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7. 20:57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qs3dUhcxixA
[영상 내용 요약]
1972년 스탠퍼드 대학의 로젠한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8명이 정신과 의사에게 환청이 들린다고 거짓을 고한다. 그랬더니 의사는 7명에게는 정신분열증, 한 명에게는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후 정신 병동에 입원한 8명은 병동 내에서 정상인처럼 행동하지만, 의사들은 그들이 정상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로젠한은 이 실험을 바탕으로 '정신병원에서 정상으로 살아가기'라는 논문을 사이언스지에 게재한다. 정신병자를 진단하는 객관적이고 세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정신병자라고 한 번 낙인이 찍히면 그가 아무리 정상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정신병적 증상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후 DSM의 편찬과 개정을 통해 정신장애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정립해 나가고 있지만, 그 기준 자체가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장애라는 것이 원래 존재했던 것이라기보다는 시대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 정신장애란, 사람들의 특정 행위를 범주화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례로, 동성애는 DSM-II에서는 정신장애이지만, DSM-IV부터는 정신장애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에 따라 동성애가 정신장애이기도 하기 아니기도 한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나 정신장애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한 기준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하는지, 언제 어디서 부여하는지, 왜 어떤 방식으로 부여하는지 등의 시대적 맥락에 따라 임의적으로 결정되고, 그 결정된 것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변화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정신장애나 광기를 기준 짓는 것은 에피스테메라는 시대적 정신이라고 한다. 즉, 그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이 아니라 시대적 사조나 집단적 인식 체계인 것이다. 우리 개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그러한 기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한다고 한다. 그 시대적 정신은 시대에 따라 바뀌며 우리의 인식 체계도 그에 맞게 변형되어 간다. [영상 요약 끝]
가령 19세기 조선에서 소아성애(혹은 미성년 성애)는 비정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그것을 비정상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에피스테메는 소아성애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서 소아성애적 성향을 가진 자는 비정상이 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기를, 19세기 조선인 소아성애자는 그 시대의 맥락을 고려하여, 비정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시대의 맥락상 그의 소아성애적 기질은 문제가 아니므로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준이 뒤죽박죽 이현령비현령 중구난방 식이라면 우리는 지금의 기준에 따르는 정신병적 질환이 문제라는 것을 어찌 신뢰할 수 있을까?
어제, 우울증을 앓아 본 경험이 있고 지금도 약을 먹고 있는 자와 밤늦게 그에 대한 얘기를 했다. 논쟁으로 가기도 싫고, 그를 자극할 수 없어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기에 날선 비판을 억눌렀지만, 그럼에도 정신적 문제에 대한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얘기가 오갔는데, 정신병이 존재한다면 정신이 무엇인지 규정해야 할 것이며, 정신병이 약으로 낫는 병이라면, 즉 신체를 통제하는 약으로 비 신체인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정신은 비 신체가 아니라 신체여야 하며, 따라서 심물이원론적 사고로 접근해선 아니 될 것이다(따라서 이후의 말은 안 했다)라는 식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정신병이 약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정신병은 신체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정신은 편의상의 분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내리는 명령이 신체적 작용이라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신 작용이라는 사고는 신체에 의존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은 뇌의 전기적 신호이고, 말은 그 신호를 음성 언어로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위 영상 내용에서 봤듯이, 우리는 단순히 증상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는 차원을 넘어서, 정신병 진단을 받은 자가 스스로 문제적 증상이라고 믿는 것이 정신병적, 즉 신체적 문제로부터 일어났는가를 확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실제로 정신병이 있는 자나 정신병이 없는 자가 동일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그 차이를 구분해낼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병적 증상이라는 a 증상에 대하여, A라는 실제 정신병자와 B라는 임상 실험자가 동일한 a 증상을 보이는 것이 a 증상이 정신병이라는 병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그 증상이 정신병의 원인이라고 간주하여 정신병을 역추적해낸다는 점에서 정신병이라는 것은 증상, 진단 의존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p라는 신체적 상태의 경우에만 a라는 증상이 나타나며, 오직 그 경우만이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다면, p 상태가 아니면서 a라는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정신병이 아닐 수 있는데, 이러한 엄밀한 구분 짓기는 성공적으로 이행될 수 있는가?
우울증이 생화학적(호르몬적), 유전적 요인이라면 그것은 신체적인 문제이므로 비정상적인 신체를 바로잡아 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바로잡힌 신체 상태가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울증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울증 증세는 신체적인 문제, 즉 생화학적 유전적인 문제 없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그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우울증의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다. 또한 호르몬 수치가 비정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환경적 요인에 의하여 우울증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고, 호르몬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환경적 요인에 의하여 우울증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환경적 요인이 잘 통제된다고 하여 우울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며, 환경이 잘 통제되고 유전적 요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울증 증세가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때에 무엇 때문에 그 증세가 나타나는지 엄밀하게 진단해 내기 까다롭다. 즉, 해당 우울증 증세가 우울증의 요인이라고 알려진 유전적, 생화학적, 환경적 요인으로부터 나오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엄밀하게 가려내지 못하는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우울장애가 신체적인 문제에 의거하는 자라면, 환경이 어떠해지든 간에 완벽하게 호전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울장애의 신체적인 원인을 환경이 완벽히 제거한다는 연구가 아직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환경적인 문제가 아니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울 증세는 결국 누구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더 나쁜 길이냐 더 나은 길이냐를 선택하는 데에서 갈린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호르몬 수치가 비정상인 두 사람이 있고, 한 명은 우울장애로 다른 하나는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경우에 우리는 후자를 특이 케이스로 간주할 이유가 없다. 전자만이 연민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고, 전자의 낮은 의지력과 좋지 못한 환경이 질타 받을 이유도 없다. 상당히 많은, 증상의 진단에 따라 병명이 부여된 자들의 병은 임의적이고 부정확하게 부여된 것일 수 있다. 우울 증세가 유전적인 원인 때문에 발병했다고 진단받는다면, 환경적 변화를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호전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나쁜 환경이 우울 증세를 키웠다고 해도 유전적 우울 증세가 발현되지 아니할 수 있다. 우울증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고, 자신이 겪고 있는 증세가 정말 고질적인 문제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생산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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