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성은 대물림되는가?

2021. 11. 20. 16:52생각

본인이 열등한지 인지하는 사람은 왜 본인의 열등성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가? 이는 종족 번식의 본능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인가? 무릇 많은 생명의 생태 경쟁에서 도태자는 자연적으로 도태되기 마련이지만 인간 생태는 자못 기이하게도 열등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이을 수 있게끔 조작되어 있다. 그리고 우연히 얻어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인간이 우연찮게 섹스를 하고 우연히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앞에서 언급한 조작되어 있는 경우라 함은 국가가 가정 시스템을 제한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물론 과거에나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지 요즘은 자율성도 증강되고 규범적 압박도 덜하기 때문에 출생률은 감소 추세이다. 물론 대한민국을 포함한 일부 저출산 국가에 국한하는 것이지, 지구적으로 봤을 때 출생률은 증가 추세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치 평가는, 이러한 현상으로 맞을 귀결이 그렇지 아니하고 맞을 귀결보다는 나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인구 한계치에 도달 시에 발생하는 인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예를 들어 지구가 200억 명 이상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한 경우에, 현재의 도덕관념으로는 인구를 강제적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인구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출생 억제 정책일 텐데, 그 또한 열등자(인구가 증가함으로써 본인에게 해가 온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출생 행위를 선택하는 자)의 은밀한 출생 행위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는 아니다. 오히려 악이 증가한다는 것이 더 근본적이다. 그러려면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선제되어야 할 것이므로, 존재자에 대한 평가로서의 일반적인 악이 존재한다고 상정하자. 그리고 그 악이 종교적일 필요는 없고,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해, 즉 이익보다 '낫지 않음'을 지시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태어남으로 인해 얻을 해가 태어나지 않음으로 얻을 이익보다 많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산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산술적인 판단을 극복하거나 무시한 것이 과거의 전통 규범과 도덕적 생명관이다. 현재라고 다를 것은 없다. 열등 인자는 여전히 자신의 열등성을 대물림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반면 자신의 열등성이 지속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탈열등자(열등성이 유전적으로 귀속되어있으나 인지적으로는 탈피함. 이 탈피 행위가 본질적 열등성을 소제하지는 못함.)는 자신의 열등성이 생출되는 모든 과정을 중단시킨다. 필자가 주장하는 열등성은 단지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지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지체자가 만나 비지체자를 반드시 내놓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체성이 비지체자인 자녀에게 해악을 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면 이들은 열등자가 아니면서 열등성을 내놓은 결과를 맞게 된다. 이 반례로부터 우리는 앞에서 주장한 열등성 귀속론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태어남이 항상 해악이려면 태어남 자체가 해악이어야지, 태어남을 부여하는 자가 열등할 필요는 없다. 태어남에 의한 해악(열등성)이 개체에 반드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열등성이 대물림된다는 표현을 열등성이 생출된다는 표현으로 수정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열등자만 열등자를 낳는 것이 아니라 비열등자도 열등자를 생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등성의 생출이 원칙적으로 봉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도 열등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즉 이 말은 열등성이 증가하는 계가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열등성 생출의 해악보다 이익이 더 크다면 열등성 생출은 정당화되는가? 이해의 기준에서 이익이 해악보다 더 정당하다면 열등성 생출로부터의 과반수 이익은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열등성은 비열등성이나 아예 존재하지 않음보다 더 이익인가? 이에 대한 판단은 매우 복잡하다. 가령 신체적으로 열등하지만 다른 모든 영역에서 열등하지 않은 자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열등하다고 간주해야 하느냐는 기준 설정의 문제가 있다. 혹은 이 자가 단지 신체만이 열등하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낀다는 이유가 열등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모호한 기준 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열등성의 정의와 기준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생출 그 자체가 열등하다면 이 문제는 해소되지만, '열등성 생출'이 열등하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출 자체를 열등하다고 간주하지 않는 한, 어떤 열등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해야만 논의의 개진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아직 태어남 그 자체가 열등한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따라서 '열등성 생출'에 대한 조건화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조건부로 열등성이 생출하는 경우를 상정하고 그에 따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물론 열등성이 해악이라는 사실이 어떠한 형태로든 열등성이 생출하는 이유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외모의 추함이 해악이라는 사실이 외모가 추한 생명의 탄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 않은 것과 같다. 적어도 그동안에는 추한 외모의 불이익이 추한 외모가 대물림되는 현실을 타개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도대체 왜 자식에게 그러한 시련을 안기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이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생의 대물림을 포기하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강제적으로 열등성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자발적으로 열등성의 대물림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열등성은 가변적이고 모호한 개념이고 개인 귀속적인 감정일 수 있지만, 열등성 판별자(생출 결정자)가 자신의 열등성이 대물림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거나, 혹은 미래의 생출자의 열등 가능성이 현저하게 예상되고, 그에 대한 배려심이 투철하다면 이 판별자는 생출을 선택하지 아니함으로써 다가올 고통의 감소나 중립에 기여할 수 있다.

어쨌든 과거부터 미래까지 어떠한 열등성이 생출되는 것이라면, 본격적인 열등성 생출의 이유는, 그 생출을 막을 방도가 없거나(P), 막아선 안 되거나(Q), 막을 필요가 없기(R) 때문이다. P에 따르면 정책적인 문제, 즉 생명, 도덕, 인권 단체의 반발 따위에 의한 규제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설령 정책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생출을 막을 기술력(유전자 조작 같은)이 후진적이거나, 설령 기술적으로 완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행에서의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다. Q의 경우는 역시 종교적, 도덕적인 문제가 가장 클 것인데, 그러면 기술적으로도 연구가 압박을 받아 난항을 겪을 것이며, 이러한 도덕이라는 고고한 가치를 정책 결정자(그 중에서도 위선자, 도덕적 우월성을 느끼는 자)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해 먹지 않을 이유가 없어, 생명의 탄생을 고귀한 것으로 간주하고 당위나 규범으로 설정할 것이다. 열등성의 생출을 막아선 안 될 이유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열등성의 생출을 막아선 안될 이유도 없다. R은 여러 면에서 방관적인데, 그것의 이유가 도덕 규범이나 인구 증가로부터 오는 생태 문제 따위가 아니라면 매우 중립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어떤 제도가 완비되고 기술력이 보강되어 그것을 강제로 적용하지 않는 한 열등성의 증가는 개인의 행위의 자유와 난립성, 불예측성의 측면에서 불가항력이다. 설령 모든 인간이 존재가 해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사실이 '생출되지 아니함'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법은 열등 인자를 선천적으로 줄이는 것인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하루빨리 진척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열등성 생출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는 P가 가장 합당한 듯싶고, Q의 이유로 열등성이 생출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