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해야 한다'의 시대는 끝났다

.,_ 2021. 11. 19. 14:25

'해야 한다'의 시대는 (이제 곧) 끝났다. 물론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어쨌든 강박적 당위는 종식 수순을 밟고 있다. 이는 전통적 규범에 한한다. 예전부터 반드시 해야만 했던 상례나 도덕 준칙의 의미와 그 시행 양상이 상당히 희미해지고 있다. 일례로, 명절에 모이지 않고 여행을 가거나 제사를 건너뛰는 경우가 그러하다. 결혼식, 장례식은 아직 멀었지만 돌잔치나 환갑잔치 따위의 예식은 간소화되거나 사라지는 추세이고, 추세를 떠나서 이제 신세대는 그러한 무용한 것들에 더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필자는 이 점에서는 매우 급진적인데, 모든 비자발적 예식의 완전한 종식을 희구한다. 유교 전통 규범의 강요는 포악질이다. 나는 강제로 낳음 당했고 억지로 사회에 스며들어야 했다. 나는 사회의 암묵적 규칙이나 관습이 감정적으로 싫다. 만고萬苦의 근원은 '마음에 들지 않음'이라는 상태이다. 병적으로 따르기 꺼려지는 예식에 대해 이제 필자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명한다. 물론 사회성 학습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이제까지는 주어진 강요에 군소리 없이 따랐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 내가 따르기로 약조하지 않은 모든 규범에 대해 거부하기로 했다.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을 왜 했는가? 해야 하는 것은 왜 해야 하는가? 우선해야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준법 행위 역시 당위 행위이므로 논의의 여지가 상당하지만 일단은 오늘은 추석특집이므로 법적 문제는 논외로 하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헌법이 부여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지나칠 수는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조세나 국방의 의무 따위는 우리의 생의 명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므로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되면 문제의 비대화 가능성이 여실해지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초점은 전통적 의식의 당위성이다. 장례식을 예로 들어보자. 장례식은 죽은 자에게 아무런 물리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정신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식이라는 말은, 요즘에 느낀 것이지만, 틀렸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장례 행위는 적어도 죽은 자를 기리는 산 자의 마음속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의식에 불과하지 죽은 자에게 직접적으로 어떠한 정신적인 영향이 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에 반대할 것이다. 내 생각과 그에 대한 반대 생각은 참으로써 양립할 수 없다. 모순 관계이므로 둘 중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다. 만약 장례가 죽은 자에게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이라면 장례가 죽은 자에게 최소한의 정신적, 물질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거짓이다. 이에 대한 진위 여부를 그 누구도 입증해내지 못했으므로 판단 보류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의 지론은, 물리현상은 존재성이 의문인 영혼에 어떠한 식으로도 침투할 수 없고, 독립된 두 정신 작용이 서로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한다거나 무형의 장례 절차를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가 죽은 자의 영혼에 닿을지 알 길이 없고,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의 물리적 옷차림이 죽은 자의 예절 의식에 어떠한 영향도 직간접적으로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처럼 보이는 산자를 위한 의식이다. 물론 '위한다'가 '기린다'를 의미한다면 죽은 자를 직접 지시할 수는 없지만 죽은 자를 상상하는 관점에서 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예식 절차 자체는 살아서만 영향을 받는 행위이다. 그 안에 설령 어떠한 정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산 자들 간의 공유이지 죽은 자와의 소통이 아니다. 뭐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거의 모든 장례 절차를 거부한다. 특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형국은 꼴을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추한 집단 린치이다.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소꿉장난 같다. 과거로부터의 여러 의식, 제례 행사 따위는 놀이로부터 온 것이 많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물론 어떤 기준으로 놀이를 설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 애들 장난 같은 형식에 목을 매거나, 그것을 거부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 꼴은 그다지 성숙한 성인들의 의사 합일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발이 넓은 필자의 아버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요즘에는 (코로나 이전에도)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사람에게 돈만 보내라고 카톡이 온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드라이브 쓰루 장례식이 몇 년 전부터 도입되었다. 굳이 얼굴 보고 인사하지 않고 돈만 내고 차 안에서 기도 한 번 하고 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는 장례식에 조문객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스트립쇼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퇴폐 장례식은 중국 공안 당국의 철저한 색출 대상이지만 말이다. 물론 이러한 예식의 변형 사례들이 예식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식에 대한 거부 반응의 일로라는 점에서 이러한 기조는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어떤 것도 예식의 불필요성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것도 예식의 필요성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리한 미래를 받아들이고 개척하면 된다. 이렇게 사라져갈 예식에는 아무 정당화 과정이 필요 없다. 영원히 지켜야 할 의식 또한 없다.

상조 업체나 웨딩 업체가 당장에 사라져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가만히 있더라도 이들 산업이 퇴보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당위란 명제적으로는 단지 해야 함을 주장할 뿐이지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행위가 귀속되어야 함까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손윗사람에게 존대해야 한다'라는 당위 역시 행위 구속적인 의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이에 따른 존대는 공리적이지 않아 필연성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예식을 고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이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고,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정당한 논거가 있는 예식을 강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거는 강제적으로 행해져야만 하는 구속력을 그다지 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불필요하게 시댁살이 하면서 고생하는 꼴(설령 그것이 개인의 허상이라고 할지라도)을 봐온 나는, 저것이 과연 오직 엄마의 독단적인 선택이라고 치부하고 고통에 대한 모든 잘못과 책임을 엄마에게 부과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빠진 적이 있다. 필자의 결론은, 엄마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부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는 일을 강단이 없어서 마지못해 선택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로 다짐했고, 친척에 어떠한 기대도 의존도 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지 않는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상호 교류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바스러져가는 기성세대의 공허한 관념을 지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