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평가 종속적이다
최근에 필자는 미디어에 운동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상의를 탈의한 채로 홈 트레이닝을 하는데, 이에 대해 느낀 점을 간략하게 서술할까 한다. 필자의 몸은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다 보니 그래도 필자의 몸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두 명씩은 나오게 마련인가 보다. 어떤 몸을 좋아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몸에 대한 평가가 수반됨을 의미한다. 어떤 몸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몸이니 좋아할 이유가 없다. 한시적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필자의 몸을 좋아하는 여자는 칭찬 일색이다. 필자의 몸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끼면서 평가나 지적을 하지 않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니, 칭찬을 하는 여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수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반화는 절대 금물이다. 어쨌든 이와는 반대로 남자의 경우 표면적인 경우만 살펴보면 훈계와 지적 일색이다. '어디는 좋은데 어디가 약하다', '어디를 더 키워야 한다' 등의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가치 기준이 개입된 평가를 주로 한다. 이는 남녀의 기준에 차이가 있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필자의 몸이 보디빌더에는 미치지 못하는 몸이기에, 남자의 경우 보디빌딩을 기준으로 필자를 평가하는 것이리라. 여자는 그에 대한 완고한 기준이 없고 전반적인 비율이나 느낌이 주관에 의존하다 보니 다소 유연한 평가를 내리는 것 같다. 이 몇 주의 기간 동안 성적인 요구, 희롱이라면 희롱이랄 수 있는 발언도 많이 들었는데, 이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희롱이 어떤 느낌인지 공감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어디 보여달라, 어떤 포즈 취해달라 등의 요구에 굉장히 부끄러워 현타도 왔었는데 자본주의의, 설령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성 상품인 필자가 굳이 우월한 가치를 숨길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자본력을 향상하는 데에 일조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성적 시장에 내놓는다는 관점에서, 모든 성을 가진 생명은 성 상품이라고 할 만하다. 상품에 비유하는 것이 거부감이 들 뿐이지, 본질은 하나다. 내가 이성 혹은 동성에게 성적으로 소비되느냐 마느냐, 단지 그것이다(이는 성적 시장에 자신을 내놓은 경우를 전제한다). 자신이 성적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시장에 발을 들이지 않고 그냥 살면 된다. 물론 내가 성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웬만해서는 타인의 의지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적으로 끌리는 신체는 우월한 성적 자본이 될 수 있다.
항간에서는 페미니스트는 죄다 뒤룩 돼지, 성적 가치가 낮은 자로 치부된다. 물론 그런 부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부류는 성적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거나, 자신을 아예 성적으로 보지 말라고 요구한다. 사회가 부여한 성적 코르셋은 주입된 것이지 본질이 아니며, 거대 자본의 권력에 농락 당하는 것이므로 깨어나야 한다며 코르셋을 죈 기성 여성을 계도하려 한다. 권력 구도의 불균형을 의미하는 가부장제의 전복은 일응 자연스러운 수순이며 조만간 도래할 미래로 보인다. 그러나 외모 코르셋의 타파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만간에는 뒤룩돼지의 고간이 궁금하다거나 불균형한 비대칭, 곪은 피부, 탁한 안색의 면상이 밥맛을 덜 떨어뜨릴 것이라고 상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피부 관리라든가 체형 관리에 대한 개념 없이 순수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도태되지 않고 제 짝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자연 그대로를 거부하고 있다. 여성들은 특정한 기준의 미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성형을 하고, 그것이 자기만족이라고 자위하지만 실상은 남의 인정과 평가에 종속된 판단이라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체중을 위한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고, 심지어는 보형물까지 넣기도 한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거울로 보이는, 옷을 입을 때 태가 나는, 만지면 느껴지는 큰 가슴을 위해 살을 찢고 보형물을 삽입하는가? 분명 그럴 수는 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여자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치마를 줄인다거나, 화장을 한다거나, 명품을 두른다거나, 백인 남자친구를 사귄다거나, 특정한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을 둘러싼 평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화장이라는 개념이 있는 무인지대에서까지 매일을 화장을 하고 지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간 마주칠 인간의 가능성 때문에 화장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남을 의식한 행위이므로 자기만족은 아니다. 조금 예시의 비약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내 핵심 주장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필자는 평가의 부당한 기준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평가 자체의 유무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굉장한 오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