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5. 18:30ㆍ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vWuxWiIWs4I&list=WL&index=3&t=0s
최근에 본 영상인데 이 채널의 주인장인 김 교수는 전형적으로 인지 편향과 비형식적 논리 오류에 찌들어 있다. 나는 이 분이 쓴 책을 보지는 않았으므로, 이 글에서는 오직 위의 영상에 대해서만 언급할 것이다. 이 분이 쓴 책의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대부분 확실한 근거와 여러 가지 경험과 논리적인 통찰을 거쳐 일본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단순히 일본을 깎아내리고 우월감을 느껴보자는 차원에서 쓴 게 아니기에 혹여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일본을 폄하하는 내용들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라고 되어있다. 먼저 영상을 요약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는 식으로 개진하겠다.
1. 과대망상인 사람이 많다.
우선 일본인, 일본 문화, 일본 민족이 '과대망상'을 논리적으로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는다. 단지 일본적인 요소에서 과대망상이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되고 여겨질 뿐이다. 그리고 과대망상은 일본 국민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김 교수는 일본인에게만 과대망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일본인 중에 중2병, 허세,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 중2병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에서 츄니뵤 ちゅうにびょう라는 개념이 들어와서 한국 정서에 맞게 정착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단지 이름의 유래가 일본의 한 개그맨에 의했을 뿐이지 이 이름이 일반적 속성을 지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 영화에도 이런 중2병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나 이것이 없다고 볼 수는 없고, 일본의 과대망상이 타국을 압도할 정도로 우위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김 교수는 일본이기 때문에 과대망상이 많다고 하지 않았다. 일본에 과대망상이 많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발언에 대한 아무 근거도 책임도 없다. 내가 대중은 우중이라고 주장했다고 하자. 적어도 한 무리에서 어떤 속성이 보편적 특징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과반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어리석다는 것을 어떻게 내가 알 수 있는가? 단지 내가 경험한 데이터에 근거할 뿐이다. 준 통계적 감각은 의사적이고 계측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각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불가 지표로 기능한다. 객관화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대망상이 인간을 함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고 인간이 과대망상을 함축한다고 할 것이다. 과대망상은 인간에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이 과대망상을 많이 함축한다고 할 수는 있어도 일본인이 다른 국가의 국민에 비해 과대망상을 더 많이 함축한다고는 하기에는 여러 지표가 요구된다. 김 교수가 설마 후자의 뜻으로 말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지만 전반적인 영상의 반일성에 근거한 바, 그러한 뉘앙스의 조짐이 보인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2. 사소한 것까지 보고하고 허락을 받는다. 보고하지 않으면 자기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 경향이 두드러진다.'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 교수가 주장하는 거의 모든 내용이 이런 식이다. 도대체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위로 경향성의 우위를 알게 되었는가? 통계, 경험, 감각, 논리적 판단 등이 그러할 것이다. 우선 2에서 김 교수는 분명히 일본인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므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가 일본인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오류가 없지는 않다. 우선 사소함의 정도가 다르다. 한국인의 기준에서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는 것일지라도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사소하지 않을 수 있다. 첫 번째로 극복해야 할 난관은 언어의 문제이다. 그리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보고 체계가 철저하다고 해서 자기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의 총량이 높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의 상황이 많고 까다로운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기의지적 사건과 비자기의지적 사건을 통틀어 총량을 계교하여야 한다. 만약 김 교수가 대부분의 일이 보고와 관련되어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정말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러한지 입증하여야 한다. 영상에서 본인의 일본인 아내가 밖에 나가기 위해 자고 있는 자신에게 귓속말로 나갔다 온다고 보고했다는 개인적 경험을 얘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밖에 나가기 '위해' 보고한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간다고 알린 것이다. 이러한 사소한 사례가 자기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강화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3. 자기의 의견과 대립되는 생각에도 불편해하지 않고 맞장구를 쳐준다.
이것은 일본 인종을 표본으로 해서는 안 된다. 일본에는 문화적으로 자기 생각을 숨기는 다테마에와 그에 반하는 본심인 혼네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만 다를 뿐 우리나라에도 보편적이다. 특히 강자나 상급자, 연장자의 말의 경우에 더욱 심하다. 겉으로는 그러려니 하고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정도만 다를 뿐 보편적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4. 목적에 집중하지 않고 샛길로 빠진다. 철학이 없다. "냄새나는 곳에는 뚜껑을 덮어버린다."
이쯤 오기도 전에 눈치가 빠른 분은 알겠지만 김 교수는 점쟁이의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김 교수가 하는 주장의 내용은 대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다. 철학이 없다는 것은 철학이 없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일본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아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국가의 국민에게 철학은 일본보다 더 부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것이 교육 수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철학을 어떤 의미로 쓰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철학의 의미를 확장하여 본질, 문화적 깊이, 논리, 도덕 등 별의별 개념을 다 끌어온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철학이 왜 없는지 주장할 수 없다. 어떤 막노동꾼의 철학이 하루 벌어 흥청망청 쓰다가 죽는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게 철학인 것이다. 딱히 반론할 것이 없고 그런 인생의 신념이 그르다거나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내가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거니와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은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은 개념이고 사고이고 추상성이고, 신념인 정신적 요소이다. 그것이 포착되기 위해서는 드러난 것을 가지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온전하지 않고 불완전하게 곡해된다. 김 교수가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일본의 철학의 부재를, 오직 드러난 것으로 포착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개인의 해석일 뿐이고 김 교수의 주장이 실제로 일본의 철학이 없다는 사실을 함축하지는 않으므로 반일팔이 하는 자의 궤변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5. 고뇌하는 모습만 그려낼 뿐,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현실 도피의 작품 철학. 문화의 깊이가 일천하다. 본질보다 형식에 치중한다. 그런데 한국은 형식보다는 본질에 집중한다. 스모와 씨름의 차이. 스시의 단순함. 일본에 본질은 없고 和라는 사회 질서만 존재한다.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이 있다. 차도茶道는 철학이 없고 형식뿐이다. 선사상에는 깨달음이 없다. 고뇌만 계속하다가 도피해버리는 것이 득도이다.
현실 도피의 작품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본의 특징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라면 다른 나라에 비해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뜻하리라. 개인적으로 일본인들 본인들도 인정하는 혼네와 다테마에를 제외하고는 다른 특징이라고 하는 것들이 끼워 맞추기인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요소를 제시하면 그에 맞게 자기를 끼워 넣는 것이다. 점과 혈액형 성격 미신이 대표적이다. 나는 모든 혈액형별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 애초에 성격은 정량화되기에 지난한 추상적 개념이다.
일본은 본질보다 형식에 치중하고 한국은 형식보다 본질에 치중한다는 말은 한국 군대를 보면 완전하게 부정된다는 사실을 군필자라면 알 것이다. 허례허식도 이런 허례허식이 없다. 어떤 국가건 문화건 마찬가지다. 사실 더 부연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강약약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본질은 파악할 수 없고 해석되는 것에 불과하며, 사회 질서는 어느 사회에서나 중시되는 것이고, 각 문화권의 종교나 사상 따위의 깨달음은 개인적인 것이지 그 고유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스시가 단순하다는 것과 세계적인 음식이라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음식 인지도의 우위를 차지했다는 결과를 가지고 마음대로 천하다느니 별 볼일 없다느니 해석하는 것은 김치의 위격을 상승시키지 않는다. 김치는 스시보다 천하지 않고 스시는 김치보다 천하지 않다. 선호도가 귀천과 기준이 같다면 모르겠지만.
6. 사람들이 깊이가 없다. 어른들과 얘기해도 상스러운 말しもねた 뿐. 일본인에게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논점에서 이탈하여 상대의 약점과 실수만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철학이 없다. 일본인을 대할 때 단순하게 판단하고 강하고 변칙적으로 대응하라. 일본인은 지시대로, 매뉴얼대로만 해야 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상이 변칙적이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김 교수의 말에는 깊이가 없다. 내 말에 반론해보라. 나는 이 말에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김 교수도 마찬가지다. 근거가 없다. 본인의 한정적인 경험 내의 단견에 불과하다. 도올은 영어 다음으로 중국어보다 일본어를 배울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일본어로 된 정보와 학문의 양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세계 위키피디아 중에서 최상위 정보량을 보유한 언어에 일본어가 속한다. 위키피디아 한국어 판은 그에 비하면 일천한 수준이다. 일본의 수준을 애써 부정할 이유가 없다.
'깊이 없음'이 '일반적으로 깊이 없음'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깐깐한 요건이 요구된다. 정량화가 가능해야 하고 계측이 가능해야 한다. 유의미한 관측 가능한 결과를 발생시켜야 하고,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사람들의 깊이'를 측정할 기준과 도구가 개인의 인식 능력뿐이라면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상스러운 말은 어딜 가든 넘쳐난다. 일본인만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한국의 젊은이들은 선비 감성인 한국 방송 문화를 지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성적으로든 행동적으로든 비교적 개방되어 있음이 관찰되기 때문에 신선해 보이는가 보다.
궁금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일상이 변칙적이고,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말인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는 사람인가 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엉뚱한 말에 속아 넘어갈까?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말이다.
7. 우리나라 사람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교와 노인 공경 철학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연민과 공감의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인은 정이 없고 남을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도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종교적이거나 정치적 신념을 강하게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과반이어야 할 것인데 정말 한국인의 과반은 연민과 공감의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내가 마냥 말꼬리를 잡는 것이 아니다. 내심이나 그 내심으로 인한 결과는 감각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심에 상응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인과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결과라는 것은 드러난 것만으로 원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비측은지심을 가지고 측은지심적 결과를 발생시켰고 그 결과를 토대로 측은지심이 만연하다는 것을 해석해낸다면 이는 오류 추론이다. 그냥 김 교수의 대부분의 발언이 일반화의 오류라서 반론할 가치가 없다.
8. 일본은 변하지 않는다. 강자에게만 복종할 뿐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모르는 민족성을 가진다.
누구보다 잘 변화에 적응하여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쇄국정책만 비교해도 답은 나온다. 일본은 변하지 않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도 변한다. 조선의 국난을 극복했고 지금은 GDP 10위 안의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지 않았는가? 김 교수는 전형적으로 배중률적 흑백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 둘 다 동시에 거짓일 수 없으나 둘 다 동시에 참일 수는 있는 소반대대당으로 생각해야 한다.
김 교수는 민족성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행동 메커니즘과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자에게 복종하거나 때로는 강자에게 대항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거나 평화를 깨는 일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 원리이다. 강자에게 복종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생존이 유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동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민족성이 이 메커니즘을 함축하지도, 메커니즘이 민족성을 함축하지도 않는다고 볼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민족성에 개입하는 다변량의 변수들과 요인들이 있고, 민족성의 개념이 애매하고, 민족성과 인간 행위의 범주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9. 불매운동과 국산화에 매진하고 전방위에서 일본을 압박하고 넘어서야만 한일 평화가 찾아온다.
10. 총평
나는 친일도 반일도 아니며 단지 김 교수의 말에 오류가 너무 심해서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인지 편향, 비형식적 논리 오류의 대표격인 일반화의 오류에 찌들어있다. 90퍼센트가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러한 검증되지 않은 트래시 정보에 공감하는 것을 보면, 대평오의 문해력의 처참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김 교수의 개인적인 경험에 반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과 편향, 사후 해석 편향, 감정 편향, 확증 편향, 일반화의 오류 등을 자주 범하고 있고 이것들을 건드려 주기만 해도 김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다. 애초에 김 교수의 말의 내용에는 입증도 반증도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일본에도 김 교수와 유사한 방식으로 혐한으로 국민을 회유하여 먹고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한국과 일본을 넘어 어디에나 만연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교수가 제작한 영상과 책들은 김 교수의 신념에 기반한 것이다. 그 신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입증할 능력이 김 교수에게는 없다고 판단된다. 너무나도 상식적으로 당연하다. "일본은 변하지 않는다."를 어떻게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겠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변화의 주체가 모호하고, 변한다는 기준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것을 믿는 사람은 김 교수를 추종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반감과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모호함이 파벌 싸움으로 발전한다. 굳이 나는 혐김교수 파에 소속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명백하게 '~김 교수 주장파'에는 속한다. 왜냐하면 김 교수의 이러한 오류적 주장이 아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김 교수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 김 교수의 이상한 말을 적으로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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