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8. 15:54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Tf_iOFQko30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관한 문장을 이해할까? 마이농(Meinong)은 황금산이 다른 세계 어딘가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팽창된 존재론). 마이농의 주장이 참이라면 '황금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모순이다. 황금산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왕은 대머리다. 이 문장에서 한국의 왕이라는 지시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우리는 문장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프레게는 이에 대해 '한국의 왕'이라는 기술구는 지시체는 없지만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고로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는 한국의 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거짓이고 '한국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역시 한국의 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거짓이다. 그런데 이는 다소 이상하다. 어떤 문장이 거짓이면 그 문장의 부정은 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순 문장은 둘 다 거짓이다. 이에 프레게는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고, '한국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라는 문장도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왕'이라는 기술구가 지시하는 지시체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문장이라는 것이다. 프레게의 이러한 주장은 배중률을 위배하고 있다.
'김필영은 <시간여행>의 저자이다.'와 '김필영은 김필영이다.'는 문법적으로나 의미적으로 같다. 하지만 전자는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지만 후자는 아무런 정보도 담고 있지 않다.
러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기술이론을 제시한다. 러셀은 "C는 Y이다."라는 문장을 "X는 Y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가 있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러셀은 "X는 황금으로 되어 있고 산 모양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황금산이라는 기술구를 술어 형식으로 바꾸어 황금산이라는 지시체에 관한 문장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이때에는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예시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를 보자면 이에 러셀은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의 왕이라는 기술구를 술어로 형식으로 표현하여 한국의 왕이라는 지시체를 함의하는 문장이 아닌 것이 되었다. 이 문장의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인 것에 대응하는 지시체가 없으므로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래서 아까의 모순되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 (거짓)
한국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거짓)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있다. (거짓)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없다. (참)
이를 이해하기 위해 더 분석해보자.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 (거짓)
한국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거짓)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참)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있다. (거짓)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있다. (거짓)
"X는 왕이고, 한국인이고,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없다. (참)
위의 것들이 순서대로 대응한다. 즉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의 부정은 "한국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가 아니라,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것은 아니다."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겨나는 이유는 우리의 문법적 구조와 언어의 심층에 있는 논리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시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김필영은 <시간여행>의 저자이다.
"X는 <시간여행>을 썼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X=C의 C라는 실체는 있다. C는 김필영이다.
<시간여행>의 저자는 김필영이기 때문에 발생하던 동어반복의 문제를 "<시간여행>을 썼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일거에 해결했다.
우리는 이로부터 기술구는 어떠한 지시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태를 서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술구는 따로 분리해서 존재할 수는 없고 문장 속에서만 어떤 역할을 하는 불완전한 기호일 뿐이다. 그런데 러셀은 고유명사도 기술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명칭이 숨겨진 기술구, 위장된 기술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순신'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지시어에 대응하는 지시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장수'라는 기술이 떠오른다. 이렇듯 고유명사는 지시체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이러한 사태들에 대한 서술일 뿐이라는 것이다. 러셀은 이러한 기술이론에 의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존재에 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다고 주장한다. 고유명사나 기술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언어 사용을 할 때 '주어 + 술어'의 형식을 구사함으로써 주부에 대응하는 고유명사나 기술구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은 그러한 착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러셀은 주장한다. 0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표시이다. 가령 '3 - 3 = 0'에서 3에서 3을 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0이라는 지시어의 표기적 존재에 의해 실제로 존재하는 양 착각한다는 것이다. 고유명사나 기술구는 어떤 존재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
러셀의 기술이론에 대한 스트로슨의 반론에 대해 정리한 글을 링크로 첨부한다.
http://pakebi.com/philosophy/logic/stroson.html?PHPSESSID=41c2fb3de919d6afbda4a612a8436d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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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슨의 러셀에 대한 비판은, 러셀이 모든 문장에 배중률이 적용되게 함으로써, 배중률이 적용된다는 것은 그 문장이 진리치를 갖게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으로, 문장 자체와 문장 사용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문장 자체에 의해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사용에 의해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한국의 왕이 대머리라는 문장의 진리치는 한국의 왕의 존재와 그 문장의 사용의 일치 여부에 따라 진리치가 달라지며, 그러므로 한국의 왕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 발화된 '한국의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은 진리치가 없다. 즉 참도 거짓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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