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드러나는 것들인가? 드러난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존재하는데 드러나는 것이 있는가? 드러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드러남이 존재성을 함축하는가? 도대체 '드러나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드러나다'의 뜻이 감추어진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존재성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고, 드러나는 것이 외계의 단서에 의한 주관적인 판단 작용이라면 존재성을 함축한다고 보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논의할 '드러나다'는 일반적인 현상의 이면에 대한 것이다. 이에는 먼저 정의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드러남이라는 것이 어떤 물리적 실체인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인지, 원인에 의한 결과가 드러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후자가 드러나다의 정의에 해당한다면 시간성이 배제된 공간에서 '드러남'이라는 현상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시간이 허상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그러한 공간에는 인과 작용이 발생하지 않는데, 아무 사건이 없는 공간에서 사건이 드러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이 정의에 의해 '드러남'에 대응하는 것이 존재성을 함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추론된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드러나는 것은 과정이지 실재가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가령 소설을 읽다가 허구의 특정 사건으로부터 그로 인한 결과적 사건을 도출한다. 이는 상상인데, 원인 사건에 의해 결과 사건이 드러났다고 표현한다. 즉 이 경우 오직 내 인식으로만 드러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드러나지 않음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이를 인식할 수 있는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은 시간성을 함축한다. 그런데 시간성과 존재성을 배제하고 드러남을 인식 가능한가? 먼저 인식이 시간 기반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가령 단지 1이라는 수는 시간과는 무관하지만 존재한다고 증명하기가 어려운 것 중 하나다. 유니콘이라는 개념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시간과도 무관하다. 그래서 유니콘은 '아직 드러나지 않음'을 반박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런데 이것 또한 절반만 맞는 판단으로 보인다. '아직'은 반격하지만 '드러나지 않음'을 반박한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앞에서 논의한 '드러남'의 적용 범위에 의하면 이미 인식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 존재하지 않는 것에 드러난다는 표현이 가능함을 보았다. 그런데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는 앞의 명제와는 모순된다. 이 역시 '드러나다'라는 자연언어 사용이 언어 이면의 논리 규칙에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 작용은 인식할 수 있는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명제는 거의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거의 확실하다. '인식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한다'보다 '인식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인식한다'가 더 불명확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집합적으로 봤을 때 모든 것을 지시한다. 수리 논리학적으로 봤을 때 '있는 모든 것과 없는 모든 것의 총화'는 엉터리 문장이다. 범위와 정의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굳이 '있는'과 '없는'을 추가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모든 것'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문제는 모든 것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포함되느냐는 것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당연히 포함시킨다. 물리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즉 앞에서 논의한 인과적 사건 따위의 개념도 포함시킨다. 논리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포함되는가? 네모난 원은 인식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논리적으로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네모난 원'의 사례만 가지고 모든 논의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논리적 모순인 '네모난 원'은 드러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 '네모난 원'에 대응하는 것이 애초에 논리적 가능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모난 원'이라는 지시어는 아무것도 지시하는 것이 없다. 결론은 드러나지 않고 인식되는 것이 있고 드러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