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7. 23:30ㆍ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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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생이닷컴>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 면 먹을때 후루룩 소리내서 먹는게 예의가 없는건가요?
어릴적 밥 먹을때 쩝쩝거리지 말라고 소리들은 기억은 있는데, 면을 소리내서 먹는다고 혼났던적은 없거든요. 누가 면은 소리를 내지않고 먹는게 올바른 예의라고 하길래 그런게 어딨냐고 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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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한국 밥상머리 예절.jpg - 스퀘어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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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을때 후루룩~소리 너무 거슬려요 ::: 82cook.com
후루루루루루루루룩 국물 다튀기며 먹는 모습 솔직히 너무 거슬려요 밑에 쩝쩝대고 먹는 사람들도 너무 싫지만 라면은 다들 후루룩~소리내며 드시더라고요 너무 거슬려요.... 외국에서는 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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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다양한 식사예절이 존재한다. 문화마다 국가마다 그 양상은 굉장히 다양하기도 하면서 겹치는 부분도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조사하고, 식사 시 비매너 행동으로 공통되는 요소를 분류하였다.
1. 소리
2. 오예汚穢(지저분하고 더러움)
2.1. 냄새
3. 특정 예식 관련
크게 이 세 가지로 분류했고, 이것만으로도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시사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에 1과 2는 대부분을 차지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다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예절을 논할 때 위의 세 가지 요소가 다분히 이상하게 발동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간혹 어떤 에티켓은 과도하고 불필요하게 엄격하다는 점에서, 식가食家로 하여금 분개를 일으키는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어떤 금기사항은, 그 특정 요소가 거슬림이나 불쾌함을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는다. 즉 특정 소리(이 논의에서는 '쩝쩝')로부터 반드시 불쾌감이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필자로 하여금 그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특히나 식사 간의 소리에 대해 분개하는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의 분개 기준이 다소 애매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에 대해 일어나는 감정이 객관적인 불쾌의 감각인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감정적 해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살면서 특정 문화권의 통례를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체화한다. 그 통념은 우리의 사고와 언행을 지배하는 빅브라더와도 같다. 나는 이전부터 식사예절에 대하는 사람들의 날선 반응에 호기심을 가졌다. 하나같이 민감하고 화가 나있다. 반면 위의 사진과도 같이 둔감한 사람도 꽤 눈에 띈다. 나는 비매너에 민감한 사람이 더 많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이들이 이러한 불쾌감을 어떻게 형성하였는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특정 데시벨 dB에 민감한가?
공기의 진동은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 가장 대표적인 '쩝쩝'으로 예시를 들어보자. 소리는 객관적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즉 똑같은 음량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인데, 가령 주간에 주변이 시끄러울 때에 이어폰으로 듣던 노래의 음량의 최대치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밤에 자려고 누워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귀청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 것을 떠올려보라. 청각기관이 소리를 받아들임에 있어 특정 음과 주변 소음을 조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사 상황이 쩝쩝 소리가 불쾌감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좌우한다. 쩝쩝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식사 상황에서는 당연히 특정 개인의 소리에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므로 논외로 한다. 그런데 조용한 식사의 자리에서, 특정인의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정확히 감지될 정도로 발동된다면 이것은 불쾌감을 유발할 정도의 소음으로 인식되는가? 우선 '불쾌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콘서트에서 가수의 귀청이 떨어질만한 샤우팅이 불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사람의 감정은 해석한다. 물론 달팽이관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 상식적으로 저작운동에 의한 소리가 불쾌하다는 것은 음량의 고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 자체이거나 소리에 담긴 '의미'에 의한 것이리라. 이는 자기 전에 들리는 미세한 소리가 신경을 곤두세워 잠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런데 식사의 상황에서 특정 소리가 밥 먹는 것을 방해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수면의 사례와 결이 조금 다르다. 가령 특정 소음이 수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지만 어떤 소음이 식사를 아예 실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소 생각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역시 논점으로부터의 불필요한 확장이므로 논외로 한다. 불쾌감을 느낀다는 측면에서 다루기로 한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던지고 싶은 의문은 이 소리(쩝쩝) 자체가 어떠한 후결적 통습의 불개입으로도 불쾌감으로 작용하느냐이다. 즉 쩝쩝 소리 그 자체에, 예절의 지식 없이, 불쾌감이 내재해있냐는 것이다. 이는 쉽게 생각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즉, 이 소리가 불쾌하다는 것이 어쩌면 주입된 가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식사 예절이 없는 경우와 있는 경우로 양분하여 사고실험해보자. 전자의 경우 특정 소리에 의해 불쾌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면 그 식사 상황엔 예의가 없다. 예의라는 가치 적용 개념 자체가 없어, 발생하는 소리는 식사를 방해하는 불쾌한 소음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정 소리에 불쾌감을 느낀 가치 부여자가 예절로써 특정 행위를 제한하는 것으로 설정한 경우와 특정 소리의 쾌불쾌 여부를 떠나 우선적으로 규칙을 부여한 경우이다. 극단적이지만 논의의 엄밀성을 위해서는, 어떤 문화적 규칙도 적용받지 않는 사람들의 식사 간의 특정 소리가 식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선제적으로 불쾌감을 유발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어쩌면 결코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못할 난제일 수 있다. 우선 이 사고실험은 단기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여겨지므로 배제하도록 하자. 이로 인해 우리는 "이 소리가 사실 불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지 못한다. 뒷받침되는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인데 가능성 문장이므로 소극적으로 언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쩝쩝 소리가 불쾌감을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인데, 이는 이미 쩝쩝 소리를 듣고 격노한 자들에게 먹힐 만한 설득력 있는 명제는 아니다. 앞의 사고실험에 미약하나마 보탤 수 있는 경험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필자 본인의 경험인데, 필자는 특별한 식사예절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는 20대 초반에 '쩝쩝' 소리에 대한 지각이 없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식사 간에 쩝쩝 소리 내지 말 것을 권고하였고 필자는 그 즉시 그 소리의 여부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이 머릿속에 안착한 것이다. 그때를 기점으로 쩝쩝 소리가, 민감하게까지는 아니지만, 그 소리에 주의를 쏟을 수는 있을 정도로 감지되기 시작했다. 분명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하지만 물론 그 소리가 나에게 불쾌한 소음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것은 해석자의 특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난 원체 예식을 쓸 데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반항심이 있고, 감각도 꽤나 둔한 편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러한 반증 사례는 "객관적 사건에 가치 부여 이후 그에 대한 특정 감각을 만들어 낸다."라는 가설을 극소하게나마 강화한다. 쓰고 신맛이라든지, 특정 오염된 냄새라든지 하는, 선천적 기피 감각 유발 물질이나 작용 따위가 있다. 그런데 신맛과 특히 통각을 자극하는 매운맛은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것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최근에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과학적 해석의 변화가 아니라 개개인의 가치 부여가 다르다는 것이다. 매운 것을 즐겨 찾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매운맛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면 고통이다. 어쨌든 이는 쩝쩝 소리에 그대로 접목시킬 수 있는 비유이다. 객관적인 저작 운동 소리와 객관적인 매운맛에 특정한 가치가 입힌다. 쩝쩝 소리는 불쾌감이 매운맛에는 쾌감이 부여되었다. 식사 예절 에티켓에 쩝쩝 소리를 내는 행위가 포함되는 가능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세계에서마저도 쩝쩝 소리는 불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쩝쩝 소리가 식사 에티켓이고 쩝쩝 소리가 불쾌하지도 않는 가능세계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세계이다. 쩝쩝충들이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쩝쩝 소리가 불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2. 소리가 발생하는 상황에 따라 다른 가치가 부여된다.
asmr로 음식물 없이 귀에 대고 쩝쩝대는 소리와 식사 간의 쩝쩝대는 소리는 무엇이 다른가? 이는 상황의 다름과 입에 음식물이 없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물론 혹자는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쩝쩝충 혐오자는 비음식물 쩝쩝 asmr을 굳이 찾아서 듣는다. 물론 이 자는, "쩝쩝대는 것이 아니라 귀를 빠는 소리이므로 쩝쩝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자에게는 그러한 상황의 변동에 의해 유사한 소리가 불쾌에서 쾌로 전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포병 출신들은 아스팔트에서 화포 기동 중에, 화포 안에서의 귀가 찢어질듯한 큰 소음이 생각보다 자장가처럼 고요하다는 것을 몸소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화포 안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새근새근 잠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화포 기동 소리를 밖에서 듣는 사람은 끔찍한 소음에 화가 치밀 것이다. 이것이 상황에 따른 해석의 차이다. 쩝쩝 소리는 이와 같이 충분히, 덜 어렵게 무례에서 예로 발전할 수 있었다. 후루룩 소리가 일본에서는 불쾌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비유이리라. 개인적으로 이 '후루룩'만 생각하면 화가 나는데, 후루룩 소리 안 내고 면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면을 주고 소리 날 때마다 뚝배기 한 대씩 치고 싶다. 뜨거운 면의 맛을 느끼기 위해 즉시로 면을 흡입해야 하는데, 이것이 너무 뜨거워 웬만한 혀와 입술의 놀림으로는 데이지 않기가 힘들다. 이에 면을 불어 식혀 먹는다고 한다면, 앞이나 주변 사람에게 그 뜨겁고 끈적한 온기가 다 뿜어져 다른 유형의 피해가 발생하고, 면을 식히는 과정에서 '호호' 부는 소음이 생성되는 등의 역겨운 딜레마가 발생한다. 진짜 뚝배기 깨버린다. 내가 앞에서 주장한 과도하고 엄격한 제한이 바로 이것이다. 진짜 뜨거운 면을 먹을 때 소리 안 나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먹고도 입술, 혀, 입천장 다 데일 지경에 놓이지 않는 것인가? 면발을 한 입 머금고 소리가 나지 않게 끊어야 한다거나 숟가락에 면을 담아서 한 입에 쏙 들어가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는 있다. 어쨌든 후루룩충은 쩝쩝충에 비해 덜 질타 받는 것 같다. 뭐든지 규준이 존재하면 그 규준에 의해 잘잘못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 누군가 어떤 것을 문제 삼아 문제 여부를 가려낼 기준을 창조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우선은 그런 쓸데없고 몰상식하고 엄격한 기준이 말소되어야 하지 않는가?
3. 특정 소리는 식욕을 반감시키는가?
정말 쩝쩝, 후루룩 소리는 식욕을 떨어뜨리는가? 이것은 다소 이상한 주장이다. 이는 가치 상대적인 주장인데, 가령 어떤 사람은 위의 소리에 식욕이 올라가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떠한 소리 객관이 식욕의 반감을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는다. 쩝쩝, 후루룩 소리가 식욕을 반감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개인의 가치를 떠나서, 그 소리 자체가 식욕의 반감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간혹 후루룩 소리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면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만, 일본을 포함한 소수의 특정 문화권에서만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것이고, 전자가 더 보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그것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무지한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판단이 무지한 이유는 표본이 밀집도가 다분히 이상한 점에 있다. 수치만 보면 70억 대 1억 정도이므로 다수가 압도하는 것으로 보아 다수의 보편성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 인종만이 특별하게 후루룩 소리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다른 문화권이나 다른 인종도 후루룩 소리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항존한다. 왜냐하면 특정 소리에 대한 감정이 내재하는 속성이라면 일본 인종과 다른 문화권의 인종은 아예 비교 기준이 다르므로,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넘어가 적용되면 그 기준은 틀린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일전에 다뤘던 동성애자의 항문 성교가 이성애자의 항문 성교에 앞서 에이즈를 발생시켰던 사회적 낙인과 유사한 것이다. 동성애자의 항문 성교나 이성애자의 항문 성교는 항시 일어나고 있고 어느 것이 먼저 에이즈를 발생시키느냐의 인과적 우선성에 대해, 두 경로(동성애자(남, 남)의 항문 성교, 이성애자(남, 여)의 항문 성교)와 에이즈 균 침투의 논리적 연관성은 서로 독립적이므로, 이후 이 운이 좋지 않은 우연성에 의해 동성애자들은 크나큰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어쨌든 문화적 차이니, 무엇이 다르고 자시고를 떠나, 보편적으로 다수가 불쾌하다고 하면 그냥 그에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문화 변동을 묵살하는 처사이다. 내가 던지는 의문은 식사 간의,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의 소리가 객관적으로 불쾌한 소리인지,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분명 다르게 작용할 수 있는 가치적 개념인지를 현명하게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4. 결론
필자는 쩝쩝충과 비쩝쩝충이 같은 문화에서 났지만 이다지도 다르게 자랐는지가 궁금했다. 뇌구조가 다른 것인가, 단지 못 배운 것인가. 왜 누군가는 그 소리를 불쾌하게 듣고, 다른 누군가는 불쾌하지 않게 듣는가? 특정 소리에 대한 쾌불쾌를 다르게 감각하는 유전자의 차이에 의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지는가? 후루룩 소리를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일본인은 왜 특정 지역에 밀집하여 존재하는가? 이를 유전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나는 다수가 느끼는 이 불쾌한 소리가 사실 그 자체로는 불쾌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정 객관에 개념을 입혀 발생하는 가치적 결과에 불과하다. 만들어진 관념, 어쩌면 착각일 수 있는 이 변동적 감정은 다수에게 이상한 가치를 규준으로 죄상을 부여한다.
특정 소리가 예절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불쾌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특정한 가치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특정 소리를 듣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거나, 이미 전제된 가치를 배제하고 특정 소리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소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애초에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 유형의 소리 형태만 듣고 그것이 감정적으로 어떠한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인지에 대한 무지한 이해다.
나는 이 소리가 쾌불쾌의 만고불변의 객관적 기준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시 예식은 변한다. 장례식, 결혼식 등 다양한 식전이 변동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특정 소리에 대해 왜 누군가는 불쾌감을 느끼고 다른 누군가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가?
추가)
작위와 부작위의 문제. 쩝쩝은 작위이므로 조절이 가능하고 비쩝쩝은 부작위이므로 더 이상의 조절이 불가능하다. 흡연과 마찬가지로 뭐든 하는 쪽이 손해를 본다. 작위자들은 행위의 제약으로 인해 자유의 일부가 박탈된다.
그리고 쩝쩝충이 존재한다면 예절충도 존재 가능하다. 쩝쩝충은 비예절충에 귀속되고, 예절충과 비예절충은 양립 가능하다. 그러므로 쩝쩝충과 예절충은 양립 가능하다.
가치의 측면에서 다수가 다수일만한 딱히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다수가 결과적으로 다수인 것은 우연적이다. 수많은 인과적 경로 중에 하필 결과적으로 현재를 구성한 경로를 거쳤다. 수많은 선택지 중 현재의 선택 경로를 거친 이 세계가 반드시 필요에 의해 선택된 세계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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