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가는 불안 장사꾼인가?

2021. 11. 22. 14:07생각

내가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것은 자기계발 산업 종사자들이 대가 없이 그 일을 계속할 것인가, 자기계발 이론이 옳은 것인가, 동기부여가는 왜 그 일을 하는가에 대한 것 등 자기계발 전반의 허와 실에 대한 총정리이다. 대략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이 프로젝트의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자기계발 산업 종사자나 동기부여가의 활동의 동기가 복합적이라는 점 등, 한 개인이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계발 산업에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쏟아온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찝찝함은 털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기계발이라는 복합어의 범주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논의의 개진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내가 논하려는 자기계발의 범위와 기준을 한정하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자기계발이나 동기부여로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 환경을 전제하도록 한다. 두 번째는, '동기부여'는 '뭔가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라고 하고 '자기계발'은 '뭔가가 '나아지도록' 추동하는 것'이라고 제한한다(제한이라고 했지만 굉장히 광범위하다). 이렇게 나누려다가 불필요한 것 같아서 통합해보자. 자기계발과 동기부여를 '뭔가를 하거나 나아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자. 이제 세 번째 기준은 자기계발과 동기부여 활동이 금전으로 전환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이 세 번째가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사실상 전부이다). 그런데 세 번째 기준에 따르더라도, 즉 예를 들어 동기부여 콘텐츠가 금전으로 전환되거나 전환되지 않거나 모두 동기부여 활동이라는 것인데, 맞다. 이것을 '상업적 동기부여'이냐 '비상업적 동기부여'이냐로 구분할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자식으로 하여금 공부 이외의 부대 활동을 시키는 것은 비상업적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상업적 자기계발로 취급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는 부모가 자식을 계발시킴으로 인해 어떠한 상업적 이익을 기대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해석의 다양성을 용인하면 상업과 비상업의 구분이 모호해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상업성과 비상업성을 가르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데 이 기준을 필자가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글에 한하여 필자의 개인적인 기준을 설정하고자 한다. 당연히 정당한 근거가 없으므로 신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기준은, 광고를 집행하느냐, 회사나 법인의 존재 유무, 노사 관계가 있느냐, 경제 활동으로 인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지급받느냐로 하겠다. 그러니까 대학교 강의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전공 공부 외에도 금융이나 법에 대한 공부 등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라고 조언하는 것 정도를 상업적 동기부여라고 간주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부여로 인해 교수의 평판이 좋아지고 그 격상된 평판을 빌미로 교수가 쓴 책의 구매도가 상승했으므로, 강의 시간에 학생을 상대로 한 동기부여가 자신의 책에 대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아, 교수의 그 행위를 상업적 동기부여라고 간주한다고 과잉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교수가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책의 좋은 점을 기반으로 동기부여를 하면서 책을 사라고 부추기는 활동은 상업적 동기부여라고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는 자신에 책에 대한 홍보 활동을 하였지 그 홍보를 접한 잠재적 고객(학생)이 반드시 구매자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금전적 이익이 발생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책의 구매 유도를 목적으로 홍보를 한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상업적 동기부여라고 간주한다. 대충 기준이 잡혔을 것이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상업적 자기계발, 동기부여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상업성이 없다면, 그 활동을 지속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 즉 만약 첫 번째 기준인, 동기부여 활동의 자본화가 가능한 배경을 배제하는 것은 반사실적 조건으로,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실 세계의 동기부여가가 설령 자신의 활동이 금전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은 그 활동을 이어갈 의향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과주의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할 요소이므로, 우리는 가정이라는 기법을 도입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부는 판단의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따지기로 한다. 이제 논란의 체인지그라운드(체그) 사안으로 넘어가자.

우선 왜 하필 체그냐 하는 것은, 내가 체그에서 운영하는 씽큐베이션 참가자인 점과, 그 씽큐베이션 활동과 다른 여러 개의 활동의 부정성을 지적하며 발족한 도서사기감시단(도감단)의 공세에 필자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선 체그가 상업적 자기계발, 동기부여 집단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몇 년 전의 체그의 이웅구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https://www.bizhankook.com/bk/article/11615

 

'체인지그라운드' 이웅구 인터뷰

자기계발·사회적기업 다룬 카드형태 콘텐츠…“포토샵보다 중요한 건 스토리텔링”

www.bizhankook.com

 

체그의 수익은 콘텐츠 제작과 책 홍보에서 주로 나온다. 콘텐츠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체그의 목적이 기업의 영리 추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없다. 애초에 체그는 노사관계로 이루어진 기업으로, 자신들의 콘텐츠 제작, 동기부여 활동 등이 상업적 성과를 낼 수 없다면, 그 집단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니까 체그가 돈을 목적으로 조직된 집단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돈을 벌 수 없다면 조직되지 못했을 집단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체그는 거의 명백하게 상업적 자기계발 집단이다. 도감단의 공격 내용은 다양하지만, 표절이나 개인의 인성은 우선 차치하고, 체그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졸꾸러기를 양산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꽤나 중요한 사안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체그가 상업적인 이유로 소비자를 기망하는 것이라면, 체그가 주장했던 본래의 모토에 대한 본말 전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비자에 대한 기망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며, 결과주의적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현령비현령일 수 있다. 체그는 필시 여러 마케팅 공식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마케팅 회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비자 기만행위 여부는, 적법한 마케팅이 이루어졌느냐, 명백한 허위에 의한 기망이 이루어졌느냐를 결정짓는 확고한 기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약 심대하게 부당한 이익을 착복하는 낌새가 감지되면 법적 문제 제기를 하여 법적 절차에 의해 전수조사에 들어가 부당성을 가려내어 법의 철퇴를 가하면 되는 것이고, 부적법의 기미가 포착되지 아니하거나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체그가 졸꾸러기를 마케팅에 이용하지 아니한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고 본다. 체그의 사업 방식과, 씽큐베이션 활동 원리와, 졸꾸러기의 양산 양상에 모종의 마케팅적 상관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추측한다. 체그의 궁극적 목적이 졸꾸러기의 문해력 향상이거나 사회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것이라면, 그들과 이해관계에 얽힌 책이 씽큐베이션 선정 도서에 반드시 간택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양서를 골라내고 그것을 다수에게 읽혀 동반 성장하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일련의 행위가 졸꾸러기를 과도하게 기망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명백하지 않아 보이므로, 제기된 문제가 수면 위로 더 떠오를 때까지 사안을 더 지켜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체그는 예전에 자청이 말했던 세계 최적화 이론을 그대로 빼다 박은 행동을 하는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AUCKb5b5UNs 

 

 

체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체그가 성공할 만하기에 최적화인 세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뜻이 맞는 졸꾸러기들을 계속 모집하고 양산하는 것이다. 졸꾸러기들이 많아질수록 체그는 이에 비례하여 소비된다. 이는 굉장히 장기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또한 정량화를 강조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성장세나 예견된 모델이 있을 것이다(물론 복잡계의 블랙스완을 잘 아는 분들이라 속단은 하지 않고 대비책을 다양하게 간구할 것이다). 신박사가 작년 즈음엔가 5년 안에 기업 가치(?) 1조에 대한 포부를 내비쳤었는데 이에 대한 귀추가 주목된다. 잘못된 행동은 비판을 받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정이 되어야 마땅하다. 체그의 영업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체그는 이에 대해 정당하게 비판을 받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기호화하면,

잘못 → 조정

≡ ~조정 → ~잘못(이 사안을 조건문 형식으로 나타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아직 부정에 대한 조정 조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명백하게 조정할만한 잘못이 확정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체그의 영업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반증된다면 체그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다. 이것을 기호화하면,

~잘못 → ~조정

≡ 조정 → 잘못

체그가 자신들의 영업 방식에 수정을 가하는 조정 조치에 임했다면, 그들의 기존의 방식에 명백한 잘못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조정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다는 뜻이다.

이 글의 제목에 대한 답변을 내야 할 때이다. 동기부여가는 불안 장사꾼인가? 상업적 동기부여가는 불안 장사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불안 장사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불안은 해석 주체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업적 동기부여가를 그냥 장사꾼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지만 '불안' 장사꾼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체그는 상업적 동기부여 집단이므로 장사꾼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되고 경우에 따라 불안 장사꾼에 부합할 수도 있다. 비상업적 동기부여가는 불안 장사꾼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그 이유는 그가 금전을 이유로 장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전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장사한다면 장사꾼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애초에 상업이라는 것이 돈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포괄적인 의미에서, 가치를 일으키는 거의 모든 행위를 광의의 상행위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상업적 동기부여가 역시 불안 장사꾼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불안 장사꾼이 아닌 동기부여가는 자신의 행위로 인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거나, 자신의 행위로 인한 어떠한 가치도 일으키지 않는 자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그런 자는 현실적으로 거의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며, 결론, 어떤 동기부여가는 불안 장사꾼일 수 있다.

※ 첨언하자면, 아주 상식적인 필자의 사견이지만, 가족, 친구, 일부 사제지간을 제외하고, 동기부여로 금전적 이익이나 명성을 취하는 동기부여가들은 불안 장사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동기부여가라면 소비자가 가진 불안을 구매해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을 파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든다. 이들은 희망 팔이, 가능성 팔이라고도 불린다. 불안 팔이들의 특징은 없던 불안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 팔이는 강요하지 않는다. 소비자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끔 만든다.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는 마치 낚시와 같다. 일단 여기저기 던진다. 미끼를 물때까지 기다린다. 자신들의 사업에 최적화된 소비자를 건진다. 끝. 이게 바로 오늘날의 광고다. 물론 요즘에는 ai 알고리즘이 좋아서 아무에게나 던지지도 않는다. 이 세계는 마케팅 지배 사회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