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0. 17:00ㆍ생각
강제로 살해하는 것만큼 악한 것이 강제로 살게 하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죄나 악의 속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언명은 원죄의 대물림을 이행하라는 모순적 발어에 불과하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피조물이고,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죄의 번성이 출생의 지양으로써만 배제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태어나는 것이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태어나는 것은 원죄의 대물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의 생각에 의하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추후에 데이비드 베너타의 반출생주의 논증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이는 '낫다'라는 가치 평가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태어남 그 자체에 대한 가치 불개입적 판단(판단이 가치 개입적이라는 모순을 허용한다면)에 의하면 태어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는 것에 대한 아무 의미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인생도 자발적 선택이 없다. 결정론이 사실이 아니거나 유의미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모든 생의 의미는 사후事後(생후) 합리화다. 즉 생의 의미가 사후 합리화가 아니라면, 결정론은 사실이고 유의미성을 갖는다. 이것을 기호화하면 다음과 같다.
~결정 ∨ ~유의미 → 합리화
≡ ~합리화 → 결정 ∧ 유의미
적어도 사후에 합리화될 수 없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결정론적으로 참이고 유의미하다.
종교적으로 생의 의미가 생전 결정적일 수는 있지만 나는 이에 대한 어떠한 신뢰도 아직은 없다. 자기계발적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제외하고(예외 인정의 상대성 허용), 웬만한 일에는 가치적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냥 그것이 낫다('낫다'가 가치 판단인 것은 함정).
어쨌든 나는 확실히 낳음 당했고, 나로 인한 다른 낳음 당함이 적어도 내 선택에 의해서 배제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간혹 어떤 낳음 당함에 해당하는 자가, 낳음 당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낳음 당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는 아직 낳음 당하지 않은 자가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경우이므로, 제3자가 낳음 당하지 않은 자의 낳음 당할 권리의 박탈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쉽게 해결 가능한데, 어떠한 권리도 개인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된다. 낳음 당하거나 아직 낳음 당하지 않은 자가 낳음 당할 권리를 반드시 가질 이유가 없다. 낳음 당함을 선택할 수 있거나 없다는 언명 또한 모순이다. '낳음 당함'은 '선택'의 속성이 없다는 점에서 '~선택'과 동치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다소 생각되기 어려운 역설적인 상황이다.
어쨌든 필자는 가치 불개입의 측면에서 낳음 당함이 악하다거나 낫지 않다거나 하는 판단(일단 가치 판단이 아니라 사실 판단이라고 하겠지만, 가치가 개입하지 않은 판단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가령, '1 + 1 = 2'를 생각하는 것이 가치 불개입적 판단인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애매한 개념은 아니므로 이 정도는 엄밀하게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간주하자.)을 하지는 않지만, 가치 개입의 측면에서 낳음 당함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낫지 않다. 낳음 당하지 않는 경우가 낫다는 필자의 견해에 대한 이유가 위에서 거의 기술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사견이고 옳고 그름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자의 가치 판단에 대한 이유는 어떠한 사실에 구속되지 아니한다. 어쨌든 필자의 견해에 대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낫다거나 낫지 않다는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낳음 당하지 않은 상태)가 낫다거나 낫지 않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낳음 당한 상태)에 놓여있는 필자의 입장으로 보아 더 나아 보인다. 왜냐하면 낳음 당하지 않은 상태에는 '낫다'와 '~낫다'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비유하면 어떤 얼굴의 생김새에 대하여, 그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잘생기지 않았다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단지 그 얼굴'이라는 사실만 받아들이는 것이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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