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인생을 명확하게 한다
"고통은 인생의 방향성을 명료하게 해주는 신호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는 모르겠는데 메모장에 기입되어 있다. 어쨌든 위의 경구들은 유사한 의미를 가지면서 내가 최근 깨달은 진리를 설파한다. 적어도 나는 그동안 실패를 하고 고통을 겪어오면서 걸러내야 할 인생의 선택지를 선분選分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적어도 군대 전역하고 어느 정도는 머리가 큰 후에, 내 앞길에 대해 5년은 생각하고 나서야 내 삶에 대한 방향성이 확립이 되는 기미가 세미하게나마 목도되는 듯하다.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삶의 방향성이다."
나는 가능성을 좇았고, 앞으로도 좇을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좇은 그 가능성들은 어느 정도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건 아니라는 대답을 해준다. 앞으로 좇을 것 역시 지금까지와 같은 대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이건 아니야, 빨리 다른 길로 선회해."라고. 가능성, 즉 잠재성이 명료성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각성한다. 내 꿈과 노력이 허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하게 되어있다."
현재의 감정과 관점으로,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는 선택을 하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미래를 위한 가능성과 현재의 명시적인 고통을 교환하는가? 당연히 전자가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은, 전자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감내할 만한 고통의 상태가 아니다. 나는 내 현재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그깟 최저시급과 주 40시간으로 교환하지 않겠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런 유의 일기가 지속될 것이 예상된다. 매일 일의 고통을 울부짖는 이 상황을 보면 심각하지 않다고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인생에서 오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신호를 잘 포착해내야 한다.
"우리는 실제보다 상상에 의해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 세네카
맞다. 내 현재의 고통 역시 그럴 여지가 없지 않다. 실제보다 내가 만들어낸 고통이 더 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신적 고통은 어느 정도는 통제가 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태도나 관점에 따라 상당히 많은 것들이 그에 맞게 유동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삶의 여유는 경험에서 나온다."
나는 지금 여유가 없다. 정신적인 여유 말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글이나 쓰고 앉아있을 정도면 그 자체로 여유의 방증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을 쪼개 악착같이 쓰고 있다. 악착같이 쓰는 것에 비해 결과물이 그리 양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일천하고 한미한 작문 수준에서는 최선이다. 작문 경험이 더 풍족해지면 여유가 흠씬 묻어나는 글이 탄생할지 모른다. 삶 역시 마찬가지. 내가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난관을 일전에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나는 직면한 문제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프로나 베테랑이 괜히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숙련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인내는 부의 한 형태다."
앞으로 나는 일을 그만두는 날까지, 한 달의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정말 그때까지 필요한 인내력은 내 삶을 통틀어 엄청나게 많은 양을 요구한다. 스트레스가 살면서 절정 단계에 있다. 물론 군대 스트레스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지금을 기준으로 밖에 재단할 수 없지 않은가. 오늘의 인내가 내일의 삶을 풍족하게 할 것임을 명심하자. 내일을 얻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교환 형태는 참 딜레마지만,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내일은 불명확하지만, 오늘의 고통은 명확한데, 왜 우리는 불명확을 위해 명확성을 포기하는 것일까. 마치 도박과 똑같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생의 성공을 논할 때 미래의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것일까? 현재의 명확한 고통에 대한 감내가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줄 확률을 높이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현재의 공부 스트레스라는 명확한 고통의 즉각적인 해소를 포기할 수 있어야 미래의 성공 가능성을 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현재의 고통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적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위험 신호를, 명확한 현재라는 선택지를 취택하여야 한다. 즉, 공부 스트레스로, 인간관계나 일의 스트레스로 자기를 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욘 없다는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미래의 성공에 대한 가능성이, 미래에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지금의 고통 해소를 이기는가? 자신이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대부분이 현재의 고통을 피하는 것을 선택하며, 나 역시 그래왔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포기 기준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정신 건강의 심대한 위협의 경우에만 한정할 것이고, 현재가 그러한 상태이므로 신속하게 포기를 결단한다.
인생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는 것은 실패를 맞는 게 아니다. 고통은 성장의 자양분일 수 있다. 그러나 회복 불능의 심각한 고통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패를 맞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이번 기회에 그것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긍정적 고통을 기꺼이 맞을 것이지만, 그 외에는 행복을 추구하며 오직 행복을 향해서만 달려갈 것이다. 내 인생에 행복을 최대한 많이 드리우는 선택을 할 것이다. 내 인생은 내 선택의 순간이 연속되어 구성된다.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어제와 오늘의 실패를 딛고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