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잘못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익명의 머구머 학생(친구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조별 과제 약속 불참을 알리지 않은 자, 이하 익명인)은 잘못이 있다. 나는 자신에게 그 어떤 큰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한 충격이나 감정 상태를, 그 일과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 표출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무리 심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건과 독립적인 관계에 있는 자에게 그것은 아무 사건도 아닐 수 있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을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죽어본 적이 있는 조원에게 익명인의 사건은 충분히 동감할 만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감하고자 하는 조원의 자율에 달린 것이지, 누구에게나 동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공감 여론에 반하는 생각을 품은 자를 비난할 수 없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마침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세월호 8주기다.).
익명인은 위 카톡에서의 부끄러운 어피치(이하 어피치)에게 관습과 도덕감에 호소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양해를 부탁하고 있지만 어피치는 익명인의 사정 따윈 자신과 관계없는 듯이 냉담하게 대응한다. 어피치에게 잘못이 있다면 공감하지 못한 잘못 밖에는 없다. 어쨌건, 익명인은 조별 과제에 참석하지 않아 조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조원들의 피해는, 익명인의 친구가 사망했다는 사실로부터 상쇄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조원들의 피해는, 익명인이 자신의 친구가 사망하여 약속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사실로부터도 상쇄되지 않는다. 즉, 조원들의 피해는, 익명인이, 친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알리지 않거나 동일하다. 물론, 익명인의 알림이라는 표현이 조원들의 양해를 불러일으켜 자신들이 떠안아야 하는 과제의 업무를 심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어떠한 상쇄 효과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익명인의 알림의 표현이 없더라도 실제적으로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작업의 양에 변동은 없다.
무엇보다 나는 익명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자신의 마음 상태만이 양해 받길 원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조원들의 실질적 피해가 상쇄되길 기대한다는 작태가 몰지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직장이었다면 익명인은 직장에 그 어떠한 통보도, 양해의 요청도 없이 무단으로 친구 장례식에 참석했을까? 아무리 충격이더라도 급하게 부랴부랴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라도 그 어떠한 주변적인 판단의 틈도 없었을까?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만, 단지 그 상황의 급박함이나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이 다른 사람들의 실질적 피해를 상쇄하지는 못한다. 익명인의 심적 충격으로 인한 미통지는 그로 인한 실질적 피해에 대한 짜증이나, 기껏해야 안쓰러움 정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친구의 사망, 친구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이 오직 친구에 대한 생각만을 일으킨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우연은 자신의 미통지를 고의가 아닌 과실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잘못은 잘못이다. 7시에 약속이었고 6시 30분에 부고를 들었다면, 통지를 위한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카톡 대화 시간으로 보아, 어피치는 약속 시간보다 2시간 45분 이후인 9시 45분에 불참 연유를 물어 왔다. 익명인은 언제까지 충격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인가?
첫 번째 사진에서 익명인은 '제가 어찌 제 친구를 떠나보낼 걸 미리 알고 말씀드리나요'라며, 마치 누가 친구 죽을 걸 미리 알고 연락하길 바라기라도 한 듯이 엉뚱한 항변을 하고 있다. 어피치나 다른 조원들은, 익명인이 예언가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친구가 죽은 이후에, 즉 약속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그 사이에 불참 의사를 알려 오길 바랄 수는 있고, 만약 정말 정신이 없어서 30분의 시간으로는 통지의 여유가 못 되었다면 그 이후에라도(어피치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먼저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