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7. 20:56ㆍ생각
간혹, 바디 프로필 사진 찍을 때 바지 위로 팬티 상호가 드러나게끔 하는 일반인들이 있다. 주로 캘빈 클라인이던데, 그것이 이뻐 보여서 그렇게 찍을까 하는 의문이 항상 들었다. 아까 전에 친구가 그와 유사한 사진을 보냈기에 평소에 가졌던 의문을 제기했다. 그랬더니 친구 왈, '자랑하고 싶었나 보지.'라더라. 나는 여기서 다시 의문이 들었다. 캘빈 클라인 속옷이 굳이 드러내 놓고 찍을 만큼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브랜드인가? 싶어 가격을 검색해 보니, 빤쓰 치고는 비싸긴 하더라. 그래도 샤넬 옷처럼 큰맘 먹고 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재차 '참 자랑할 것도 없다~' 하는 식으로 그러한 자들의 한심한 물욕을 비아냥거리듯이 얘기했고, 이에 친구는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며 응수했다. 듣고 보니 친구의 말은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는 상대주의적 진리를 담고 있었고, 나는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화가 조금 더 생각해 봄직한 심도 있는 내용을 함의한다고 생각한다. 보기 편하게 하기 위해 대화를 정리해 보자.
나 : 일반인들(캘빈 클라인으로부터 협찬을 받지 않은 자연인)은 바프 찍을 때 왜 캘빈 클라인 팬티 상표를 드러내 놓고 찍는 걸까?
친구 : 비싸니까 자랑해야지.
나 : 참 자랑할 것도 없다.
친구 :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지.
위 대화에서 나는, 모든 자랑은 자랑스러운지, 그렇지 않다면 자랑답지 않은 자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나는 친구의 뒷말에는 동의하지만 앞말에는 부분 동의한다. 먼저,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는 문장은 명제인가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참 거짓을 논하기 어려운 문장이나, 굳이 명제화하자면,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가치 명제인데, 철수는 키가 크다 같은 명백한 비명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 가변적인 진리치를 함의하는 가치 명제로 규정하기로 하자.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고 주장한 친구가 '자기 맘'에 방점을 두고 있는 거라면, 즉 상대주의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거라면, '어떤 혹은 모든 자랑을 자랑으로 여지기 않는 것은 자기 맘'이라는 주장도 '자기 맘'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인정하여야 한다. 즉, '어떤 자랑은 천박하거나 자랑이 아니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주장이 자기 마음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어야 한다면, '뭘 주장하든 자기 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랑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자랑이 아님'이라는 주장 또한 '자기 맘'이면 다 옳다는 측면에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친구는 이러한 역설을 타개할 수 있는가?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살생은 나쁜 것'이라는 신념과 '문재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자. 이 자에게, 전장에서 우크라이나인을 죽이고 자랑하는 러시아군의 자랑이나 문재인을 죽이고 자랑하는 사람의 자랑은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는 기준에 따라 자랑의 지위를 가진다. 이 경우에 친구에게 전자는 자랑이긴 하나 나쁜 자랑임이 확실하고, 후자는 나쁜 자랑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 준 점에서 착한 차랑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위 대화에서 나는 자랑의 자격이나 지위, 가치의 정도에 방점을 뒀다.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친구는 자랑의 가치 정도보다는 자랑 자체에 방점을 둔 것 같다. 저 대화 이상 이어가지 않았기에 친구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위 대화만으로는, 친구는 자랑이 자랑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더 대화한다면 친구 역시 자랑의 천박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의 기준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자랑의 천박도가 존재한다는 뉘앙스로 얘기했고 친구는 내 의도를 간파했을 것인데, 거기에 자유주의적 항변을 한 것으로 생각되는 바다. 그렇다면 일단 그렇게 전제하고 앞에서 든 예시를 보자. 친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가정하자. 그의 신념에 따르면 정당한 명분이 없는, 가령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살생은 부당하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군인의 우크라이나인(민간인이라고 가정하자) 살해는 부당하며 그의 자랑은 친구에게 부당한 자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친구가 부당한 살생은 거부하지만 문재인을 극도로 혐오하여 그의 죽음만이 대의를 위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고 상정하자. 문재인 살해가 개인적 욕망이든 하나님의 뜻이든 간에 그것이 정당한 살해라고 믿는다면, 문재인을 죽이고 자랑하는 자의 자랑은 정당한 자랑으로 친구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제 자랑에 대한 내 견해를 위와 비슷한 예시를 들어 살펴보자. 우선 나는 '캘빈 클라인 정도의 속옷은 자랑할 만하지 않거나(자랑이 아니거나) (자랑이더라도)천박한 자랑이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캘빈 클라인을 입고 굳이 바지 위로 상호를 드러내놓고 사진을 찍는 건 모종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캘빈 클라인 모델이 평소 그렇게 입던 걸 모방하는 행위일 따름이지 굳이 자랑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간주한다(실제로 자랑이라고 생각하고 내놓고 찍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다. 존중한다(천박하다고 여기는 게 존중하는 건가?).). 가령, 모두가 낮은 점수로 돈만 내도 갈 수 있는 지잡대에 입학한 학생이 그 대학에 다니는 걸 자랑한다고 해 보자. 실제로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은 자랑스러운 자랑인가? 단지 스스로가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에서 오직 그러한 이유로 그 자랑이 자랑다울 수 있다면 우리는 연쇄살인마가 사람 여럿을 죽여놓고 스스로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두고 그 자랑이 자랑 답다고 여겨야 한다. 천박한 자랑이겠지만, '뭘 자랑하든 자기 맘'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어쨌든 그 살인도 자랑 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구나 갈 수 있는 지잡대에 간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사 입을 수 있는 속옷을 입고 자랑하는 사람 역시 드물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갈 수 있는 지잡대에 간 것을 자랑하는 것이 그다지 납득할 만한 대단한 자랑이 아니라면, 동시에,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속옷을 입고 자랑하는 것 역시 그다지 납득할 만한 대단한 자랑은 아닌 것 같다. 친구는 무엇을 옹호하고 싶었을까. 본인의 물욕이 간접적으로 멸시당하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명예 회복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내보이며 절대 자유라는 개인적 가치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지 쿨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바디 프로필 촬영은 옷 안에 숨겨진 노력의 결실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바지를 입고 상체만 노출하여 바프를 찍는 경우에 굳이 캘빈 클라인 표식을 노출하여 찍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정말 팬티 자랑일까? 다른 친구 왈, "쌍방울 팬티를 입는 것보다는 차라리 캘빈 클라인이 낫겠다 싶다." (이 친구는 이 말을 내뱉는 시점에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한 듯싶다.) "나 바디 프로필 찍는데 몸 좋아진 거와는 별개로, 나 캘빈 클라인 팬티 입고 있어요!" 이런 어필을 하고 싶은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면 저게 요즘 트렌드인 패션일까? 별로 이뻐 보이지도 않는다. 여자들 핫팬츠 아래로 기장 긴 속바지 드러내놓고 입는 것만큼이나 안 이쁘다. 내 미감이 이상한 걸까. 요즘에 바디 프로필 보면, 진짜 몸보다도 캘빈 클라인이 더 눈에 휙 들어온다. 설마 스텔스 마케팅이었나? 그러기엔 캘빈 클라인과 이해관계(협찬)가 없을 것 같은 일반인들이 너무나도 많이 따라 한다. 여하튼, 협찬도 아니고 패션도 아니라 정말 자기 자랑이라면, 나는 그것이 애초에 자랑 같지가 않거나 자랑이더라도 별로 있어 보이는 자랑 같지가 않다. 왜냐하면 캘빈 클라인 속옷은 입은 자의 재력도, 미적 감각도, 여타 다른 가치도 그다지 올려 주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 문제의 행위는 충분히 자랑일 수 있고 존중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자랑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 좀 보세요! 나 나름 비싼 팬티 입어요! 팬티는 본래 겉으로 드러내 입는 게 아니라서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는데 바디 프로필이라는 명분을 빌려 이제야 자랑할 기회를 얻게 되는군요! 이것 좀 봐주세요!! 팬티 자랑을 위해 몸을 만들었어요. 어때요. 내 의지 대단하지 않나요?
(사진은 굳이 첨부하지 않았는데, 구글에 '바디 프로필'이라고만 치면 엄청 많이 나온다. 그런데 확실히 남자는 상체 위주다 보니 바지를 입은 사진이 많아 남자 쪽에서 이러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고, 여자는 하체를 강조하는 부류이다 보니 팬티만 입고 찍은 경우가 많다.)
아 그리고 위에서 명제화에 대한 논의는 굳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첨언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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