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트리거trigger

.,_ 2021. 12. 15. 00:49

xx로路 골목에 들어서자 나는 그날의 그 녀석의 정액 암향暗香을 떠올린다. 아니,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떠오른다. 지금은 암묵지로 전환된, 과거에 각인된 기억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사상寫像되는 것이리라. '그날'이란 지금 내 옆에 있는 남자와 함께했던 기억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 녀석'과의 추억은 아직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지금 옆에 있는 이 남자를 마주한 채로 그 '탈 많은 과거'가 계속 떠올라야만 하는가? 이것은 어쩌면 모든 '다중 연애자'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지독히도 길었던 고한苦寒의 기절期節을 극난克難하고 느른한 춘곤에 온 신경이 잠식되는 무렵이란, 나의 복잡 다사多思한 청춘에 더없는 흥취를 깊게 간각刊刻하는도다. 풍영豐盈한 벚꽃의 향취는 늦은 밤까지 여취餘臭가 되어 캠퍼스를 누비는 젊은이의 노곤함을 계류시키고, 그 안에서도 연인들의 애정 어린 아취雅趣를 간드러지게 자극한다. 봄 만의 특절絶特한 정취가 있다. 한파 직후 맞는 훈훈한 온기와의 비교 심리 때문인지, 집에 웅크려만 있다가 꽃봉오리가 돋아나듯 야금야금 기어 나오는 만물의 생동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다른 계절에 비해 송찬頌讚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인지 봄의 자극은 여름이나 겨울이라는 극단의 계절처럼 강렬한 것은 아니더라도 뭔가 아련하지만 묘려妙麗하고 심심深深하다. 봄이란 그런 것이다.

그 녀석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두 번째 사귀는 녀석이지만 이 전에 사귀었던 다른 녀석과는 비교하기 까다로운 애통한 봄의 각인이다. 첫 번째 녀석과의 추상追想은 성하盛夏의 끕끕함과 불쾌감으로 시작하여 엄동嚴冬과 극한極寒으로 끝을 맺어 격통의 시기로 회상되지만, '그 녀석'과의 춘몽은 온아溫雅한 애상으로 남아 어쩐지 추회追懷되고 연모戀慕되기도 하는도다.

그날도 우리는 여느 평범한 때와 마찬가지로 xx로에서 데이트를 하고 날이 어둑어둑 해져서야 번화가 변두리의 골목 어귀에, 묵허된 규약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입했고, 그 부근의 단골 숙박업소는 게박憩泊하라고 손짓하며 피뇌疲惱한 우리를 예입曳入했다.

이별의 종착지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데이트의 종착지는 대개 '이런 유의' 곳이었다. '이곳'은 데이트의 마무리를 지시함과 동시에 하루의 종극에의 도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이곳에 오지 않는 경우는 해당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곳에 왔다면 얼추 들어맞는다. 물론 내 모든 연애가 그랬다고 다른 연인들 역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연인에게 이곳은 하루와 데이트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나 먼저 씻는다. 순서를 정하기 위한 어떠한 발화도 우리에겐 필요치 않다. 우리는 그러한 자질구레한 절차를 진즉에 끝마친지 오래이다. 불필요한 간질간질한 종용은 없다. 나나 그 녀석이나 이곳 짬밥 좀 됐다. 따라서 이곳에서만큼은 우리는 자동기계다. 물론 그런 알콩달콩한 절차가 생략된 지 오래라고 하더라도 본 게임에 권태감을 느낀다거나 충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물론 본 게임의 '패턴'은 진부할지 몰라도 행위 '그 자체'는 완탄婉歎하지 아니한 적이 드물다. 나의 봄의 정사는, 아니 '그 녀석과의 정사'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각서刻署와도 같이 되어, 웬만한 자극으로는 개각改刻되기 힘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사를 치르고 나면 난 꼭 그 녀석의 정액을 연하嚥下하곤 했다. 그 녀석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의식의 마무리 단계로 여겨졌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일종의 강박이지만, 예전부터 나에게는, 무언가를 할 때 특정 행위로 하여금 깔끔하게 종지부를 찍어야만 안도감이 드는 집착 증세가 있다. 교접 후에 정액을 삼켜야만 비로소 하루의 의식이, 아니 하루가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정액의 은은한 향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정액을 삼킨 후에도 물로 한 번 정도만 헹굴 뿐이지, 굳이 입안을 치약 냄새로 도포하지 않는다. 그 녀석은 그 냄새를, 아니 그 냄새를 내가 품고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듯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정액의 향내를 머금은 채로 모텔에서 나와 약간의 잔한殘寒을 머금은 춘야의 번화가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 이것은 훗날, 봄만 되면 지독히도 억기憶起로 발현되어 지금은 애장하는 우수憂愁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와의 새로운 연애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쳐온 과거의 여러 내용은 필시 비교 심리를 자극하여 현재에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게 훼방한다. 이 남자에게 미안하지만(생각해 보니 굳이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녀석이 이 남자를 상회하는 것 같다. xx로 골목은 그 봄날, 내가 곧잘 받아먹었던 그 녀석의 농밀한 정액 내음을 떠올리게 했고, 그로 인해 그 애수 있는 밤거리가 떠올랐고 결국 그 트리거의 연쇄 작용으로 그 녀석과 이 남자와의 잠자리를 비교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무릇, 대부분의 관계는 갱신된다. 그런데 관계의 내용은 갱신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비교적 엄류淹留한다. 물론 그 기억들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니리라. 과거의 '사실'은 남아있지만 그 기억의 '형태'는 변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먼 미래에, 그 녀석과 동행했던 세계의 고기古記는 오련했던 기념으로도 회억回憶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날의 봄의 기억은, 도래할 수많은 봄에 의해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 녀석에 대한 추억은 기억 저편으로 스산히 사라져갈 것이다.

옆에 있는 이 남자에게 미안하지만(이건 좀 미안하다), 오늘부터 나는 이 거리에서, 지나왔던 수많은 과거의 내용을 떠올릴 것이고 그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억에 각인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고자 한다. 그것이, 바스러져 갈 내 젊은 봄날의 사념思念에 대한 배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