 상대자의 특성에도 좌우되지만 발화자의 내심에 의해 더욱 좌우된다고 보아야 함이 마땅하다. 더 정확히 하자면 의미 적용의 기준은 '의미부여자'에게 있다.

3. 예리가 진실로 영광스러웠을까? 만약 그렇다면 예리는 정말로 '례리'가 되는 것인가?

예리는 의미부여자로서 '그 상황'에서 '그 언명'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의미 부여가 항상 진실될 수가 있냐는 것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리에게 상황에 적절하게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의사능력이 갖추어져 있고, 그 상황에서 빛나는 영예를 누렸다고 느꼈다면 차차 후술하겠지만 이는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이지 국가적 불명예라거나 국민의 일치된 의견에 반하는 언동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예리가 김정은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고, 그의 이념과 체제에 동조하는 마음에 영광이라고 했다면 례리라고 불러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대다수 비난 여론의 초점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비난자들의 비난의 핵심은 적국의 수장에게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당한가이며, 이는 이번 방북에 대한 정부의 초점이 적보다는 친교 대상자에 더 맞추어져 있을 것을 고려하지 않는 비난으로 보이므로, 그들은 북한이 대한민국에 친교와 반목의 이중적인 속성을 띤 집단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만약 비난자들이 북한의 이중적 성격을 모두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친교 대상자로서의 영광 표현에 대한 자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도대체 영광의 대상은 무슨 기준에 의해 설정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의 허용 범위가 상당히 포괄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예리에게 어떠한 대표성이 부여되었는가?

예리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정치적 대표성이 없는 것은 확실하며 이번 방북도 그러한 국가의 중대한 목적과 사명감을 가지고 갔다고 볼 여지를 가늠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극히 사적인 지위로 방북하였다고 볼 것은 아니다. 예리는 국민의 민주적인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니기에 어떠한 공식적 국민대표성이 없다. 물론 예리는 비공직자인 공적 인물로 공인과 사인의 중간 정도의 지위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마저도 공식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회 통념상 연예인이 공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사법부가 판결에 적용하여 판례화되어있는 정도의 기준에 준할 뿐이다. 그러므로 비공식적 준(準) 공인인 예리에게 유추적용식으로 공적 책임을 물을 수는 당연히 없는 것이고 국민의 대표성이 없는 예리의 사견이 국가적인 명예나 품위에 심대한 훼손을 가하거나 대표의 자격으로 국민의 말살된 본의를 철저히 무시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볼 것이다. 만약 도종환이 영광 표현을 사용하였다면 예리의 경우보다는 문제의 소지가 높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예리가 북한과 대등한 지위의 사절단 자격으로 방북한 것이라고 판단할 여지의 정도를 계교할 수 없다.

어떠한 사인(私人)이 타국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을 전체주의에 포섭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나 가령 타국에 자국인이 피랍된 경우, 국가가 혈세를 들여 구출의 노력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동정적 사례를 들어 개인이 국가를 대표하므로 행동을 조심하라는 요구가 과도하다고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라고 반론자가 반론한다면 이에 다수가 순응할 수 있다. 요점은 예리가 타국에서 자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표성이 공식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매사 진중하게 행동하고 본을 보이기 위해 헌신을 다했어야 하느냐는 것인데, 사인의 자유를 현격하게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래야 함은 과도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영광 발언이 진중하지 못한 행동이었다는 다수의 지적은 과연 그 지적자가 단순히 사견의 문제성을 이유로 사인으로서의 행위만을 지적하는 것인지, 대표자로서의 본을 보이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품위를 격하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또 그것이 정말 중차대한 문제임을 고려하고 발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5. (여담) 각국의 대표자가 서로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문제가 될까?

문제 삼고 싶은 자들에게 문제 안되는 것은 없다. 대체적으로 가치적인 사안은 그 상황적 정서의 우열에 따라 정부(正否)의 여부가 결정된다. 앞으로 문재인이 김정은을 만날 것이고 그때 소제목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서로 적국인 사이에 잘들 하는 짓이라고 비난해야 할까, 그 만남의 목적에 맞는 서로에 대한 예우가 갖추어졌다고 해야 할까. 북한이 화전양면을 취하고 있는지는 물론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문제상황의 개선은 위험부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말 두 정부 서로의 평화적 관계를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반목보단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부부가 생각이 안 맞으면 이혼하여 앞으로의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게 하듯이 남북도 그러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는, 특히나 싸워서 이혼했는데 방 문을 사이로 아직 같이 살고 있는 부부를 상상해 볼 수 있듯 그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남북이, 그의 국민이, 국가 안보적 차원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가 과연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절망적일 것이다. 논점 이탈로 인하여 이하 줄임.

6. 왜 다른 표현 놔두고 하필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이 변론은 영광 표현이 큰 문제의 소지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다른 불필요한 상황의 적절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7. 박정희와의 악수가 영광일 여지는 김정은과의 악수에 비해 그 정도가 높다고 인정되어야 하는가?

저 둘의 독재력을 비교하는 것은 가늠하기가 애매할 것이고, 가령 김정은의 독재도가 박정희에 월등하다고 할지라도 독재 행위가 존재했다는 점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지 그 행위의 정도를 비교 교량함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의 악수가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김정은과의 악수에 비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과가 두드러진다고 하더라도 공이 분명히 있다고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경제발전이 공이라면, 그리고 김정일 체제에 비하여 김정은 체제에 들어 경제력이 상승하였다면 김정은도 공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판단이 갈릴 것이다. 김정은에게 선이 있다는 판단은 일단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박정희와의 악수가 영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박정희가 전악(全惡)이라고 주장하느냐는 것, 그리고 박정희와의 악수가 영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선이 그의 악을 전복시켰음을 인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계교하지는 않을 것이나 이로 보아, 전악(또는 최악)과 차악(次惡)에 따라 영광의 허용이 달리 될 수 있다면 차악이 전악에 비해 영광도가 높다는 것을 교량할 당위적 기준이 존재해야 하며, 차악으로부터 영광을 느끼는 부류들은 차악이 전악과 비교하여 마땅히 영광스러워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악이나 차악이 교량의 가치도 없이 영광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악인 박정희와의 악수가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자들이 최악(가정)인 김정은과의 악수가 영광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의견의 부당성을 타격할 수 없다. 이는 실증 없이 종교를 인정할 수 있듯이 실증 없이도 부정될 수 있다는 미가치증명적 양가 논리를 차용한 것이지 박정희 영광론자의 논리가 불인정될 수 없으면 김정은 영광론자의 논리도 불인정될 수 없다는 잘못된 인과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위의 예시는 박정희뿐만이 아니라 그 대척점에 있는 노무현이나 김대중, 그리고 세계 어느 누구에게나 대입이 가능하다.

앞에서 박정희를 김정은보다 낫다고 설정한 것은 논리 개진을 위해 가정한 것이지 김정은이 박정희에 비해 어리석거나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박정희가 김정은에 비해 덜 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 세습으로 이은 정권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도 건전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세습이 문제가 된다면 상속제도 형식논리적으로 하자가 있다. 내가 합법적으로 상속받을 돈에 나의 의지와 노력의 개입은 일절 없지만 관행적 증여 행위가 굳어져 그것이 정당한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연좌제는 위헌인데 상속제는 아니다. 둘 다 후세인의 의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데도 말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배리인 것이 많으나 많은 것이 문제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8. 세습독재자에 대한 영광 언사는 부적절한가

7에서 김정은을 최악으로, 그에 비해 낫다고 판단되는 인물은 차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김정은이 이 글을 본다면 섭섭하다고 느낄 것 같다. 김정은이 최악으로 가정된 이유는 아무래도 세습독재가 큰 이유일 것인데 이는 추세를 따르지 못함에 대한 문제로부터 기인하였을 심산이 크다(당연히 올바른 민주시민이라면 추세를 따르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옳지 못함을 당위적 근거를 들어 지적해야 한다는 것을 염지하길 바란다. 본 괄호 속 문장을 기준으로 앞뒤의 문장은 논리 개진을 위한 조건적 차용이다.). 즉 21세기의 민주적 추세를 따르지 않음에 대한 반발이다. 물론 독재의 준 절대적 부당성을 지적하는 소리가 우세하다. 세습독재자가 영광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필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는 명백한 근거는 과거 사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세습 왕정 독재 체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종대왕을 예로 들어보자. 전제 왕정은 독재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하나 소수임은 분명하다(소수라고 하여 그들 주장의 가치가 무시되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독재는 소수자에 의해 권력이 독점된 국민 기본권의 말살 형태를 지칭하며 왕정은 그에 걸맞다. 세종과 그 정권 체제가 분명히 세습독재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시대와 상황, 국민성 등을 이유로 세습독재 전제 왕정제를 변호한다면 그것을 마냥 옳은 판단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들(전제 왕권 유동적 옹호론자)은 마찬가지로 현 북한이 시대와 상황, 국민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이유로 북한의 세습독재를 비난할 것이다. 이들은 세습독재는 악하다고 하더라도 시대나 상황에 따라 인정 혹은 불인정 될 수 있다는 '유연적 적용'이라는 퇴로를 조성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상황적인 조건을 이유로 영광의 정도를 준별한다는 것으로 보아 친일행각도 상황을 고려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는 몰가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역사가 현재에 해석된다는 이유로 현재의 가치를 그 당시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당시의 상당한 부정을 단지 시대와 상황의 불가피성을 이유로 어느 정도의 옹호는 할 수 있더라도 시대를 아우르는 정당화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는 독재가 시대와 상황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기준 지어질 때에 가능한 논변이지 상황에 따라 의미와 본질 여부 자체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독재가 절대악이라고 간주된다면,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영광 표현 사용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 세종대왕을 만나더라도 영광스럽다고 느끼기가 불편해야 한다. 이에 세습독재자에 대한 영광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가에 대한 논제는 형식논리적으로는 해결된 듯 보인다.

9. 우리에게 이익을 끼치지 않는 자에 대한 영광 언사는 부적절한가

김정은이 실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주변국에 핵이나 미사일 도발 등으로 위협을 가한다는 점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다만 그것이 국방의 자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대한 논리적 반론도 사실상 형식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마찬가지다.). 어쨌든 핵도발, 북한 주민의 식량난 등으로 보아 북한 지도부의 자국이나 타국에 대한 반이익적 행위가 발동됨에는 압도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상당하다고 보일 수 있다. 이에 페미나치(극단적 페미니스트)를 예로 들고자 한다. 페미나치의 존재와 행위가 일반 남성에게 현재적으로 무익하다고 할지라도, 타협하여 서로의 미래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자며 공생의 논의가 개진될 때 페미 대표를 만난 비(非)페미 사절단의 대표성이 작은 구성원이 미래적 이익을 기대하여, 또는 개선될 아름다운 세상을 희망하여, 또 그 대표의 권력적 위압(무게감)이 더하여져 영광이었다고 회상함에 있어서 그 판단과 단어 적절성의 심대한 하자가 있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다분히 편협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로 보아 예리에게 북한이 현재적으로는 대한민국에 무익하나 미래적 이익이 기대되고 불안정한 시국의 타개가 기대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물질적 정서적 이익 향상이 수반될 것을 예상했다면 영광뿐만이 아니라 '령광'스러웠을지도 모른다(이는 대상성에 괴리되고 주변적 상황을 더 고려 한 관점인데 이 관점이 영광 표현 발화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경우가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정당성을 약화시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나는 예리가 현재는 무익하지만 미래적인 이익이 기대된다는 숙고로 인해 그에 영광을 느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발걸음이 평화로의 내디딤이기를 희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마저도 없었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이 논의는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10. '적'에 대한 영광 언사는 부적절한가

이것이 사실상 이 글의 가장 핵심적인 논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비난 내용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 사회보다는 군에서 자주 쓰이는 의미로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이념, 그리고 주권에 대해서 위협을 가할 의도와 능력을 갖춘 개인 또는 단체를 의미한다...

...2016년 발간된 현재의 국방백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에 대해 '적'으로 규정하였고 헌법은 북한을 평화적 통일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2017년 4월 19일 대선후보 TV 토론회의 발언 관련으로 주적 개념에 대한 논란이 일자 국방부에서 주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6년 국방백서에서는 북한군과 북한 정권을 '우리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 -나무위키

이번에도 한 가지 예를 들어보고 싶다.

반동탁연합군의 관우와 동탁군의 화웅의 대결을 보고 동탁군의 한 병사가 적장이지만 관우의 용맹함에 반했다면 후일의 그들의 만남에 병사는 영광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만남이 성사된 후 이 만남을 동료 병사들에게 소감과 함께 얘기하였다. 동료들은 '언젠가 너를 죽였을 수도 있던 인물'이라며 그 감정은 부정한 것이라며 질책하였다.

명장 관우와 독재 돼지 김정은을 비교할 수가 있느냐고 질타할 수 있을 것이다. 요지는 둘의 비교도가 아니다. 적이 자신에게 자신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영향을 끼쳤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판단의 호불호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는데, 가령 예시로 든 병사의 가족이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병사는 영광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심산이 크다. 마찬가지로 예리에겐 김정은이 적이라는 관념이 줄어들었거나 애초에 잘 형성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마냥 예리 본인의 안전불감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에는 정부의 성격과 언론과 미디어가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언론에선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 연신 북한에 대한 기사와 정보를 쏟아낸다. 이는 호의적이건 아니건 대중에게 거리적 친밀감을 형성시킨 것이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가 호전되는 것처럼 비친다. 이에 대중에겐 민족주의적 염원과 평화통일주의의 헌법적 사명이 결합하여 더 이상 북은 우리의 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정서가 만연하게 된다. 이에 적 관념이 무뎌지고 평화통일의 대상으로서의 북한이 부각된다. 즉 적이지만 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 그에 대한 부정성이 부각되지 않을 때 호의의 감정이 격상할 수 있다. 문제는 적이 표리부동하여 아직 적으로서의 속성이 강할 경우에 생기나 그 속성이 약화하는 단계라면 서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물론 화전양면을 항상 염두에 두어 전투 준비 태세를 필히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북의 대남 도발은 정권을 가리지 않고 있어왔기 때문에 한 치도 방심할 수는 없다. (의식의 흐름..)

우리는 살아가면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적이었던 사람들을 간혹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적으로 여겨졌던 사람이 나중에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한민족은 원래 가족이었다. 나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통일을 호소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재결합의 여지를 배제하지만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재결합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 정서가 합치되어야 할 것인데, 현 대한민국 국내 정서는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 남한 내에서도 통합이 안되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관계는 오죽 어려울까(다중의 생각이 강제적으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자유말살주의적 통합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율적인 의견 합치). 어쨌건 개인은 목적 지향이라기보단 이익 지향적 동물이기에 많은 이에게 이익적인, 소수의 이익이나 보편적 가치와 정의를 무시하지 않고서, 결과적으로 최선인 선택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정리

1. 영광 언사는 예리 개인의 가치의 문제이며, 그 가치의 건전성 훼손의 심각도를 평가할만한 당위적 판단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느냐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2. 예리의 발언은 대표성이 적은 자의 사견이므로 그녀가 국민 의사를 대신한다고 보는 것은 다소 비약의 소지가 있다.

3. 김정은이 최악이라고 가정한다면, 차악인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그에게 덜 영광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당위적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4. 세습독재 여부가 영광 언사의 적용에 대한 적절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에는 이중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본문 8번 참고)

5. 적에게 영광스러울 수 있음은 상황에 따라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적이라는 하나의 속성만 가지고 판단 되는 것이 아니다. (본문 10번 참고)

6. 현 시국의 추세로 미루어 보아, 김정은에 대한 적(敵) 관념이 무뎌지고 친교 대상자로서의 이미지가 부각되어 거대 권력자로서의 위압감이나 친근한 돼지 느낌이 반감이나 공포감을 상회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 영광이라는 단어가 상황이나 대상의 성격에 구속되지 않고 빈번히 사용된다고 보이는 점, 현 정권의 대북관과, 그것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북한에 대한 거리적 친밀감을 상승시켰다는 점, 전 세계적인 인기인인 신비주의자 김정은을 접근이 어려운 고립된 땅에 가서 직접 만났다는 신기함에서 나온 반가움에 대한 호의 표출로써 영광 표현이 사용된 것 정도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예리의 발언이 여론을 들쑤시는 파급력을 가질 만큼 몰상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