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의 해체는 가능한가?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에서 생각해볼 만한 구절이 있어 그것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그 아득한 옛날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석기 시대의 인간 집단은 아이들이 특정 부모와 결부되지 않는 가모장제 사회였을 것이다. 성인 여자들은 모두가 어머니였을 것이고, 남자들은 그 누구도 특정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회적 역할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런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이론상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나중에 누군가에게 물려줄 내구재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아이들이 누구의 자식인지가 중요해졌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분명했지만, 아버지의 정체는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부권을 확립하는 데는 혼인과 기록 같은 사회적 기제가 필요했다. 재산 상속 문제는 가부장제 가정의 출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 뒤로 ... 남성들의 일이 중요해졌다. ... 그런 서사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선천적으로 다른 역할을 타고났다. 그 선을 넘는 자들은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 p. 438 ~ 439
예전에 나는 어떤 글에서 과거 선사시대 즈음 이래로 남성 권력이 여성을 지배하는 데 작용했다는 뉘앙스를 전제로 하여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물론 남성 권력이 여성을 지배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했던 판단으로, 성급한 단정이었다. 단지 비교적 근래의 모습을 기준으로, 즉 남성 권력이 여권에 비하여 우위에 있다는 표면적 사실만으로, 그러한 추단을 한 것이다. 어쨌든 책의 저러한 가설은 받아들일만하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폭력적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필연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결혼 제도가 상속으로부터 왔다는 해석은 꽤나 신박하다. 그리고 위 구절의 마지막 두 문장은 주어진 성 역할은 생존에 직결되는 역할 분담이므로, 그에 대한 간섭이나 해체는 집단 생존에 위해를 끼친다는 뜻이다.
"기계가 곳곳에 등장하자 한때 여자들과 가정을 결부시켰던 물질적 필연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공적 무대에서 일하려고 하는 여자들은 자녀의 안전이나 혈족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 사실 기계가 출현하자 인간사의 대다수 영역에서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할 만한 '생물학적' 이유는 없었다(남성보다 여성을 선호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성별과 연관된 서사들은 그 내용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물질적 현실에 적응해갔다." - p. 440 ~ 441
시대가 변하면서 고정된 성 역할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남자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여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엄밀하게 말하면 남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여자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기계가 대체할 수 있게 되어, 그 기계를 여자가 다루어, 남성이 잘 해내는 일을 여자도 간접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기계의 일에는 생물학적 구분이 없다.
"집에서 아내가 빈둥거릴 만큼 돈을 벌어다 주는 남편은 자부심을 느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집안일을 높이 떠받드는 풍조가 나타났다. 밖에서 일하지 않는 여자가 칭송되었고, 연약하고 예쁜 여성상이 강조되었다. ... 생산 시스템의 기계화로 저렴한 소비재가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심지어 가정에서도 여성 노동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산업주의 덕택에 한가해진 다수의 중산 계급 여성들에게 가정생활은 무의미하고, 심지어 영혼을 옥죄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직장에 다니지는 않더라도 일단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 p. 442 ~ 443
여성에 대한 사회적 유리천장에 대한 부당함을 부르짖는 여성은 대개 자기 일에서 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부당함을 느끼거나 그것을 목격한 자일 것이다. 물론 특별한 자기 일이 없는 가정주부도 그러한 유리천장의 문제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남녀의 문제라고 보기 애매하다. 왜냐하면 열등한 남자가 우등한 여성에 비해 간택될 확률이 높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성별에 따른 보편적 성향에 따라 선호도의 차이는 다를 수 있고, 아직까지 '큰일은 남자가'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특정한 일에 대한 적합도의 기준의 관점에서는 옳지 않은 태도이다. 어쨌든 그러한 태도의 보편화가 부당한 사회 기조를 형성하였다면 청산해야 할 숙제이리라. 어쨌든 아직 '바깥 일'에 대한 남성 편향적 시각이 말끔히 해소되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다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집안일이나 하면서 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이 없다면 집안일을 하는 삶에 감사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집안일만 하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차라리 밖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깨지면서 모험적인 경제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성향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회에 부딪히면 그 정서적 부담감에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려고 들 수도 있다. 어쨌든 선호와 선택은 상황 바이 상황이다. 그리고 매우 가변적일 수 있다.
여성의 유리천장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러 고려 사항이 많을 것이다. 우선 실력적인 면에서 남녀의 차등을 두지 않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임신, 출산에 대한 불이익이 없어야 할 것이고, 남성 승진에 비해 여성 승진에 차등을 두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물론 회사는 당신의 임신 사실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익에 해라고 느낄 여지가 더 크다. 왜냐하면 여성의 커리어의 공백은 여러모로 주변에 불익을 안기기 때문이다. 회사는 임신, 출산한 여성에 대한 법적 책무를 다해야 하며, 여성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다른 사람이 메워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사실상 이는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면서 생긴 모순되는 점이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산업 재해로 인한 근로자의 권리 보장이 여성의 사회 진출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면(법을 잘 몰라서), 단순히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그에 대한 여러 까다로운 권리 보장이 여성에 대한 특수한 편의 제공이라고만은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 역할은 인간 생활의 가장 뿌리 깊은 구조이므로 급격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일어난 성 역할과 고정관념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내가 보기에 여성이 공적 영역에 등장한 현상-기계의 여러 파급효과 중 하나이다-은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전상 중 하나로 평가되어야 한다. ... 성 역할 혁명은 시작된 지 2세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큰 진전을 이뤘고, 앞으로 나타날 더 종말론적 변화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 변화에는 가부장적 가정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인간 정체성의 근본적인 측면인 성별의 종말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다수 사회에서 해당 사회 규범과 정서적 공감대가 인류 문화 차원의 성 역할 혁명을 아직 따라잡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 p. 445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이미 많이 흐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고수하는 사람도 아직 꽤 많다. 어쨌든 변화의 움직임에 맞게 사회는 대안을 만들어낸다. 여자가 밖에 나와 일을 하고 싶어 함으로써(혹은 둘이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상황 때문에) 맞벌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아이도 잘 낳지 않거나, 아이를 낳아도 보육 시스템이 발달했다. 또는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전복되어 남성이 집에 들어가 아이를 돌보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다수의 여성이 밖에서 일을 하기보다는 결혼에서 집에 들어앉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택하는 것 같다.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고, 일도 하고 싶고, 남편과 집안일도 분담하고, 회사도 나에 대한 법적 권리를 전적으로 존중해 주고(이건 법적으로 당연한 것), 내 커리어와 진급에 대한 차별도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이 사회에서는 욕심일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이미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대안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혼은 그냥 하면 된다. 임신과 출산이 조금 기간적으로 조금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는 법적 보장의 영역이므로 눈치 볼 이유가 없다.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잘못이다. 어쨌든 이에 대한 손실은 회사와 사회가 감수해야 할 문제다. 사회적으로는 아이 한 명은 생산력을 의미하기에 손실은 아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단기적인 손실이긴 하다. 어쨌든 1년 정도 법적 권리 보장받으면서 애 낳고, 육아 휴직을 하든, 애를 부모나 어디 양육 단체에 맞기든, 남편이랑 상의해서 남편이 애를 보든 해서 아이의 중요한 정서적 형성기를 간신히 보내면 된다. 만약 육아 휴직 이후라면 눈칫밥도 먹고, 일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시간도 걸리겠지만 괜찮다. 당신은 아직 이상적인 복지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너무 손해 봤다고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게 정신적으로 본인에게 이익이다. 어쨌든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남편과 가사 분담하고, 애도 조금씩 커가겠다, 양육 부담도 조금씩 덜어가는 중이고(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초반의 모든 거동을 다 돌봐야 했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내 커리어를 차별 없이 인정해 주고 진급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 회사를 만났기만을 기도하면 된다. 너무 이상적인가? 아니다. 아직 사회와 국민성이 성숙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물론 사회 탓만이 아닐 수도 있다.
여성과 남성의 결과적 격차가 여성적 차별을 반드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일부러 여성을 차별하고 싶어서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내 동생이 나보다 더 공부를 잘하거나 몸집이 좋다고 해서, 나의 부모가 나보다 동생에게 더 교육을 시키고 잘 먹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후 해석 편향이다. 결과주의다. 어쨌든 우리는 결과만 보기 때문에, 결과만을 가지고 원인을 추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은 주로 여성 편향적으로, 남성은 남성 편향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ceo는 ceo의 관점에서, 근로자는 근로자의 관점에서, 선생은 선생 입장에서, 학생은 학생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편향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편향성을 해소하고 다방면에서 이러한 사안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역지사지적 태도는 좋은 자세이고, 정량적 객관화는 좋은 계측 방안이다.
혹자는 나에게 질문할 것이다. "너는 성 평등주의자냐?" 이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성 평등주의자도, 성 평등주의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즉, 이는 "나는 성 평등주의자이거나 성 평등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그렇다. 나는 성 평등주의자이거나 성 평등주의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