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0. 16:58ㆍ생각
그냥 일기다.
그러니까, 이미 사귀는 친구를 만나야 하는가? 더 구체적으로, 이미 친구 관계이지만 서로 맞지 않는다면 만남을 지속할 이유가 있는가? 최근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겠다. 불필요하게 늘어지지 않기 위해 간략하게만 설명하자면, 필자는 오프라인에서도 이 블로그와 같은 스타일을 추구하며, 필자의 한 친구는 일상적인 얘기를 즐긴다. 필자의 스타일은 아무래도 일반적이지 않고, 친구의 스타일은 대중적이다. 애초에 둘이 상극이라는 얘기다. 이때, 나는 듣기 싫은 얘기를 인내해가며 관계를 지속해나가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 우선 이 친구가 시시콜콜한 것을 따지지 못한다거나 고리타분한 주제에 대해 논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필자가 느끼기에 친구의 디폴트 스타일이 복잡한 논증을 추구하거나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이 친구에게 '내가 친구의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게끔 변할 때까지 오프라인 만남을 지양하겠다'라고 선언한 상태다. 친구는, 내가 잘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는 몰라도, 내 말을 사실상의 절교로 받아들인 듯하다. 물론 필자는 영구적인 만남의 지양이 아니라 일시적인 미룸이라고 해명했지만, 어쨌든 당장의 상태만 보면 적극적인 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만날 이익보다 불편이 더 크다면, 그리고 그것이 변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지속된다면, 굳이 관계를 오래 지속할 이유가 없다. 만약 이러한 상태로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누군가는 상대방에 대한 불만족을 계속 감내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상대방의 요구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인데, 그 어떠한 경우라도 여러 의미의 고통을 수반한다. 인내하는 자는 관계 시마다 계속 감내하는 고통을 견뎌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자는 그 나름대로 그동안의 언동을 기존의 습성에 반하는 것으로 수정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러한 큰 변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관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는 나를 먹여 살리지 않는다. 즉, 친구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이 없다. 친구가 투자 개념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투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친구와의 만남의 지속으로부터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하지 않지만 나중에 필요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이유로 지금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참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1년에 한 번을 만나더라도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친구인가, 1년에 한 번을 만나더라도 즐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친구인가? 내 생각엔 후자인데, 단지 지속만 되는 관계가 딱히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전자의 관계는 애초에 별로 신경 자체를 안 쓸 것 같다. 그런데 1년에 한 번을 보더라도 친구라는 것을 느끼려면 애초에 친하고 만남이 즐거워야 하지 않나? 1년에 한 번만 가족을 보는데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만남이 행복한가? 그건 아니다. 가족과의 친밀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친구 역시 친밀도가 중요하다. 아무리 자주 보는 친구라도 친밀도가 없으면 친구라고 하기 뭐 하다. 그런데 애초에 친밀도가 없으면 이렇게 자주 보는 것도 설명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자주 보지 않는다고 친밀도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자주 보지 않는 관계(불가피하게 보지 못하는 상황을 제외한, 자발적으로 자주 보지 않는 관계)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친밀하긴 한데 만나면 즐겁지 않은' 특수한 경우는 친구 관계인가? 친밀도와 즐겁지 않음이라는 두 속성은 양립 가능하다. 가령 나는 엄마와 친하지만 엄마와 쇼핑을 할 때는 전혀 즐겁지 않다. 이렇듯, 어쨌든 과거의 관계 형성 과정에 의해 친밀도는 충분히 쌓였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보아 만남의 즐거움이 친밀도에 전혀 비례하지 않을 경우, 굳이 관계를 더 지속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만약 서로의 스타일이 상극이라는 것을 지금 알았다면, 일전에 어떻게 친해졌는지 의문이지만, 나와 다른 스타일의 사람에 대한 적응 연습을 하는 등의 특수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스타일이 맞지 않는 동반자를 굳이 수용해야 할 어떤 명분 있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
'친밀하긴 한데 만남이 즐겁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경우는 관계 유지를 지속할 수 있는 명분 있는 경우인가? 위에서 논한 '친밀 ∧ ~즐거움'에 '애틋'이라는 속성이 연언지로 결합하여 '친밀 ∧ ~즐거움 ∧ 애틋'을 구성한 경우이다. 물론 이 속성들은 양립 가능하다. 그런데 '애틋'이 '친밀 ∧ ~즐거움'의 정서적인 딜레마를 파쇄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는가? 그러니까 꼭 연민을 가지거나 걱정한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관계에 대한 정情이 깊다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것을 쉽게 버리기 어려운 공고한 정서라면 관계 지속의 충분한 명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명분에는 제약이 없기 때문에 모든 가치 판단자는 명분 제작자다. 어쨌든 내가 관계 지속의 명분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그런 일관되고 합당한 명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관계의 정情에 어떠한 미련도 기대도 없다. 만나면 만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굳이 관계를 지속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필자의 명분은 '기대하지 않고 미련 갖지 않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다지 특별하고 가혹한 구속은 없지만, 정기적이진 않더라도 가끔 만날 수 있는 필요성에 대한 일말의 '선택의 귀찮음' 때문이기도 하리라.
아무래도, 만남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친구 관계가 단절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내가 친구의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게끔 변할 때까지 만남을 미루는 방법이 가장 나을 듯싶다. 이러한 결과는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친구의 스타일에 맞추면서까지 관계를 유지하거나 만남을 이어가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과도한 변화는 고통이며, 그렇게 변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상대에게 헌신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대화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식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미술에 관심이 없지만 가령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자신의 미술적 행위와 신념이 자신의 커리어나 미적 성장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얘기한다면 나는 즐겁게 들을 의향이 있거나 적어도 고통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사실의 나열이거나 그다지 흥미가 없고 나에게 무가치하다고 느껴지는 정보라면 그 듣는 과정은 고통이다. 어떤 여자들이 군대 무용담을 듣기 싫어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군대가 주제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화자의 깨달음이나 화자의 신념을 유추할 수 있다면 싫은 얘기도 나름 값지다고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군대 생활에서의 푸념, 사실의 나열은 듣기 끔찍하다. 내가 왜 그것을 내 귀한 시간을 내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쨌든 개인만의 특별한 이유에 따라 관계 지속 여부에 대한 기준을 세울 수 있고, 필자도 현재 그 기준이 일관되고 타당할 수 있게 탐구해 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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